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다시 읽는다 ②

남녀 간 대화를 담고 있는 희곡을 상상해보자. 그 희곡을 공연한 연극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관객은 연극에 몰입한 나머지 주인공 남녀가 자기 뜻대로 상대에게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주인공 남녀는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극작가의 언어다. 그들의 언어는 현실의 언어가 아니라 해당 희곡의 어법에 맞게 다듬어진 언어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하지 않는다. 어떤 노인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외친단 말인가.

중국 베이징의 공자서원에서 주최한 제사 의식에 참여한 학생들의 모습. ⓒAP Photo
중국 베이징의 공자서원에서 주최한 제사 의식에 참여한 학생들의 모습. ⓒAP Photo

〈논어〉라고 해서 얼마나 다를까. 〈논어〉에 수록된 대화가 정말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대화 그대로일까? 고대 중국에 녹음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현장의 말들은 공중에 흩어지고, 몇몇 사람의 기억 속에서 전수되다가, 누군가에 의해 채록된 것이다. 편집자는 이미 원전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형편에 맞게 책을 편집한다. 이런 것이 논어가 태어난 과정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우리가 회의록을 작성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회의에서 오간 말들을 말투까지 그대로 회의록에 적지는 않는다. 회의에서 실제로 오간 말들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필요한 내용만 회의록 양식에 맞게 기록된다. 그 회의록만 보아서는 말한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음조로 어떤 간격으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속도로 어떤 강약으로 어떤 디테일을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논어〉도 그와 같이 정리된 기록이다.

공자가 책상 앞에 앉아 〈논어〉라는 책을 저술했으면 문제는 간단하련만, 공자는 〈논어〉를 저술하지 않았다. 〈논어〉는 개인이 저술한 책이 아니기에, 체계를 찾기 어렵다. 〈논어〉는 20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순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편들은 물론, 그 편에 실린 문장들 역시 시간적 순서와 무관하다. 어디 그뿐이랴. 똑같은 문장이 여기저기서 반복되기까지 한다. 각 편의 제목도 처음 등장하는 글자들을 선택한 것일 뿐, 일관된 주제를 표현하지 않는다. 몇몇 단락이 연관되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연관성 역시 애매하다. 〈논어〉는 일시에 체계적으로 만든 텍스트가 아니다.

어디 〈논어〉만 그럴까. 〈신약성경〉의 마르코복음 5장 22절 이하에는 예수가 병든 소녀를 치유해주는 대목이 나오는데, 같은 이야기가 마태오복음 9장 18절 이하에서 반복된다.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약간 바뀐 형태로. 이 중 어느 것이 진짜 이야기일까. 이 질문에 답해줄 결정적 증거가 있을까? 이십만 개에 달한다는 신약 구절들의 이본들을 검토하고, 필사본 수천 개를 비교해보아도, 기원후 2세기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 〈신약성경〉이 다루는 상황과 전해진 기록 사이에는 200년 이상의 거리가 있는 셈이다. 좀 더 이른 시기의 판본이 발견된들 그것이 원본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스어와 아람어를 넘나들며 생기는 번역의 문제도 있다. 게다가 〈신약성경〉의 각 표현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당대의 관용적인 표현을 활용한 것이 많기에 참고해야 할 자료는 한층 더 늘어난다. “이는 내 계약의 피다”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넘어 아람어에 비슷한 구문을 찾아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문장들이 당대 언어의 규칙과 관습을 상당히 따르므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러한 수고를 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해도 사태 그 자체에 다가갈 수는 없다. 즉 가장 오래된 판본을 찾아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것은 아니란 말이다.

〈논어〉도 마찬가지다. 〈논어〉 속 대화 장면은 비디오로 촬영한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속기사가 받아 적은 것도 아니다. 내용은 기억에 의존해서 재구성되었고,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극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실제 일어나지 않은 대화도 공자 이름으로 포함되었을 수 있다. 공자가 권위적 존재가 된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말을 퍼뜨리고 싶어했을 테니까.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의 공통점

〈성경〉이나 〈논어〉 같은 고대 문헌에 체계가 없는 데는 물리적 원인도 있다. 〈논어〉 성립기 문헌들은 오늘날 볼 수 있는 책의 형태가 아니었다. 죽간이나 목간의 형태로 존재했고, 죽간들은 끈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날 책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각 부분들이 교체되고 재배열될 수 있었다. 논어를 이루는 부분들은 그러한 재배열 과정을 거쳐 전해 내려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현재 형태로 정착된 것이다.

