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국립박물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논어〉가 전시돼 있다. ⓒXinhua
중국 베이징 국립박물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논어〉가 전시돼 있다. ⓒXinhua

논어를 다시 읽는다 ①

어쩐지 구닥다리인 것 같은 책, 그러나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고전 〈논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정작 〈논어〉라는 책을 펴보면, 격언류 문장과 짧은 대화가 독자를 반긴다. 격언이기에 유익하고, 짧기에 읽기 쉽다. 그러나 이런 느낌도 잠시, 〈논어〉의 문장들은 짧지만 산만하고, 유익하지만 철 지난 말씀으로 들린다. 지루해진 당신은 이제 책을 덮으며 중얼거린다. 케케묵은 할아버지 말씀이네.

이것이 〈논어〉를 읽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논어〉의 문장들이 산만한가. 그것은 〈논어〉에 담긴 정신이 산만해서가 아니라 〈논어〉의 문헌 전통이 산만해서 그렇다. 〈논어〉는 공자라는 인물이 책상에 앉아 정신 집중하여 써 내려간 한 권의 책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응집력 있고 일관된 책이 되었으련만. 공자는 〈논어〉라는 책을 쓴 적이 없다. 〈논어〉는 후대에 얼기설기 편집된 책이다. 그렇기에 실로 산만한 책이다.

공자는 〈논어〉라는 책을 쓰는 대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대화를 했다. 그의 대화 상대는 주로 당대 정치인이나 권력자, 그리고 제자들이었다. 〈논어〉 속 공자는 단 한 번도 그 시대의 민중들이나 여자들이나 다른 대륙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공자는 정말 그들과 말을 섞은 적이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논어〉에는 공자가 남자(南子)라는 여성을 만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여성은 음란한 걸로 유명했기에 제자의 빈축을 샀다. “선생님께서 南子를 만나자, 자로가 기꺼워하지 않았다(子見南子, 子路不說).” 이처럼 공자는 여자는 물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논어〉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을 결정한 이는 공자가 아니라 〈논어〉의 편집자다. 그리고 우리는 〈논어〉의 최초 편집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저자가 없어도 편집자가 있었기에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편집자가 정신 집중을 하지 못한 탓일까. 〈논어〉 전체를 꿰뚫는 일관된 체계를 발견하기 어렵다. 누군가 〈논어〉에서 그런 체계를 발견했다고 강변한다면, 그는 〈논어〉 문헌의 성립사에 대해 과문한 사람이 아닐까. 〈논어〉 연구자들은 대개 동의한다. 여러 문헌 전통이 별개로 전해지고 발전해오다가 수백 년이 지나고 가서야 현행 〈논어〉의 모습으로 정착했다고. 그래서 〈논어〉에는 겹치는 내용이 있고, 단락 간 흐름이 끊기기도 하고, 챕터 간 관계가 모호하다.

그러니 독자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체계를 발견하려고 〈논어〉를 읽을 필요는 없다. 〈논어〉는 읽다가 지치면 아무 때나 덮어도 되는 책이다. 그만큼 분절된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이 분절되어 있기에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고,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기에 자기 생각을 투사하기 쉽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자기식대로 〈논어〉를 읽는다. 그럼 어떠랴. 어떤 책이든 자기 읽기 나름인 것을. 사람들은 자기식대로 세상을 읽고, 인생을 읽고, 결국 자신을 읽다가 죽는다. 자기가 처한 구석에서 자기 생각을 일삼다가 죽는 것이 인간의 굴레 아니던가.

쉬운 이해가 위험한 까닭

〈논어〉처럼 분절된 책은 그런 경향을 더 부추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펼쳐보라. 그와 같은 책을 자기 멋대로 읽기는 쉽지 않다. 〈순수이성비판〉은 어려운 만연체의 문장들이 하염없이 이어지다가 결국 하나의 주장으로 귀결되는, 어렵고도 두꺼운 책이다. 반면 〈논어〉는 각 장들이 짧고 그 장들을 이루는 단락들은 더 짧고, 그 단락을 이루는 문장들은 더더욱 짧다. 짧을 뿐 아니라 상식적인 격언처럼 보인다. 그러니 〈논어〉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것은 〈순수이성비판〉 전문가 행세하는 것보다 쉽다.

공자의 초상화.
공자의 초상화.

