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다시 읽는다〉 ④공자는 전통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받아 전하되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 그러나 기존에 공자 사상의 특징으로 거론된 바 있는 점들-귀신보다는 인간 중시, 외관보다는 내면 중시, 혈통보다는 덕성 경향 등등-은 공자의 생전보다 두 세기 전부터 시작하여 공자 사후 반세기 정도 시기까지 지속되었던 현상이다. 요컨대 공자는 과거 전통에 집착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의 당대를 살아간 사람이었다.공자가 당대를 살았다는 말은, 과거에 얽매어 있지 않았다는 뜻인 동시에, 동시대인과 많은 것을 공유했다는 뜻이
〈논어〉를 다시 읽는다 ③많은 사람들이 〈논어〉를 읽음으로써 공자라는 위대한 인물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 그는 누구일까. 싯다르타나 예수의 경우가 그러하듯, 실제 공자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관련 자료는 불충분하고, 그나마도 후대의 윤색과 왜곡을 거친 것이다. 예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신약성경은 물론 바울이 남긴 기록, 복음서, 외경, 그리고 유대교에서 전승된 각종 기록들을 고려해야 하듯이, 공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도 다양한 전승 자료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료 대부분이 기억의 재구성
〈논어〉를 다시 읽는다 ②남녀 간 대화를 담고 있는 희곡을 상상해보자. 그 희곡을 공연한 연극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관객은 연극에 몰입한 나머지 주인공 남녀가 자기 뜻대로 상대에게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주인공 남녀는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극작가의 언어다. 그들의 언어는 현실의 언어가 아니라 해당 희곡의 어법에 맞게 다듬어진 언어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하지 않는다. 어떤 노인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외친단 말인가
논어를 다시 읽는다 ①어쩐지 구닥다리인 것 같은 책, 그러나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고전 〈논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정작 〈논어〉라는 책을 펴보면, 격언류 문장과 짧은 대화가 독자를 반긴다. 격언이기에 유익하고, 짧기에 읽기 쉽다. 그러나 이런 느낌도 잠시, 〈논어〉의 문장들은 짧지만 산만하고, 유익하지만 철 지난 말씀으로 들린다. 지루해진 당신은 이제 책을 덮으며 중얼거린다. 케케묵은 할아버지 말씀이네.이것이 〈논어〉를 읽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논어〉의 문장들이 산만한가. 그것은 〈논어〉에 담긴 정신이 산만해서가 아니
한국 사회는 정상성 집착이 강하다. 그 점은 차별금지법 논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정치인들 다수는 사회적 합의를 기다려야 한다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곤 한다. 사회적 합의를 기다린다니, 이 얼마나 나른한 말인가. 그것은 이 사회 다수가 집착하고 있는 정상성을 흔들고 싶지 않다는 말로 들린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합의”의 순간을 마냥 기다릴 만큼 그게 그렇게 한가한 문제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김승욱 옮김, 문예출판사, 2018)라는 소설을
오늘의 한국 사회를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앞서 고민했던 한국의 명문을 다시 읽어본다. 이번 대상은 최인훈의 ‘세계인’이다. 시위란 원래 일상을 정지하는 행위, 사람들은 참다 참다 못해 일상을 멈추고 거리로 나아가 외치기 시작한다. 일상을 멈추게 만들었던 불의를 조속히 타파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외치기 시작한다. 물러나라! 타파하라! 철폐하라! 목전의 불의를 끝장내는 데 성공했을 때, 지친 심신을 이끌고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의가 다른 방식으로 지
우리는 세습이 싫어서 투표하러 간다. 아무리 총기를 잃었기로서니 세습하는 군주정을 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능한 사람으로부터도 무능한 자식이 태어나는 법. 세습 같은 우연에 맡기기에 정치는 너무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평생 왕 노릇 할 것을 알게 되면 권력에 중독되는 법. 종신 권력자는 아첨꾼에 둘러싸여 매사에 판단을 그르치고 결국 나라 꼴이 엉망이 될 것이다. 게다가 현대 한국인은 특히 세습 왕정을 싫어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왕정이 실시된 나라치고는 조선 왕족에 대한 향수가 극히 희박하다. 나라가 망해도 식민 세력의 귀족으로 살
지난해 겨울 한국의 위기는 싱크홀(땅꺼짐)처럼 왔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한국의 정치적 지반이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땅이 꺼졌고, 갑자기 뚫린 검은 구멍 속으로 사람들이 빨려 들어갔고, 그렇게 빨려 들어간 구멍 속에서 흉한 것들을 목격했고, 수개월에 걸친 분투를 통해 사람들은 간신히 지상으로 기어 올라오는 중이다. 아직도 여진이 계속되는 이 난리법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그것은 헌정의 위기였을까. 현직 대통령이 위헌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헌정의 위기였지만, 법적 절차에 따라
마음의 평화를 만끽하려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 저녁 한가운데로 영어로 된 이메일 한 통이 난입해왔다. “당신은 2025년 ○월○일 ○○번째 세계 ○○ 학술대회의 ○○ 패널 토론자로 정해졌습니다. 패널명은 ○○입니다. 학술대회에서 사용할 언어는 영어입니다.” 이 난데없는 이메일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났다. “이 토론자 역할을 맡고 싶지 않고 이 패널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면, 이 메시지를 받는 즉시 우리에게 연락하세요.”이 패널의 토론자 역할을 맡고 싶지 않으냐고? 당연하지! 맡고 싶지 않다. 패널의 내용이 무엇인지, 패널에서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이념이랄 게 있을까. 민주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 그것은 현대의 이념이다. 현대 이전 한국에서 그런 이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화사상이나 충효? 그것은 지나간 이념이다. 현대에 이르러 그것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아니, 한국 역사 전체를 관통하여 두루 합의해온 이념 같은 것은 도대체 없단 말인가?그런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어떤가. 이른바 ‘홍익인간’은 〈삼국유사〉에 나올 만큼 오래된 말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하늘 신 환인의 서자 환웅이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