학자들은 현행 〈논어〉가 한나라 때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서 예문지, 논어조〉는 한나라 때 이미 별도로 제나라 논어와 노나라 논어라는 두 종의 〈논어〉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충의 〈논형, 정설론〉은 공자 고택에서 옛 논어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한나라 때 적어도 세 종의 〈논어〉, 노(魯)나라에서 전해온 노론(魯論)·제(齊)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제론(齊論)·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논어(古文論語)가 존재했던 것이다.

경희대 공자아카데미가 개최한 ‘중국 문화의 날’ 행사에서 관람객이 유가 경전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희대 공자아카데미가 개최한 ‘중국 문화의 날’ 행사에서 관람객이 유가 경전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행 〈논어〉는 전한 말의 장우(張禹)가 여러 〈논어〉를 통합해서 편집한 장후론(張侯論)에 기초해 있다. 장후론 전체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것이 현행 〈논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후한 시기 정현(鄭玄, 127~200)의 정리를 거쳐 탄생하게 된 위(魏)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이르면 대체로 현행 〈논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수세기에 걸친 점진적 과정을 통해 현행 〈논어〉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 탄생 과정에는 한나라 때 경전 학자들의 작업이 결정적이었다. 고대 문헌 전승 과정에서 이런 일은 꽤 흔하다.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저술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플라톤(과 그 밖의 몇몇 저자)의 저작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 플라톤의 저작도 기원후 2세기 이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노력 덕분에 정리될 수 있었다. 그 정리 과정에서 편집이 개입하고, 분류가 이루어지고, 주석이 더해지고, 체계화가 시도되었다. 그리스도교 초기의 교부학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교 성행기의 프로클로스 리카이우스(Proclus Lycius), 프로클로스의 제자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의 제자 올림피오도루스(Olympiodorus) 같은 이들은 한나라 경학자들처럼 고대 희랍 텍스트를 정리하고 주석을 달았다.

현행 〈논어〉의 핵심이 한나라 때 성립되었다고 해서, 〈논어〉가 그때 곧바로 경전의 지위를 누렸던 것은 아니다. 한무제(漢武帝) 시기에 오경박사(五經博士)라는 이름으로 경전 공부를 제도화했다는데, 그 오경 안에 〈논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 당시 오경이란 시(詩)·서(書)·예(禮)·역(易)·춘추(春秋)를 뜻했다. 그래서인지 〈논형, 정설〉에서는 〈논어〉를 “경”이 아니라 “전”이라고 불렀다(名之曰傳). 물론 고대 중국에서 경전의 뜻은 오늘날 경전 혹은 고전의 뜻과 같지 않았다. 진(晉)나라 때 장화(張華)가 편찬한 〈박물지(博物志)〉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성인이 제작한 것을 경이라고 하고, 현인이 저술한 것을 전이라고 한다.” 〈논어〉는 공자가 편찬한 것이 아니라 그 계승자들이 편찬한 것이므로 당시에는 경전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논어〉의 존재감이 미미했다는 말은 아니다. 〈논어〉는 〈효경〉과 함께 공부해야만 하는 텍스트로 중시되었다. 경전에 준하는 위상이 있어야 위서가 생겨나는 법인데, 〈논어참(論語讖)〉 같은 위서가 생겨난 것을 보면, 한나라 때 〈논어〉의 존재감은 확고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송나라 때 〈논어〉는 십삼경에 포함됨에 따라 다시 한번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남송 때 주희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이른바 사서로 현창할 정도에 이르면, 거의 아무도 〈논어〉가 공자의 대표적 어록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그러나 과연 〈논어〉가 그러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해도 좋은 것일까. 일단 〈논어〉의 성립 과정을 분명히 알려줄 수 있는 사료는 현재 전혀 없다. 물론 꾸준히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고, 새로운 문헌 연구가 제출되고 있지만, 그 어느 자료도 공자와 제자들에게 직접 가닿지는 않는다. 마치 불경 문헌 연구가 아무리 성공적이어도 결국 불타에게 직접 가닿지 않는 것처럼. 붓다의 가르침을 상대적으로 잘 보존하고 있다는 〈가르침의 바퀴를 처음 돌림〉조차도 붓다 본인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받아 적듯 기록한 것이 아니고, 적어도 100년은 지나 재구성된 텍스트다.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빠알리어(팔리어)를 배워도 붓다의 목소리에 직접 다가갈 수는 없다. 빠알리는 붓다의 활동 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가 아니므로. 〈성경〉과 〈불경〉과 〈논어〉는 모두 장기간에 걸친 문헌 표준화 노력을 통해 탄생했다.

