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는 기자들을 종종 만난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사건사고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라거나, 팩트들을 정교하게 꿰매는 데 방해가 된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소설의 효용성을 자문하던 중 권여선의 단편집 〈각각의 계절〉을 펼쳤다. 그중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다가 탄복했다. 이 미로 같은 글은 삶에 드리운 고약한 비극을 거듭 말장난으로 만든다. 말장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썰렁하지만 집요하다. 어떤 진실을 움켜쥔다. 하지만 원본은 반드시 훼손(변주)한다. 나는 권여선의 말장난에 매혹돼 허우적거리다 역시 소설은 무궁히 존재해야 한다고 끄덕이고 만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다. 네 친구가 강촌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약을 친 숙소에 사슴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버둥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방충망도 있는데 도대체 그렇게 커다란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묻자, 집주인이 말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후 일행들은 온갖 질문에 ‘든’을 붙여 답하는 말장난을 시작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끊고 살아? 우리는 어떻게든 관계를 끊고 살아… 우리는… 어떻게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해하자면 이해는 돼….

소설은 네 친구 중 한 명인 정원의 20주기 추모식에 홀로 참가한 나(준희)의 시점에서 시작되는데 그는 귀가하던 중 술집을 쑤시고 들어가 또 다른 친구 부영에게 문자를 보낸다. 술에 취해 넷의 어긋난 시간을, 과거의 기억과 결락 속을 헤매다 까무룩 잠이 든 나는 다음 날 부영이 보낸 ‘잘 살아 제발’이라는 문자를 황망히 읽는다. 그 문장은 ‘제발 잘 좀 살아달라고. 더 천하지는 말고’라는 문장으로 다시 쓰인다. 기억에 모욕당하는 이들에게 소설은 으레 썰렁하고 집요한 말장난을 건다. 그러니 재미있는 것이다. 좋은 글은 어떻게 비루한 것을 포기하지 않아? 좋은 글은 어떻게든 비루한 것을 포기하지 않아.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