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곳곳에 그림과 작품이 배치되어 있다. 그렇다고 예술을 말하며 고상한 척은 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장애인의 입장이 되어보자며 얄팍하게 폼잡는 이야기는 없다. 책 속의 예술과 장애는 도구다.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가는 탈선의 길이 보인다.
시라토리 겐지는 선천적 전맹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 색깔도 구분할 수 없지만 매년 수십 번씩 미술관에 다닌다. 대학 시절, 비장애인이자 관심 있는 여성 동기가 미술관에 데려가 작품을 말로 설명해줬다. 이후 시라토리는 여러 미술관에 전화를 걸었다. 작품을 말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거듭된 거절 끝에 한 미술관 문이 열렸다. 시라토리를 안내하던 미술관 직원이 고흐의 작품 앞에서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죄송해요. 방금 호수라고 말씀드렸는데 들판이었네요. 지금까지 저는 이 들판을 호수라고 믿고 있었어요.” 관람을 마치고 직원은 시라토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눈이 보인다고 제대로 보는 건 아니다. 어떤 것이든 볼 수 있지만 그만큼 시야가 좁아진다. 시라토리와 전시를 본 동행자들은,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세세한 부분에도 눈길을 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품 위를 자유롭게 헤매게 된다고 한다. 눈의 해상도가 올라가고 수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고 한다. 동행자들에게 작품을 제대로 보게 해준 건 눈이 아니라 옆에서 듣고, 상상하며 말을 거는 시라토리였다.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가 시라토리와 2년간 미술관을 순례한 기록을 책으로 엮었다. 책에 실린 작품을 보며 ‘나라면 어떻게 설명해줬을까?’ 생각해보는 게 포인트다. 장애와 관계에 관심이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전시를 본 후 “좋았지” “그러게” 하는 대화만 나눴던, 또는 자유로운 미술 감상법이 궁금한 독자들에게도 권한다.
-
썰렁하고 집요한 사슴문답식 말장난 [기자의 추천 책]
썰렁하고 집요한 사슴문답식 말장난 [기자의 추천 책]
김다은 기자
더이상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는 기자들을 종종 만난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사건사고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라거나, 팩트들을 정교하게 꿰매는 데 방해가 된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소설...
-
이토록 귀여운 영국 ‘아재’들 [기자의 추천 책]
이토록 귀여운 영국 ‘아재’들 [기자의 추천 책]
김동인 기자
영국 금융 교육 기사를 준비하는 동안 영국 사회를 다룬 현지 저자들의 번역서를 찾아 헤맸다. 데이비드 굿하트의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이나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 등도 흥미...
-
사이코패스 뇌를 가진 신경과학자의 이야기 [기자의 추천 책]
사이코패스 뇌를 가진 신경과학자의 이야기 [기자의 추천 책]
나경희 기자
2005년 어느 가을날, ‘젊은 사이코패스의 뇌를 이해하기 위한 신경해부학적 배경’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다듬던 한 신경과학자의 손이 멈칫한다. 정상 대조군으로 찍은 가족들의 뇌 스...
-
정치가 실패하면 사랑이 무너진다 [기자의 추천 책]
정치가 실패하면 사랑이 무너진다 [기자의 추천 책]
김은지 기자
책 속에 등장하는 ‘윤이’라는 아이를 본 적이 있다. 빨간 날 국회 마와리(취재처를 돌아다닌다는 뜻의 언론계 은어)를 돌다가 저자가 근무하는 의원실도 들렀다. 빼닮아 한눈에 알아봤...
-
공공병원에는 ○○이 있다 [기자의 추천 책]
공공병원에는 ○○이 있다 [기자의 추천 책]
김연희 기자
이제는 익숙하지만 공공의료 분야 취재를 막 시작할 무렵 여러 차례 다시 확인했던 숫자가 있다. 5%. 한국에서 전체 의료기관 가운데 공공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민간병원이 대부분...
-
둥글둥글한데 뾰족한 공간, ‘맘카페’를 관찰하다 [기자의 추천 책]
둥글둥글한데 뾰족한 공간, ‘맘카페’를 관찰하다 [기자의 추천 책]
변진경 기자
동네 맘카페에서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24시간 편의점에서 상비약을 판매하지 않던 시절) 밤중에 아기 해열제가 똑 떨어졌을 때 맘카페에 SOS 글을 올리면 줄줄이 도와주겠다는 ...
-
인류의 발자취 쫓으며 질문을 던지다 [기자의 추천 책]
인류의 발자취 쫓으며 질문을 던지다 [기자의 추천 책]
이상원 기자
3년 전 이사를 준비하다가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오래 고민했다. 좋은 책이지만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중학생 때부터 닳도록 읽어 질린 게 한 이유였고 시의성을 타는 몇 대...
-
마트에 갈 때마다 두려운 당신에게 [기자의 추천 책]
마트에 갈 때마다 두려운 당신에게 [기자의 추천 책]
이오성 기자
기후위기에 관한 기사를 쓸 때마다 벽을 느낀다. 사람들은 둔감하다. 한파가 몰아쳐도 폭염이 기승을 부려도 그때뿐이다. 올겨울 체감온도 영하 50℃를 기록한 미국의 한파, 몇 해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