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잭 더 리퍼에게 희생된 다섯 여자 이야기.’ 영국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의 이름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1845년생 매리 앤 폴리 니컬스, 1841년생 애니 채프먼, 1843년생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 1842년생 캐서린 에도스, 1863년생(추정) 메리 제인 켈리.
저자 핼리 루벤홀드는 가해자에게 전혀 관심 없다. 18~19세기 영국 여성사를 연구하는 그가 집요하게 뒤쫓는 건 피해자들의 생애다. 하지만 130여 년 전에 이미 살해당한 사람의 삶을 무슨 수로? 작가는 당시 수사 자료와 신문 기사, 논문 등을 토대로 그들의 생애를 복원한다. 이를테면 첫 번째 희생자 폴리가 태어나던 날의 날씨(“날짜는 1845년 8월26일, 이 동네에서 인쇄된 신문들에 따르면 ‘맑고 건조한 날’이었다”)부터 폴리가 마지막까지 몸에 지니고 있던 소지품(“갈색 외투. 말 옆에 남자가 서 있는 무늬의 큼직한 단추 일곱 개가 달렸음”) 목록까지 세세하고 섬세하게. 그 덕분에 몰입감이 높다. 팩트마다 출처를 밝힌 주석 목록은 책 뒤편에 수십 페이지가 딸려 있다.
한 세기가 지났어도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작 당시에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편견 앞에서는 진실도 소용없었다. 사회는 이들을 하나같이 ‘매춘부’로 낙인찍었다. 당시 홀로 지내던 여성이 마주해야 했던 빈곤의 지독함과 복지 시스템 부재는 슬그머니 가려졌다.
경찰도, 목격자도 가십에만 집중하는 사이에 범인은 빠져나갔다. 체포하지도 못한 범인의 별명은 마치 기억해야 할 영웅처럼 떠돌고, 가족과 이웃이 있었던 피해자의 이름은 지워야 할 수치처럼 기억됐다. 이 책은 뒤집힌 이름을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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