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 ‘렌가테이’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오른쪽)가 건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랜드바겐(grand bargain)’조차 없었다. 일본이 빠진 강제동원 해법을 내놓은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의 호응 조치를 기대하며 1박2일 일정으로 방일했다(〈시사IN〉 제809호 ‘자유·인권·법치 한꺼번에 날린 강제동원 해법’ 기사 참조). 3월16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오므라이스를 먹고 ‘소맥’ 폭탄주를 나누는 모습을 연출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말 그대로 크게 주고받는다는 그랜드바겐에서, 한국이 일본에 준 건 명확한데 받은 게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신 일본 언론에서는 각종 기사가 쏟아졌다. “기시다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위안부와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 입장을 전달했다” “기시다 총리가 위안부 합의 이행과 후쿠시마 수산물에 대한 수입 규제 철폐를 요구했다”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일본산 멍게 수입 재개 요청을 하는 대화에 대해 대통령실이 영상 촬영을 제지했다”.

윤석열 정부는 부인하고 있다. 일본 언론의 왜곡 보도라는 것이다. 독도와 위안부 이슈에 대해 “위안부 문제든 독도 문제든 논의된 바 없다(3월17일 대통령실)” “의제로 논의된 바 없다. (기시다 총리가 말을 꺼냈냐는 질문에는) 회담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3월18일 박진 외교부 장관)”라고 대응했다. 일본산 멍게 수입 재개 요청에 “멍게란 단어는 나온 적이 없다(3월22일 대통령실)”라고 반박했다.

빈손이라는 비판이 커지자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3월21일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역대 최장 23분 모두발언을 했다. 이 중 20분을 일본 이슈에 할애했다.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 “일본은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한 바 있다” “한국이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해나간다면 분명 일본도 호응해올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저는 현명하신 우리 국민을 믿는다”.

과연 그럴까. 많은 질문을 자아내는 발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지 등을 일본 전문가를 만나 물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겸 사단법인 ‘외교광장’ 이사는 일본의 진보 지식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의 제자다. 남 교수는 2000년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6·25 전쟁과 일본:기지국가의 전쟁과 평화’)를 받은, 일본 정치·외교를 중심으로 국제정치를 읽는 연구자다.

문재인 정부 시절 남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한국의 역할에 대해 “용기가 부족했다”라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는 최근 윤석열 정부의 행보를 보면서 “씁쓸함과 모멸감, 노여움 같은 것들”을 느낀다. 외교가 없기에 ‘외교 참사’로도 부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냥 참사라는 뜻이다. 직업 연구자의 무엇을 윤석열 정부가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최근 각종 현안 세미나 발제·토론과 전화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는 그의 일정을 비집고 3월22일 마주 앉았다.

남기정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흥구

이번 윤석열 정부의 행보를 ‘외교가 없었기에 외교 참사가 아닌 그냥 참사’라고 했다. 외교가 뭔가?

국가 간 완전한 평화 상태부터 전쟁 상태 사이에 여러 갈등과 마찰이 있다. 이를 조정하는 작업이 외교다. 양자 간 주장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양보해가는 과정이 있다. 타협을 통해 서서히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확인한다. 그 과정으로 접점을 만들어간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에는 외교 교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다 벗을 테니까 알아서 하라’는 모습이다. 3월6일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판결 해법 발표가 그랬다. 그래도, 뭔가 있을 수 있다는 낮은 수준의 기대라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 결과는 목도한 바와 같다. 일본 가서 정상회담을 했는데 우린 다 줬고 아무것도 못 받았다.