〈신약성경〉 루카복음의 그리스어 필사본. 〈성경〉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어·셈족어·아람어 지식이 필요하다.
〈신약성경〉 루카복음의 그리스어 필사본. 〈성경〉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어·셈족어·아람어 지식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중국 문헌 중 하나인 〈서경〉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문장들이 섞여 있다. 서주 중기까지 소급될 수 있는 상당히 오래된 문장도 있지만, 기원후 수세기 정도까지 내려잡아야 하는 후대의 문장도 있다. 〈논어〉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달리하는 문장들이 혼재되어 있다. 현행 〈논어〉는 공자 사후 수백 년에 걸쳐 확립되었으므로, 그 긴 세월 동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그 일들을 정확히 복원할 방법은 없다. 〈논어〉의 말투와 호칭의 차이에 주목해서 〈논어〉의 구조와 형성 단계를 추적한 기무라 에이이치조차도 자신의 작업을 “상상”이자 “가정”이라고 간주했을 정도다.

공자의 말이 〈논어〉에만 실려 있는 것은 아니다. 논어 이외에도 공자의 말을 전하는 텍스트는 매우 많다. 〈한서 예문지〉의 논어 부분은 공자 어록 관련 텍스트의 긴 리스트를 전한다. 그 밖에 〈좌전〉이나 사마천의 〈사기〉 같은 역사서, 〈공자가어〉처럼 공자를 존숭하는 사상서에도, 〈장자〉처럼 공자를 비판하는 철학서에도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그러한 텍스트 상당수는 진실성이 의심받아왔지만, 〈논어〉를 포함한 고대 텍스트 전체가 진실성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논어〉든, 〈좌전〉이든, 〈사기〉든, 〈공자가어〉든, 〈장자〉든, 모두 어지럽게 전승되어온 이야기들을 취사선택하여 만들어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말을 전하는 텍스트마다 스타일이 모두 다르다. 예컨대 〈좌전〉은 〈논어〉와 그 스타일 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논어〉처럼 격언을 모아놓은 모양새가 아니라,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에 가깝다. 짧고 분절되어 있기에 격언으로 소비하기 쉬운 〈논어〉와 서사가 있기에 설득력이 강화되는 〈좌전〉은, 그 형식은 달라도 각각의 방식대로 독자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 학자들은 〈좌전〉을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특정 목적을 위해 원자료를 상당히 가공한 결과물이라고 보는데, 〈논어〉 역시 그와 유사한 가공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논어〉는 불안정한 기초 위에 서 있는 텍스트이지만, 그럼에도 시종일관 견지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라는 사실이다. 〈논어〉가 수록하고 있는 대화들 뒤에 존재하는 공자라는 강렬한 인격은 그 대화들에 그렇지 않았으면 갖지 못했을 에너지와 통일성을 부여한다. 누구 말인지 모를 때보다는 분명한 인격체의 발화일 때 말의 힘이 더해지는 법이고, 아무나의 말일 때보다 유명한 이의 말일 때 사람들은 더 주목한다.

