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김형수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지회장, 이은주 정의당 의원, 배춘환 전 손잡고 대표. ⓒ시사IN 이명익

10년 전 일이다. 2013년 12월, 배춘환씨는 쌍용자동차 노조에 47억원 배상책임을 묻는 1심 판결을 접하고 〈시사IN〉에 편지와 함께 4만7000원을 보냈다. “47억원… 뭐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들겨봤더니 4만7000원씩 10만명이면 되더라고요. 다른 9만9999명이 계시길 희망할 뿐입니다.”

손해배상 때문에 가정이 해체되고 삶이 파괴된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잊을 만하면 들려오던 때였다. 〈시사IN〉은 이 편지를 2014년 신년호에 실었다. 편지를 본 독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배씨를 따라 4만7000원을 넣어 편지를 보내오는 독자들이 잇따랐다. 배씨의 편지를 계기로 ‘노란봉투-4만7000원의 기적’ 캠페인이 전개됐고 시민 4만7547명이 참여해 14억8674만원이 모였다.

노란봉투 캠페인으로 출발한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의 공은 이후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제19대와 20대 국회에서 이른바 ‘노란봉투법’이라고 불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합법적’ 노조 활동 범위를 확대해 손해배상 면책 범위를 넓히고, 노조가 아니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 골자였다. 시민들의 열기와 달리 정치권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법안은 연달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노란봉투법이 다시 떠오른 건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파업이 끝난 이후다. 김형수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지회장도 파업 현장에 있었다. 노조는 임금 30% 인상과 하청노조 인정을 요구했지만, 결국 임금 4.5% 인상에 합의하고 51일간의 파업을 끝냈다. 파업이 끝난 뒤 남은 건 사용자 측이 청구한 손해배상 470억원이었다. 야당 의원들은 노란봉투법을 다시 발의하기 시작했다.

2022년 7월 대우조선해양 파업 당시 유최안 부지회장은 파업 현장 내 가로·세로·높이 각 1m '쇠감옥'에 스스로를 가뒀다. ⓒ금속노조 제공
2022년 7월 대우조선해양 파업 당시 유최안 부지회장은 파업 현장 내 가로·세로·높이 각 1m '쇠감옥'에 스스로를 가뒀다. ⓒ금속노조 제공

5월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가 노란봉투법을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본회의에 직회부하기로 결정했다. 환노위는 노란봉투법 관련 11개 법안과 1개의 국회 청원을 통합해 환노위 대안을 발의했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이 담겼다. 사용자 범위를 확대해(제2조 2항) 사안에 따라 하청노동자도 원청과 교섭할 수 있게 했다. ‘합법적’ 노조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제2조 5항), 귀책사유나 기여도에 따라 각각의 노동자에게 책임을 묻는다(제3조 2항).

배춘환씨가 편지를 보내고 고스란히 10년이 흐른 지금, 노란봉투법이 또다시 좌초될 상황에 놓였다. 노란봉투법은 ‘부의 요구 30일 이내 본회의 부의 여부를 투표해야 한다’는 국회법에 따라 6월 임시국회에서 부의되고, 뒤이어 상정 절차를 거쳐 표결할 예정이다.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 본회의 직회부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제기한 상태다. 환노위에서 직회부 요구안을 처리한 것을 두고 법사위원의 법률안 심사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한다. 노란봉투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요청하겠다는 입장이다. 앞서 양곡관리법·간호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후 모두 폐기됐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 시민들의 참여에서 출발했다. 김형수 지회장은 노란봉투법의 영향을 가장 가까이에서 받는 조선 하청노동자 당사자다. 배춘환씨의 편지는 입법을 위한 불씨가 됐다. 배씨는 이후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손잡고’에서 대표(현 운영위원)로 활동했다. 서울교통공사 노조 출신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노란봉투법을 대표발의한 의원 중 하나다.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자리에서 노력해온 김형수 지회장, 배춘환 전 손잡고 대표, 이은주 의원이 노란봉투법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5월28일 〈시사IN〉 편집국에 모였다.