대일 외교에서는 특히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외교에서는 ‘prudence’ 즉 신중함이 기본이 되어야 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그랜드바겐’은 외교의 기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주장이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일본은 굉장히 기대했을 것 같다. 한국이 다 내놓겠다니, 그때부터 일본은 전략을 세워 어떻게 뭘 얻어낼까 생각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출마 선언을 할 때부터 그 말을 했다. 선거 때야 표를 얻기 위해 쓴 말이라 해도, 실제 대일 외교를 하는 입장에서는 신중했어야 한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 진두지휘했던 게 대통령과 대통령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교부가 측은할 정도다. 게다가 피해자 인권 문제는 그랜드바겐 대상이 아니다. 레벨과 영역이 다른 수준의 문제들을 일괄 다 내놓겠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심지어 포괄적 해법을 추구하더라도 단계를 밟아야 한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를 두고 “일단 성공이다” “출발점이 좋다”라고 후한 점수를 주는 연구자들이 있다. 그분들도 단계적 접근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구상권을 포기할 수는 없다거나, 피해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성과를 확보해야 한다고 해왔다. 생각이 바뀐 데 대한 설명이 없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인의 마음’을 얻었다고 자평한다.

마음을 얻었는데 왜 아무런 호응이 없을까? 행동을 언제 할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앞으로 어떤 행동으로 그 마음을 표현해줄지 두고 볼 문제다.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존심이건 뭐건 ‘내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태도로 상대방과 대등하게 우정을 나누는 관계가 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내던졌을 때, 상대방이 정말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할지 의문스럽다. 더구나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국익밖에 없다는 사람들이 국가 간 관계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윤석열 정부 인사들은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문제라고 여긴다.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불법적 식민 지배 상황에서 개인이 당한 피해’를 인정한 것이다. 한국의 헌법과 1965년 조약 및 협정에 대한 우리 해석에 입각한 판단이다. 이를 일본은 국제법 위반이라 비판해왔는데, 요새 일본 사람도 하지 않는 얘기다. ‘국가와 국가 사이 약속이니 지켜줬음 좋겠다’ 정도 말한다. 제국주의 시절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할 때의 논리를 담고 있어서다. 일본의 한 인사에게 ‘요새 일본도 국제법 이야기 안 하던데요’라고 하니 ‘국제법이란 게 사실 실체가 없다’고 답하더라. 전 세계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배·보상 움직임이 일고 있다. 케냐는 영국,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제국주의 시절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피해 배상금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리비아와 조약을 맺고 경제적 지원이 동반되는 형태로 식민 지배에 대해 사죄를 표명했다.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로 미국 내에서도 성찰이 있다. 그런데 우리만 거꾸로 일본의 과거를 면책해줬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이미 일본은 수십 차례 사과했다”라고 주장했는데.

사과는 프로세스다. 사과를 위해, 어떻게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사실 확인과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뒤 이를 실행하는 게 필요하다. 이게 세트가 되어야 사죄다. 또한 뒤가 열려 있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사죄든지 뒤가 막혀 있으면 안 된다. ‘사과했으니 다시는 그 얘기 꺼내지 마’는 사죄가 아니다. 그런 사죄는 백 번 해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다음에 또 우리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고 있어야, 같이 웃으면서 밥도 먹을 수 있다. 그게 안 되면 밥은 같이 먹어도 계속 체한 상태다. 게다가 일본은 해외 정상을 만날 때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말한다. 일본도 자신들이 겪은 피해를 반복해서 언급한다.

3월21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역대 최장’ 모두발언을 했다. 전체 23분 중 20분 동안 한·일 관계에 대해 말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왜 그럴까?

정말 애써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한계 앞에서 잠시 전략적으로 후퇴했다’고. 그런데 지금 나온 내용을 보면 도저히 그리 볼 수 없다. 일본의 국내 사정 때문에, 즉 일본을 배려해서 발표 못한 합의가 혹여 있다? 일본이 잠깐 뭘 숨겨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런 밀실 협상이라면 파기해야 한다. 이런 대일 외교를 하는 이유가 뭔지 합리적으로는 잘 설명이 안 된다. 결국 이들이 가진 어떤 신념 체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뭐라고 보나?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반일-친일의 구도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식민사관의 요체는 사회진화론이다. 암암리에 이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강한 사람 앞에서는 일단 스스로 접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약자였던 적도 없고, 약자의 편에 서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가진 사고다. 이런 행태는 이미 국내 정치에서 많이 보여줬다. 장애인, 노동자, 여성 등을 대하는 태도다. 총체적 인권 무시의 연장선에 대일 외교가 있다.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해줄 수 없는 정부가 바깥에 나가서 어떻게 존중받을 생각을 하나?

