〈논어〉를 다시 읽는다 ③

많은 사람들이 〈논어〉를 읽음으로써 공자라는 위대한 인물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 그는 누구일까. 싯다르타나 예수의 경우가 그러하듯, 실제 공자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관련 자료는 불충분하고, 그나마도 후대의 윤색과 왜곡을 거친 것이다. 예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신약성경은 물론 바울이 남긴 기록, 복음서, 외경, 그리고 유대교에서 전승된 각종 기록들을 고려해야 하듯이, 공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도 다양한 전승 자료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료 대부분이 기억의 재구성이자 문학적 형상화의 결과다. 기억이란 선택적일 수밖에 없고, 그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기억할 때 존재했던 어떤 필요다.

다양한 화풍의 공자 초상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양한 화풍의 공자 초상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1. 선생으로서 공자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공자 모습은 선생이다. 배움과 예를 강조하는 〈논어〉가 그러한 공자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 후반부 역시 현실 정치에서는 실패했으나 강학의 영역에서 성공하는 공자 모습을 묘사했다. “천하의 군주로부터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있었고, 살아 있을 때는 영화를 누렸으나, 죽으면 끝이었다. 공자는 관직 없이도 열 세대를 지나서도 배우는 이들의 종주가 되었다. 천자와 왕후로부터 중국에서 육예를 말하는 자들은 공자에서 표준을 구하니 지극한 성인이라고 하겠다.” 즉 현실 정치가로서 실패는 선생으로서 성공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지위가 높은 이들마저 공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2. 문명의 계승자로서 공자

〈사기, 공자세가〉에는 광(匡) 지역에서 위기에 빠진 공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필 공자의 모습이 포악한 양호(陽虎)와 닮아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바로 그 위기 상황에서 공자가 했다는 말이 〈논어〉에 전해온다.

‘선생님께서 광(匡) 지역에서 핍박받고 말씀하셨다. “문왕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문명이 이제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장차 이 문화(斯文)를 없애려 했다면, 문왕보다 뒤 세대인 내가 이 문화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감히 어쩌겠는가?’

여기서 ‘이 문화(斯文·사문)’란 과거에 존재했다고 믿은 이상적 문화를 지칭한다. 공자 자신이야말로 그 이상적 문명의 계승자이니, 광 지역 사람들이 감히 자신을 해치도록 하늘이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문명의 계승자라니! 오늘날 같으면 비대한 자의식이라고 욕을 먹을 만큼 엄청난 자의식이다.

3. 새로운 시작으로서 공자

〈춘추위(春秋緯), 연공도(演孔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가 대택의 언덕에서 노닐었는데, 꿈속에서 흑제의 사신이 와서 같이 가자고 초청했다. 따라가서 꿈속에서 (흑제와) 교접하였다. (흑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빈 뽕나무 혹은 공상이라는 곳에서 아이를 낳으라.’ 깨어나 보니 임신한 느낌이 있었고, 공자를 공상에서 낳았다.”

보다시피 〈춘추위(春秋緯), 연공도(演孔圖)〉의 공자 출생 묘사에 따르면, 공자의 출생 과정 자체가 신비에 싸여 있다. 왕조를 개창한 사람이나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 사람이나 새로운 문명을 열었다는 사람들의 출생 서사는 대체로 이렇다. 모두 통상적인 의미의 부계를 부정하고, 신성을 가진 존재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공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버지는 간단한 정보만 제공될 뿐 공자의 출생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그 존재가 대체로 지워진다.