2013년 배춘환씨의 편지 이후 노란봉투법이 발의돼 상임위를 통과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배춘환(배):뉴스에서 늘 ‘불법파업’이라고 하니까 그땐 파업이 합법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도 해고해놓고 갚을 수도 없는 47억원을 내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어 편지를 보냈다. 나중에 다른 분들이 보낸 편지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드디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 너무 좋다’는 내용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기대하니까 노란봉투법도 금방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밀물처럼 들어왔던 정치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우조선 파업이 끝나고 손배 액수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동그라미 하나만 딱 붙였지?’ 싶었다. 노란봉투법 입법이 미뤄지는 동안 쌍용자동차 47억원이 대우조선해양 470억원이 되어 있었다.

김형수(김):손배 때문에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 투쟁을 정리해야만 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다. 합의 전날 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찾아와서 (점거 농성한) 7명 모두에게 손배‧가압류를 집행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억울하게 차별받고 일해왔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정부 합의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번 투쟁을 통해서 세상에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에 대해 알렸고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노조 임원 5명(김형수 지회장, 유최안·안준호·강인석 부지회장, 이김춘택 사무장)으로 손배를 한정하고 투쟁을 정리했다.

이은주(이):기업이 파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노동자 개인을 넘어서 그 가족의 삶까지도 말살된다. 파업 이후 국가(경찰)가 낸 쌍용자동차 손배 청구로 해고자와 가족 31명이 세상을 등졌는데도 매일매일 지연이자가 65만원씩 붙었다(지난해 11월30일 대법원은 노동자들의 손배 책임을 인정한 1·2심을 파기했다). 몇몇 당사자들은 지금까지도 당시 트라우마에 시달려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배춘환 전 손잡고 대표는 노란봉투법은 '우리가 틔워야 할 새싹'이라고 했다. ⓒ시사IN 이명익

그동안 왜 노란봉투법 입법이 미뤄졌다고 보나.

김:2016년 촛불집회 때 문재인 지지자들은 박근혜가 퇴진하고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세월호 문제가 해결되고 비정규직이 사라질 것처럼 얘기했다. 문재인 정부 때 더불어민주당은 쌍용자동차 국가 손해배상 소 취하도 못했다. 그러니까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 같은 사람이 ‘진짜 노조를 위한 법이면 문재인 정부 때 하지 그랬냐. 왜 윤석열 정부를 흔드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노란봉투법 입법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서 (서로 미루는) 핑퐁 게임이 되어버렸다.

이:사회적 필요에 의한 입법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법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결국 정치가 무관심했고 정당과 국회가 제대로 된 입법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정부와 여당은 ‘파업 만능주의’ ‘불법파업 조장법’이라고 비판한다.

이:환노위에서 몇몇 의원들은 한국노총 출신인데도 노조가 마치 좋아서, 즐기면서 파업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무노동 무임금이다. 먹고살아야 하는데 파업을 즐겨 하는 노동자가 누가 있나. 게다가 노조가 파업하기 위해서는 조정 전치주의에 따라 노사 조정 절차를 다 밟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하청노동자들이 파업 한번 하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밥 먹듯이 파업할 거다’라고 말한다.

김:‘파업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정부·여당과 사용자 측에, 거꾸로 왜 노조법이 개정되면 노조가 파업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다. 사용자가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파업이 줄어든다. ‘파업 조장’은 결국 우리 얘기는 듣기 싫고, 노동자들을 타협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걸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정작 그 얘기는 하지 않은 채 노동조합과 파업에 대한 불신을 이용해 노조법 개정을 반대한다.

배:시민들에게 ‘파업 만능주의’라는 주장이 먹히는 이유가, 노조가 파업하면 일단 내 삶이 불편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인 것 같다. 5월14일 손잡고에서 기획한 ‘퀴즈쇼 노란봉투를 열어라’가 열렸다. 시민 90명이 참석해 ‘도전 골든벨’처럼 노동을 주제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중 하나가 ‘노동 3권은 어디에 명시된 법일까요?’였다. 충격적이게도 이 문제에서 대거 탈락했다. 아주 기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당락을 가르는 문제가 돼버렸다. 노동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해도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거다.

