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역 광장 앞에 서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김흥구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은 국내정치이자 국제정치 이슈다. 두 요소(국내정치·국제정치)는 각각 별개로 작동하는 동시에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지점을 이해해야만 강제동원 판결로 불거진 다양한 갈등을 제대로 풀어나갈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윤석열 정부의 최근 해법을 보자.

2023년 1월 현재, 윤석열 정부가 강제동원 판결 이슈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는 단서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외교부는 1월12일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다. 정부 관계자, 피해자 측, 전문가 등이 참석한 의견 수렴 과정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가 해결 방안을 발표하기 전 밟는 사실상 마지막 절차가 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1월1일 일본 〈산케이신문〉은 ‘한국이 1월 중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보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기대감을 밝히기도 했다. 1월2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한·일 정상 간 상호 방문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징용 문제, 특히 일본 기업에 대한 현금화 문제만 해결되면 양국 정상 상호 방문을 통해 다방면에 걸친 한·일 관계 정상화에 물꼬를 틀 수 있을 것 같다.”

정부가 제시할 해법은 ‘병존적 채무 인수’라고 알려져 있다. 법률용어라 낯설지만, 개념은 간단하다. 돈을 내야 할 의무를 가진 제3자가 ‘추가’된 것이다(채무 인수). 그래서 채무자의 채무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병존적)으로 본다. 이는 ‘대위변제(채권자와 채무자가 합의하거나 법률상 이해 관계가 있는 제3자가 채무자를 ‘대체’해 돈을 갚는 것)’와는 구분된다. 정부가 한국에서 만든 재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제3자’로 지정해 일본 기업의 채무를 인수하는 방안(병존적 채무 인수)을 마련 중이다.

채권·채무와 같은 말이 과거사 사건에 본격 끼어들게 된 배경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해당 민사 판결을 확정 지었다. 2005년 일본제철(피고) 등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원고)이 시작한 소송이 마무리되었다. 손해배상과 미불 임금을 청구하는 내용이다. 노동조건을 속여 모집하고 그러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도 그만둘 수 없던 불법적 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다. 한국 법원은 최종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 순간부터 일본 기업은 빚을 갚아야 하는 채무자,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빚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가 되었다.

“과거사 청산 아니라 피해자 청산”

한국 사법부 결정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2019년 수출규제로 이어졌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었다는 게 일본의 주장이다. 하지만 한국 사법부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불법행위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으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고 판시했다. 일본의 무역보복에 대응해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냉랭한 한·일 관계가 한동안 이어졌다.

2018년 10월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이춘식씨(가운데)가 대법원 판결 직후 소감을 밝히고 있다.ⓒ시사IN 신선영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게 문재인 정부 탓이라며 자신이 당선되면 한·일 관계 개선에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선 직전인 지난해 2월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미·일 3자 간 안보 공조를 활성화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일 관계도 재검토해야 하며, 한·일 관계의 정상화가 내포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표방한 협력 정신을 되새기면서 일본과 협의해 과거사 문제, 무역갈등, 안보협력 문제를 망라한 포괄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일 관계가 개선되어야 할 이유를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설명했다. 그 출발을 ‘강제동원 배상 판결’로 삼겠다는 뜻을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여러 차례 밝혔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집행 과정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채권자(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안을 깊이 강구하고 있다(지난해 8월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

문제는 현재 윤석열 정부가 앞세운 해법에는 ‘일본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제3자)이 한국 기업의 돈을 받아서 피해자(채권자)에게 주는 안만 나와 있다. 일본 기업(채무자)의 사과와 참여가 담보되지 않은 방식이다. ‘한국 선(先)참여, 일본 후(後)동참’이라는 백브리핑이 나오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한 게 없다.

30%대로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 중인 기시다 내각이 이를 할 수 있을지 당장 의문이 나온다. 일본 우익의 반발을 잠재우며 뒤늦게라도 재단 참여와 사과 메시지를 낼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질문’이다. 모든 과정을 공개할 수 없는 외교 협상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방안에 대해서는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오랜 바람이 가해자의 사과이기 때문이다. 배상금은 그에 따른 조치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는 〈시사IN〉 기자와 만나 “외교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일관되게 요구했던 건 일본 측의 사실 인정과 사과다. 재단이 만들어진다면 피고 일본 기업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 피해자들의 요구가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이건 최소공약수다. 지금과 같은 방식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피해자 청산’이다”라고 말했다.

여론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말 실시한 〈시사IN〉-한국리서치 웹조사도 관련 해법에 대해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해야 한다(40.8%)’ ‘일본 기업이 책임을 인정하되 한·일 정부나 기업이 재단을 만들어 대신 갚는다(30.8%)’ 순으로 나타났다.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타협책의 전제도 ‘일본의 책임 인정’이다.

제3자(재단)를 내세우며 문제를 해결하자는 안은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2019년에 낸 바 있다. 그런 ‘문희상 안’도 일본 참여(한·일 기업 및 국민의 기금 조성)와 사과를 바탕으로 한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 쪽의 한 관계자는 “문희상 안과 지금 나오는 정부안은 전혀 다르다”라고 말했다.

