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일본 전범기업 대신 한·일 기업에서 기부금을 받아 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안을 밀어붙이고 있고, 피해자들은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강 건너 불 보듯 했으나 논란이 계속되니 궁금하다. 도대체 왜 이리 오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지도 궁금하고, 정부가 왜 ‘병존적 채무인수’라는 복잡한 방식을 추진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래서 강제동원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정혜경의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을 읽기 시작했다. 200쪽 남짓한 적은 분량에 강제동원의 역사와 쟁점을 정리한 책이라 부담 없이 택했는데 처음부터 생각이 많아진다.
첫 장에서 저자는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군함도〉와 〈허스토리〉를 통해 강제동원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그릇된 시선을 이야기한다. 그는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일본 국민은 물론이고, 일제의 잘못을 부각하려 근로정신대의 피해를 왜곡한 〈허스토리〉 영화 제작자, 일제 하수인이 된 조선인의 존재를 외면한 한국 관객들까지 형해화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재일 사학자 강덕상이 말한 ‘사실의 무게를 아는 것’, 이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권력이 아닌 민중의 시선”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책은 이런 관점에서 80여 년 전 강제동원의 역사를 되짚는다.
시작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역사다. 이 역사는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일본의 근대화는 처음부터 ‘침략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둘째, 일본의 대미 공격은 일시적 오판이나 실수가 아닌, 오래전부터 국방 방침으로 준비된 ‘최후의 일전’이었다. 놀랍게도 일본은 1907년에 이미 미국을 러시아·중국과 함께 가상적국으로 꼽았고, 1923년에는 미국을 제1순위 적국으로 삼아 ‘세계 최종 전쟁’을 준비했다. 자신을 위협하지도 않는 최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꾀하다니 왜 그랬을까.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에게 굴복해 문호를 열었던 흑역사의 기억 때문이라기엔 이해하기 힘든 무모함인데, 일본사 연구자 함동주의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을 보니 러일전쟁 후 만주를 둘러싼 미일 갈등이 주된 요인인 듯 싶다.
아무튼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다른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지 않으면 자신이 식민지가 될 거라는 불안에 쫓겨 전쟁하는 근대국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류탸오후 사건 등 온갖 핑계로 주변국을 침략하는 역사를 썼다. 일본이 일찍부터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중국을 점령하고 중국을 병참기지화해서 미국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은,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선택을 꼼꼼히 추적한 역사학자 가토 요코의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윤현명 옮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선택 때문에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이 피로 물들었고, 일본 국민을 포함한 수백만 명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고통을 야기한 일본 정부는 전후의 냉전체제에 편승해 국내외적으로 마땅히 져야 할 정치적·도덕적·법적 책임을 회피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전쟁하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다.
최근 북한이 군사적 위협을 시연하는 가운데, 일본은 방위 예산을 국내총생산의 2%까지 늘리고 유사시 북한 등 한반도를 대상으로 ‘반격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안보 전략을 수정했다. 일본의 군비 지출액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로 뛰어오를 것이다. 더 심각한 건 한반도에 대한 군사력 행사다. 한국 정부는 “긴밀한 협의 및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했으나 일본 정부 관계자는 “한국 정부의 동의나 허가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밝혔다.
독일 모델도 기업의 사과가 전제
북한이 위협하니 일본의 전략 수정은 당연하다는 시각도 있지만, 두 차례나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의 전력을 생각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북한의 위협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도발한 역사가 있으며 그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해 식민지배하면서 인명을 살상하고 자원을 수탈하고 약 780만명을 강제동원한 잘못이 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당시 이를 인정했던 일본 정부는 현재 모든 걸 부정하고 있다.
혹자는 한국이 식민지가 된 건 자발적 협약에 따른 것이니 합법적이며, 설령 식민지배가 잘못이라 해도 이미 1965년 한일협정으로 보상이 끝났으므로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식민지배 덕에 한국이 도로망 등 기반시설을 갖춘 근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같은 논리로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절대 배상할 수 없다고 버틴다. 과연 이게 사실인가?
일본에서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 배상 소송의 변호인으로 활동한 우치다 마사토시는 〈강제징용자의 질문〉(한승동 옮김)에서 이들 주장을 낱낱이 반박한다. 그는 1910년 병합조약과 1965년 협정의 문제점을 논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없이 법적 타당성을 운운하는 것은 노예제에 대해 당시엔 합법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한다. 또한 ‘병존적 채무인수’ 방안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사례를 언급하며, 이 또한 독일 기업의 사과가 전제였음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반일 종족주의〉의 주요 논점을 비판하면서,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는 주장을 편 주익종에 대해 “(매국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피해자가 당한 고통을 상상해볼 때 ‘백성을 팔아먹는’ 무리란 말이 떠오른다”라고 토로한다. 이 문장 앞에서 나만 참담함을 느낀 건 아니리라.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은 역사는 자랑이지 수치가 아니다. 다른 나라, 다른 문명, 다른 사람들을 노예화·식민화했던 자본의 시대는 성·인종 차별, 테러리즘, 기후위기라는 후과를 남겼다. 이제는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야 한다. 강제동원 피해 ‘배상’은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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