4. 예언자로서 공자

하휴(何休, 129~182)는 〈공양전해고(公羊傳解詰)〉에서〈연공도(演孔圖)〉를 인용해가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공자가 우러러 보아 천명을 추측하고 굽어보아 시대의 변천을 살펴보았더니 미래를 관찰하여 무궁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나라가 이 혼란의 시대 뒤에 올 것임을 알고 혼란을 다스릴 법도를 만들어 전수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한나라 제국의 모습을 예언하는 존재이기까지 하다. 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후대에 올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러한 공자의 모습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5. 성인으로서 공자

공자를 계승하는 이들은 종종 공자를 성인으로 간주했다. 〈맹자〉나 〈순자〉처럼 명시적으로 공자를 계승하려는 텍스트 이외에도 〈묵자〉 〈장자〉 〈한비자〉 등 공자에 비판적인 텍스트들도 공자라는 존재를 소환한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만 해도 공자는 유력한 가르침과 학인 집단을 대표하는 이름에 가까웠지 후대에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은 본격적 성인은 아니었다. 공자의 성인화가 본격화된 것은 한나라 때이며, 그것은 〈논어〉가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6. 왕으로서 공자

왕이 아니고 일개 지식인에 불과했던 공자는 점차 왕 못지않은 권력자로 인식되었다. 한나라 때 공자를 따라다닌 저 유명한 “소왕(素王)”이란 표현은 공자가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왕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소왕이라는 표현은 단지 공자가 왕과 다름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실제 왕들은 오히려 왕다운 자질을 결여했으나 왕위에 오르지 않은 공자야말로 진정한 왕이라는 함의까지 담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현실의 왕들은 오히려 공자를 존숭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7. 신으로서 공자

〈논어〉에서 공자는 신과 거리가 멀다. 제자들에게 때로 타박을 받아가며 자기를 알아줄 권력자를 찾아 떠도는 사람이 초월자일 리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공자는 “괴이한 힘과 어지러운 귀신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고,” 신보다 인간에게 집중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왕이나 성인 취급을 받았을 때조차, 공자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나라에 이르면 공자를 신으로 여기는 흐름이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춘추위(春秋緯), 연공도(演孔圖)〉는 공자를 신의 아들처럼 묘사했다. 신의 아들로 태어난 공자가 보통사람과 똑같이 생겼을 리 없다. “공자는 키가 십 척이고 허리가 아홉 아름이고, 앉으면 똬리를 튼 용과 같고 서면 견우별과 같고, 나아가면 묘성별과 같고, 멀리 바라보면 북두칠성과 같다.” 공자 어머니의 임신 과정은 성모 마리아의 예수 임신 과정에 비견될 정도의 서사이다.

9월25일 대구향교 대성전에서 유교 최고 의례로 공자 등을 기리는 석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9월25일 대구향교 대성전에서 유교 최고 의례로 공자 등을 기리는 석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8. 유학자로서 공자?

사람들은 공자를 유가, 유학, 혹은 유교의 창시자로 여기곤 한다. 예컨대 중국 학자 류쩌화는 자신의 중국 정치사상사 서술에서 “공자가 유가 학파를 창립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는 어폐가 있다.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든 유가, 유학, 혹은 유교라는 것은 공자 생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다. 공자가 살아 있던 당시에는 확고한 의미에서의 학파나 ‘유교’라고 이름 할 만한 조직화된 운동이나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싯다르타가 불교도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듯, 공자 역시 유학자가 아니다. 불교나 그리스도교가 싯다르타와 예수가 해당 종교 이전에 활동했듯이, 공자 역시 후대에서 말하는 유가, 유학, 혹은 유교 성립 이전에 활동했다.

9. 혹독한 관리로서 공자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노(魯)나라와 제(齊)나라의 군주가 협곡(夾谷)에서 회동할 때, 공자는 노 정공(定公)에게 만일을 대비해서 물리력을 잘 갖추라고 조언한다. 마침내 회동이 이루어졌을 때 제나라 경공(景公)이 적절하지 않은 예식을 연출하자 공자는 하급 관리를 시켜 예식에 동원된 광대들과 난쟁이들의 손발을 잘라버린다. 이러한 과감한 처벌을 본 제 경공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장면에서 공자는 도덕군자로서 군주의 권력을 제어하기보다는 강화하는 관리, 정치권력과 거리를 두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가신, 유랑 지식인이라기보다는 무자비할 정도로 집행력이 뛰어난 관리처럼 보인다.