‘진보’에서만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강제동원 이슈에 대한 한·일 협상의 핵심을 일본 기업의 참여와 피해자 동의로 꼽는 지난해 12월3일자 〈동아일보〉 칼럼을 보자. 이원덕 국민대 교수(일본학과)는 ‘징용 문제 해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정부는 일본 기업의 참여와 피해자의 동의를 구하는 일에 마지막까지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결여할 경우, 완전한 해결책은 물 건너가게 될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급할수록 더욱 신중하고 치밀한 접근이 요구된다.”

이원덕 교수는 〈시사IN〉과의 전화 통화에서 “우리 외교 스케줄을 보면 관계 개선의 모멘텀이 1월 아니면 2월밖에 없긴 하다. 일본이 4월에 지방선거가 있고, 5월에 G7 정상회의를 히로시마에서 개최한다. 기시다 정부도 불안한 상황이다. 만약 (일본) 정권이 바뀌게 되면 입장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정무적으로 지금이 타이밍인데, 피해자들이나 일본 해당 기업들이 한국 정부가 생각하는 대로 나와주는 게 아니니까 그게 변수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일본 기업 참여가 가장 아름다운 해결이고, 그게 안 되면 대법원 판결대로 현금화(일본 기업의 상표권·특허권 등을 강제매각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방식)하는 것도 두 번째 옵션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 우리 사법 정의는 정의대로 달성하고, 외교적 행동은 외교대로 가는 길도 열려 있다. ‘예방 외교’를 통해 일본의 반발을 조절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지만, (현금화를 하면) 피해자 반발은 우선 링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러면 정부가 이 문제를 더 유연하게 다루기 쉽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애초 검토하던 ‘대위변제’안이 윤석열 정부의 검토안에서 내려가고 ‘병존적 채무 인수’가 올라가게 된 까닭도 이와 맞닿아 있다. 대위변제와 달리, 채권자(피해자)의 동의가 없어도 병존적 채무 인수는 진행이 가능하다는 법리 해석이 있다. 일부 피해자가 ‘일본 기업의 참여 없음’에 반발하더라도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법조계의 해석이 갈린다(당사자 동의 없는 병존적 채무 인수가 무효라는 주장이 있다). 갈등의 소지가 남는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상황이 ‘성급한 게 아니냐’라는 지적이 나온다. 주일본 대사를 지낸 신각수 전 외교부 차관은 〈시사IN〉과의 전화 통화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가 국내정치와 직결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은 이게 국내 문제다. 물론 본질적으로 한·일 문제이지만, 우리 국내에 피해자·지원단체·야당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있다. 이들이 해결 방안에 관해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수준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디테일’이라고 할 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적극적 의지를 갖고 해결에 임하는 것은 높이 평가하지만, 과연 여론과 이해당사자들이 따라올 것이냐 하는 건 별개 문제다. 국민 100%가 찬성할 수는 없지만, 60~70% 지지는 얻어야 최종적 해결의 길을 열 수 있다. 그 과정이 중요하고, 정부가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다키쓰키 외교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대일 관계에 밝은 한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로 미국에서 뒤통수 맞고, 중국과는 각을 세우며 출발했고, 북한과의 관계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외교에서 당장 성과가 나올 만한 부분이 한·일 관계다. 이러한 상황이 이해는 되지만,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다. 서두르다 보면 악수(惡手)를 두게 된다. 저쪽에서 양보를 요구하고 초조해진 쪽에서 내어준다. 이 사건은 일본이 가해자이고 우리가 피해자인데, 마치 우리가 잘못한 것처럼 숙제를 푸는 모양새다. 지금 나오는 안은 주기만 하고 우리가 받는 게 없거나, 나중에 받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건 제대로 된 협상이 아니다. 후폭풍이 클 것이다.”

지난해 9월 한·일 정상 약식 회담에 앞서 인사하는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연합뉴스

지금과 같은 ‘불완전한 진행’은 결과적으로 한·일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시사IN〉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일 관계가 경제·안보 현안을 둘러싸고 긴밀한 소통이 필요해,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는 100% 공감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그렇게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을 조금 더 분명하게 관철해야 한다. 지금처럼 (우리 정부가) 강행하며 완전 백기 들고 협상에 들어간다면, 한국 외교는 오랫동안 이 문제로 일본과 불씨를 남기게 된다. 장기적으로 한·일 관계를 안정화하는 데 굉장히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의 합법적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거다’ 이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우익은 그렇게 해석해나갈 거다. 일본 정부도 자기들 입장과 주장을 더 강화시키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남 교수는 ‘다키쓰키 외교’라는 용어를 언급하기도 했다. “‘매달리는 외교’라는 뜻이다. 보통 일본 사람들이 자국 외교, 특히 대미 외교를 비판할 때 쓰는 용어다. 미국에게 매달린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지금 그 용어가 한국을 얘기할 때 나오기도 한다.” 실제 지난해 10월 일본의 일본국제문제연구소에 실린 글 제목이 ‘한국 윤석열 정부의 일본 ‘다키쓰키 외교’는 언제까지 계속될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공동선언)’을 계승하겠다고 강조해왔다. 1998년 10월 공동선언은 지금까지도 한·일 역사에 중요 진전으로 남아 있다. 공동선언의 일부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 관계를 돌이켜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 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핵심은 ‘일본의 과거 사죄와 한국의 미래 지향’이다. 두 내용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가 빠지면 공동선언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일 관계에서 이 두 가지가 같이 작동할 때 선순환했다. 한국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이슈 해결에서도 예외 없는 원칙이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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