공자라는 명확한 인격체가 발언하고 있어도 그것이 정말 실존했던 인물 공자의 말인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고대 중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권위자의 이름을 빌려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경〉에는 전설적인 성왕들이 한 말들이 실려 있는데, 이는 실제로 그 성왕들이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어떤 말이 그 전설상의 인물의 말로 간주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논어〉에 공자의 말이라고 나와 있다고 한들, 그것이 공자의 말인지 아니면 공자라는 권위 있는 인격체에게 가탁한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누가 말했을까

지동설로 유명한 갈릴레이가 했다는 그 유명한 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를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은 종교재판을 받은 갈릴레이가 재판 결과에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내뱉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럴까? 역사학자 스틸만 브레이크에 따르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갈릴레이 종교재판으로부터 100년 이상 지나 출판된 주세페 바레티의 〈이탈리아 도서관〉(1757)에 처음 나온다(홍석봉, 〈첫 생각: 세상을 바꾼 생각들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신인문사, 2011). 즉 18세기 이탈리아 작가인 주세페 바레티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갈릴레이라는 유명인에게 가탁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주세페 바레티는 마치 자신이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해당 발언을 기록하고 있다. 갈릴레이는 재판 직후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다보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풍부하게 각색을 한들, 별도의 증거가 없는 한 그 이야기를 진실로 간주할 수는 없다. 〈논어〉에 실린 공자의 말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수록되었는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화가 크리스티아노 반티가 1857년에 그린 ‘로마 종교재판에 직면한 갈릴레오’. ⓒWikipedia
이탈리아 화가 크리스티아노 반티가 1857년에 그린 ‘로마 종교재판에 직면한 갈릴레오’. ⓒWikipedia

공자라는 단일 인격체가 〈논어〉 독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 〈논어〉 문장들이 아무리 산만하고 모순되어 보여도, 마치 거기에 상당한 통일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 독자들은 숨어 있는 일관성을 찾아내고 그에 비추어 각 문장들을 일목요연하게 해석하고 싶어 하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논어〉 주석 작업에 매달렸고, 그러한 주석 작업은 〈논어〉가 고전으로 자리 잡는 데 일조했다. 〈논어〉에 권위가 있기에 주석이 달렸지만, 동시에 주석이 달렸기에 〈논어〉에 권위가 더해지기도 한다. 공자가 권위가 있었기에 제자들이 모여들었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모여들기에 공자에게 권위가 더해진 것처럼. 주석이라는 것은 〈논어〉에 대해 알려주는 것만큼 주석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 산만하고 분절된 내용을 일관된 체계로 만드는 과정에서 주석가들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체계화하든, 결국 〈논어〉는 그 역사적 선후와 정확성을 논하기 어려운 말의 집합이다. 전승 과정에서 많은 첨삭·윤문·윤색·보정·편집·가감·창작이 이루어진 순결(?)하지 않은 텍스트다. 다큐멘터리도 그냥 사실이 아닐진대, 이런 편집의 결과물이 그냥 사실일 리는 없다. 춘추 후기에 공자라는 인물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했으며, 그에 감복한 청자들이 구두로 그 내용을 전하기도 하고 기록해놓기도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편집이 시작되었고, 그 편집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근거 없는 내용이 들어가기도 하고, 첨삭되기도 한 불순한(?) 텍스트다. 한나라 사상가 왕충이 “성현의 말씀인데도 위아래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고, 그 문장도 앞뒤가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불평한 것을 기억하자.

확실한 것이 있다면, 춘추전국 시기부터 한나라 때까지 확립된 텍스트이며, 그만큼 그 당시 언어 세계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논어〉에는 여러 판본이 있으며, 현행 〈논어〉가 정전으로 정착되기 전까지 그 판본들이 경쟁했다. 현행 〈논어〉가 다른 판본이나 혹은 다른 텍스트보다 더 진실한 공자의 모습을 담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현행 〈논어〉의 강점은 그것이 가진 본래의 진실함보다는, 그 이후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읽혀왔다는 사실에 있다.

현대에서도 〈논어〉는 어쩐지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고전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읽힐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담고 있기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읽혀왔고 또 읽혀갈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중요하다. 〈논어〉는 실로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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