이:현행 노조법에서는 회사가 임금을 체불해도, 어렵게 체결한 단체협약을 이행하지 않아도, 노조에 일언반구도 없이 정리해고를 강행해도 노조 활동을 할 수 없다. 노조법을 개정해 이런 노동자들의 권리 분쟁이 합법적인 노동쟁의 행위의 대상이 되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파업까지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면 실제 파업은 훨씬 줄어든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노란봉투법이 '산업평화촉진법'이라고 했다. ⓒ시사IN 이명익

이은주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달리 본회의에 부의된 노란봉투법에는 손해배상 청구 제한, 손해배상액 제한·감면 등의 내용이 빠졌다.

김:손배를 청구할 때 개인이 회사에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 명확히 입증해야 할 책임이 생겼기 때문에 어려워지긴 하겠지만, 파업에 손배 자체는 계속 때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 대한민국 노동자들한테는 손배 액수도 문제지만 손배 청구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압박이다.

이:지금 노란봉투법에는 이미 발의돼 있는 11개 법안과 1개 입법 청원의 단 몇 %도 담기지 않았다. 국민의힘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고 공격했던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조항’이 법안 논의 과정에서 모두 빠졌다. 당사자인 지회장님도, 저도 만족하기 어렵다. 환노위에서 한 국민의힘 의원이 마음에 안 드는 법을 왜 찬성하느냐, 같이 거부하자고 비아냥거리더라. 꾹 참고, 부족하지만 이번에는 이 법을 통과시키고 끝나자마자 같이 부족한 거 담아서 다시 노란봉투법 개정안 발의하자고 이야기했다. 지금 법안은 우리 요구안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현재처럼 부르는 게 값인, 갚지도 못할 천문학적 액수를 손배 청구하는 데 제동을 걸 수 있다.

사용자 개념 확대(제2조 2항)를 두고 노란봉투법을 ‘7대 입법 과제’로 채택한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이:하청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원청업체가 내려주는 기성금(공사가 진척된 만큼 주는 돈)에 달려 있다. 제2조 2항이 통과돼야 하청노동자가 실질적으로 내 임금을 결정하는 원청업체와 교섭할 수 있다. 이 조항이 또 중요한 건 대체근로 때문이다. 노동자의 기본 권리인 파업은 일손을 놓아서 손실을 만들어 사용자한테 타격을 입히는 일이다. 사용자는 파업에 직장폐쇄로 대응할 수는 있지만, 대체근로를 투입하는 건 ‘반칙’이다. 우리 법은 대체근로 투입을 금지한다. 그런데 원청업체는 하청노동자가 근로계약을 맺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부담 없이 대체근로를 투입한다.

김:지난해 여름에 파업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대체근로가 들어왔다. 우리가 파업하니 하청업체에서 하도급받은 걸 원청업체에 다시 돌려줬다며 정규직 직원이 와서 일하는 식이다.

이:하청노동자 입장에서는 사용자에게 타격이 안 되니까 전면 점거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전면 점거는 불법 맞다. 그런데 전면 점거로 모는 게 바로 현행법이다.

김형수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은 노란봉투법이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를 드러내는 진실 확인법'이라고 했다. ⓒ시사IN 이명익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이 통과되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이:거부권 이전에 부의된 노란봉투법을 본회의에 상정하려면 무기명 투표에서 (출석 의원) 과반이 찬성해야 한다. 사용자들의 압박 때문에 과반이 수월하지 않아 보인다.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이 ‘민주노총 보호법’이라고 하지만, 한국노총도, 민주노총도, 일하는 사람 중 70%도(4월16일 직장갑질 119 발표) 찬성하는 법안이다. 시민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정치의 실패다. 국민의힘도 더불어민주당도 노란봉투법과 관련해 남은 기간 제대로 토론하고 논의해야 한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

배:이번에 대통령 거부권을 처음 알았다. 왜 몰랐을까 하고 찾아봤더니 그동안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도 있지만(1987년 이후 16건), 거부권 대상은 주로 정치적 사안에 관련된 법안이었지 민생법안은 아니었다. 이번에 농민들(양곡관리법) 다 잘라내고, 간호사들(간호법) 날린 다음에 노동자들까지(노란봉투법) 쳐내면 도대체 누구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기자명 이은기 기자 다른기사 보기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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