국제정세 급변에 따라 한·미·일이 가까워져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층에서는 중국에 대한 압박 게임을 하고, 그것도 현실이다. 그렇지만 2층에서는 중국과 협력 게임을 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각 나라들이 1층에서 가치 게임을 한다면, 2층에서는 국익 게임을 하고 있다. 우리 나름대로 1층과 2층을 왔다 갔다 하는 사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걸 차버리는 거다. 남들은 왔다 갔다 할 때 우리만 1층에 갇힐까 봐 걱정이다.

1월12일 외교부와 한일의원연맹 회장 정진석 의원이 공동주최한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항의 피켓을 들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관계의 ‘미래’를 강조한다.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윤석열 정부의 행보로 한·일 관계의 과거는 봉인되었고, 현재는 봉합되었고, 미래는 봉쇄되었다. 제발 윤석열 대통령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다른 외교 문서와는 달리, 읽을 때마다 감동을 준다. 해당 선언은 역사 문서가 아니라 평화 문서다. 오부치 총리가 과거 직시를 말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미래 지향을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로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러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파트너십 관계를 맺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원리에 입각해 공동의 이익을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딱 미래 지향이라는 말만 떼어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탈맥락화했다. 이런 식으로 선언을 훼손한 사람이 아베 전 총리다. 2018년 아베 당시 총리는 ‘김대중·오부치 선언’ 20돌 행사에 참석해 일본의 과거 직시는 언급하지 않고, 한·일이 미래로 나아가자고만 했다.

‘반일 감정을 자극해 국내 정치에 활용한다’고도 주장했는데.

지금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이 ‘반일’로 뭉쳐 있나? 우리가 너무 양보했다, 이렇게 협상하면 안 된다, 절차는 어디 있고 인권은 어디 있냐는 지적이다. 이걸 반일로 생각하면, 특히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낮에는 영화 〈슬램덩크〉를 보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만나서 ‘우리가 일본에게 이렇게 다 내주는 협상을 해도 되냐?’라고 이야기하는 걸 이해 못할 거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이야기다. 여론조사에도 확인되는 게 있다. 2030 세대는 일본 문화를 즐기고 일본에 대해 친근하게 느낀다. 동시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원칙을 지켜달라는 요구를 전체 평균 이상으로 한다. 과거사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가 망친 한·일 관계를 복원한다는 생각도 강하다.

잘못된 대일 인식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사와 현안을 투트랙으로 가져가려 노력했다.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파기나 재협상을 말하지 않았다. ‘촛불’의 열망으로 당선돼 지지층에서는 파기에 대한 요구가 거셌지만, 국가 간 합의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2018년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에 대해 일본이 반발했지만, 2019년 6월 G20 당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안을 가져가기도 했다. 당시 일본이 받지 않았고, 바로 직후 7월에 오히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를 거론하며 한국에 대한 보복으로 수출규제를 실시했다. 이후 국민들의 반발이 자발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일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건건이 방해한다고 느끼는 점도 있었다. 실제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일본이 미국을 찾아가서 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ABM(Anything But Moon·문재인 정부 정책 빼고 다)’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이런 맥락을 살피지 않고, 문재인 정부의 대일 외교 전부를 부정하고 전부 새로 하겠다고 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계속 경고했다. 윤석열 정부는 대일 외교의 환경과 구조를 확인하고 조정했어야 한다. 지난 정부의 한·일 관계를 모두 실패로 규정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그것도 일본 입장에서 해석하면서, 대일 외교의 전선에서 스스로 철수해버렸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가 그동안 만들어놓은 대일 협상의 지렛대도 버렸다.

문재인 정부 대일 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아쉬운 부분은 있다. 정치는 ‘결과 책임’이다.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가 조금 더 결단을 해서, 100점짜리는 아니더라도 피해자가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적극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더라면 다른 부분에서, 가령 남북관계에서 모자란 부분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직면했던 총체적 어려움도 이해하는데, 법적 정당성을 살리기 위한 정치적 판단과 전략적 접근이 아쉬웠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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