이런 장면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 이미지와는 다른 공자 이미지가 존재했고, 그 이미지에 따르면 공자가 반드시 예치에만 연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공자가 법을 가혹하게 집행하는 에피소드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공자가 노나라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처형한 사건이다. 당시 사법을 총괄하던 사구(司寇) 직책을 맡은 공자는 취임한 지 불과 7일 만에 관료 소정묘를 제거했다는 기록이 〈사기, 공자세가〉와 〈순자·유좌(荀子·宥坐)〉를 비롯한 중국 고대 문헌 여러 곳에 실려 있다.

10. 비판 대상으로서 공자

공자에 대한 칭송만큼이나 뿌리 깊은 것이 공자에 대한 비판이다. 〈논어〉 안에 이미 공자를 비판하는 인물들이 등장할 정도다. 전국시대로 갈수록 그런 경향은 더 강해진다. 공자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맹자〉 같은 텍스트에는 물론 공자에 대한 칭송이 넘치지만, 〈장자〉 〈열자〉 〈한비자〉 〈안자춘추〉 등 여러 전국시대 텍스트에 공자를 비판하거나 멸시하거나 조롱하는 내용이 다수 등장한다. 그들이 비판하는 공자가 공자의 실제 모습인지, 세월을 거치면서 윤색된 것인지, 공자를 비난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인지, 영향력을 얻기 위해 공자의 이름을 빌려서 말한 것인지, 오늘날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칭송이건 비판이건, 공자가 자주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공자라는 캐릭터의 영향력을 뒷받침한다. 그러한 영향력은 그 이후로도 지속되어, 현대에 이르면 공자를 현대화의 걸림돌로 간주하는 이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비판자들은 공자를 과거 전통의 상징으로 만든 뒤, 그 상징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너지를 현대화의 동력으로 삼곤 했다. 그러한 동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주기적으로 공자망국론을 제기한다. 단순화된 공자망국론은 단순화된 공자찬양론만큼이나 자의적이다.

5월21일 관광객들이 공자 탄생지인 중국 동부 산둥청 취푸시의 ‘니산성징(尼山聖境)’을 돌아보고 있다. ⓒXinhua
5월21일 관광객들이 공자 탄생지인 중국 동부 산둥청 취푸시의 ‘니산성징(尼山聖境)’을 돌아보고 있다. ⓒXinhua

11. 진짜 공자는 어디에?

예수 이후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사도 요한, 베드로, 바울이 중심이 된 교회의 발전사다. 오랫동안 이 같은 서사에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 지역인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옛 문헌으로 인해 그러한 서사는 재고되었다.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현재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네 개의 복음서가 아닌 토마스 복음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타력 신앙관이 익숙하다. 그런데 토마스 복음서는 그와는 판연히 다른 자력 신앙관을 설파한다.

이것은 그 유명한 아리우스 논쟁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신으로서 예수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에는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다양한 입장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처럼 경쟁하는 입장들 간의 긴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집트 북부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 알렉산더와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아리우스 논쟁’이다. 두 사람 모두 예수를 존숭했으나, 알렉산더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간주했고, 아리우스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볼 경우, 그리스도교는 타력 종교가 된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구원받는 존재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신에 의해 구원받는 죄인이다. 예수를 인간으로 볼 경우, 그리스도교는 자력 종교가 된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구원받는다. 심지어 예수처럼 될 수도 있다.

공자의 이미지 역시 아리우스 논쟁을 연상시킬 만큼 다양하다. 예수가 랍비(율법 선생)이기도, 예언자이기도, 메시아이기도,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나님 그 자체이기도 했던 것처럼, 공자 역시 선생이기도, 예언자이기도, 관리이기도, 성인이기도, 신이기도, 국혼이기도, 겁쟁이이기도 했다. 공자의 이미지는 그처럼 다양한 반면, 실존 인물 공자에 대해 확언할 수 있는 자료는 지나치게 부족하다. 그 자료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왜곡인지 밝혀내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솔직히 인정하자, 우리에게 익숙한 공자는 그러한 불충분하고 왜곡된 자료에 기초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공자라는 실존 인간에게 가닿을 수 없다. 그러니 〈논어〉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실존 인물 공자라기보다 〈논어〉가 전하고 있는 공자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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