그러나 쉬운 이해는 위험하다. 쉽게 이해되는 생각은 새로운 생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생각이기 쉽다. 자기의 선입견을 〈논어〉 같은 고전에서 발견하면 기쁘다. 오, 내 생각도 꽤 뿌리가 있는 생각이었구나! 공자같이 대단한 사람도 나처럼 생각했구나! 그러나 자기 평소 생각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굳이 고전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고전을 펼쳐드는 이유는 얼어붙은 자기 생각에 균열을 내기 위해, 보다 넓고 깊은 생각의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자기 평소 생각에 비추어 고전을 읽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식대로 대상을 소화할 자유가 있다. 그뿐 아니라 누구도 자기 세계를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주관적 독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관적 독해를 객관적 독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자기 남자 혹은 여자 친구를 주관적으로 좋아하는 걸 누가 뭐라고 하랴. 그러나 자기 남자 혹은 여자 친구가 한국 최고의 미남미녀라고 공언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견을 표시할 것이다. 주관적 독해에는 자기 맘대로 대상을 해석하는 쾌감이 있다. 그 쾌감에 탐닉하고 싶다면 굳이 객관적인 독서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마치 자기 취향에 맞는 사람과 연애를 하듯 독서를 하면 된다.

그래서 〈논어〉를 중년에 이른 사람이 심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가이드로 읽든, 청소년이 사춘기를 잘 통과하기 위한 지침으로 읽든, 정치인이 자기 박식을 과시하기 위해 읽든, 재야 고수가 자기 비전을 갈고닦기 위해 읽든, 동양인이 서양인에게 자랑하기 위해 읽든, 할아버지가 손주의 품행을 바로잡기 위해 읽히든,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기 관심사를 가르치기 위해 읽히든, 다 괜찮다. 그것이 주관적인 독해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

〈논어〉의 메시지에 다가가려면

그러나 자신의 주관적 독해를 가지고 남을 설득하고자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기 애인을 잘생겼다고 느끼는 것은 자유지만, 그가 객관적인 미남미녀라고 남을 설득하는 것은 제멋대로 할 수 없다.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고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자신의 독해는 개인의 취향으로 남을 뿐, 주관을 넘어선 객관적 독해가 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인 이상, 아무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독해를 지향할 수는 있다. 객관적인 독해를 지향할 때 비로소 서로의 독해를 견주어보고 그 설득력을 따져볼 수 있다.

경남 양산시 남강서원에서 조선시대 유생 복장으로 〈논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 ⓒ연합뉴스
경남 양산시 남강서원에서 조선시대 유생 복장으로 〈논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 ⓒ연합뉴스

자기 주관을 넘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사적으로 읽는 것이다. 〈논어〉는 오래전 특정 시공간에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를 음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성을 무시하고 〈논어〉에서 서둘러 현대적 교훈을 찾다가는 〈논어〉를 자칫 왜곡하게 된다. 그것은 〈논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논어〉를 통해 현대인을 읽는 것이다. 역사성을 무시하고 〈논어〉를 통해 서둘러 서구중심주의를 타파하려 들다가는 〈논어〉를 자칫 왜곡하게 된다. 그것은 〈논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논어〉를 통해 동양인의 자존심을 읽는 것이다. 역사성을 무시하고 〈논어〉를 통해 서둘러 삶의 구원을 찾으려 들다가는 〈논어〉를 자칫 왜곡하게 된다. 그것은 논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논어〉를 통해 자기 상처를 읽는 것이다. 그러한 독해도 〈논어〉를 읽는 방식이기는 하겠지만, 〈논어〉를 객관적으로 읽는 방식은 아니다.

〈논어〉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논어〉에 관심을 기울여보는 것은 어떤가. 〈논어〉라는 오래된 고전이 과연 무슨 메시지를 건네주는지 경청해보자. 그 메시지를 들으려면 〈논어〉가 만들어진 저 고대 중국의 세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논어〉는 일단 그 시대 그 세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니까. 그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 세계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양상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논어〉의 문장을 이루고 있는 언어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상당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 자기 입맛대로 〈논어〉를 읽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지식에 기반한 번역과 해설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논어〉가 현대의 독자에게 건넬 메시지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메시지를 찾기 위해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같은 생물학적 종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각기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논어〉가 제시하는 세계는 수천 년 전 삶의 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오늘날의 독자는 아무런 매개 없이 〈논어〉의 메시지에 다가갈 수 없다. 동시에, 수천 년 전의 독자나 오늘날의 독자나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메시지는 여전히 호소력이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면서 〈논어〉의 세계에 접속해보자(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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