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론스타에 2억1650만 달러(8월 말 현재 환율로 약 2900억원)와 그 이자를 배상하라.” 2012년 론스타가 한국에 6조원대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시작된 ‘중재(ISDS)’가 10년 만에 내놓은 결말은 미지근했다. 론스타는 고작(?) 2900억원만 챙겨 ‘먹튀’를 마무리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자를 더해도 4000억원을 넘지 않는다. 한국은, 실제 배상액이 당초의 청구액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부의 잘못이 인정되어 수천억 원을 론스타에 내줘야 하는 처지다. 양측 모두 100% 만족하기는 어려운 결과로 보인다.
한국에 ISDS를 건 8개 사모펀드들은 론스타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만들어놓은 도관회사(조세 회피만을 위해 설립한 회사)이자 페이퍼 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다. 이들은 한국이 벨기에·룩셈부르크와 맺은 투자보장협정(이하 한-벨·룩 BIT)에서 자신과 같은 벨·룩 기업의 한국 내 투자를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국 금융 당국이 외환은행 매각을 방해하고, 국세청이 부당한 세금을 부과해 6조원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 발표를 토대로 중재판정부가 어떻게 판정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외환은행 매각 부분이다. 은행을 사고팔 때는 금융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론스타는 2002년 1조3834억원에 인수한 외환은행 경영권(주식 51.02%)을 2007년 HSBC에 5조9000억원에 팔기로 했다. 금융 당국은 바로 매각을 승인하지 못했다. ‘산업자본’인 론스타에 은행 주인 자격이 있는지부터 검토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매각 승인도 거부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매각이 무산된다. 론스타는 승인 ‘지연’ 때문에 매각이 무산되는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재판정부는 론스타 측에 허무하게도 이렇게 판정했다. “한-벨·룩 BIT는 2011년 발효되었으므로 한국이 그 이전에 한 행위는 협정 위반이 될 수 없다.”
“한국 당국 잘못 50%, 론스타 잘못 50%”
론스타는 2011년 초 하나금융지주에 외환은행을 팔기로 한다. 금융위는 이때도 바로 매각을 승인하지 못했다. ‘산업자본’ 문제 외에 외환카드 주가조작 혐의라는 새 변수가 있었다. 사실이면 은행법에 따라 론스타는 은행 주인 자격을 잃게 된다. 결국 2011년 3월 주가조작에 대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금융 당국은 2012년 1월 ‘론스타는 (조건 없이) 외환은행 주식을 매각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론스타의 ‘먹튀’를 돕는다. 그러나 이런 성의가 론스타의 성에 차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금융 당국이 가격을 낮추라고 압박하며 매각 승인을 지연하는 바람에 원래 하나금융지주 측과 합의한 금액에서 4억3300만 달러(약 5800억원) 낮은 3조9157억원밖에 못 받았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론스타 주장에 공감했다. ‘한국 금융 당국이 잘못했다. 그러나 론스타에도 주가조작의 잘못이 있다. 책임을 50%씩 나눠 져라.’ 배상금 약 2900억원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다음으로 조세 부분이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이외에도 스타타워·극동건설 등 여러 건의 투자에서 발생한 수익에 부과된 세금을 문제 삼았다. 중재판정부는 위와 마찬가지로 한-벨·룩 BIT 발효 이전에 있었던 일은 협정 위반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사실 론스타는 이미 ISDS와 별도로 국내 소송을 제기해 상당한 세금을 돌려받았다). 또한 그 이후 이루어진 세금 부과에도 문제가 없다고 판정했다.
중재판정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대체로 정부를 평가하는 데 집중되는 듯하다. 6조원이나 되는 청구를 2900억원대로 막았으니 “선방했다”는 것이 정부와 대다수 보수언론의 관점이다. 하지만 ‘중복되는 청구’나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청구’를 제외하면 실제 청구액은 1조원이 채 되지 않고, 2900억원대의 배상금은 역대 최고액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시 론스타의 ‘먹튀’에 관여하고도 승승장구한 고위 관료들이 이제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론스타에 대한 비판도 여전하다. 수상쩍은 방법으로 수조 원을 번 것으로 모자라, 더 큰돈을 벌지 못했다며 배상까지 하라니 이렇게 파렴치한 자들이 있는가. 실제로 론스타의 뻔뻔함은 2012년 한국 정부에 보낸 ‘중재의향서’에서 관찰된다. 론스타는 자신을 도탄에 빠진 한국 경제를 구하러 온 구원자인 것처럼 묘사한다.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 비싼 값에 외환은행을 샀고, 외환카드 인수까지 떠안았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는 한국을 배은망덕한 후진국으로 맹비난한다.

ISDS 제도, 그대로 둘 것인가?
이러한 평가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중재(ISDS)에서 누가 이기고 졌다거나, 누구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는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ISDS 제도에 대한 평가다. 론스타에 ISDS는 자신이 입은 손해를 회복할 수 있는 소극적인 의미의 구제 수단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ISDS는 한국이 IMF 금융위기로 고통받는 국면에서 수조 원의 수익을 안겨준 각종 투자의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는 마지막 투자 그 자체였다. 론스타는 오로지 외국인 투자자에게만 주어지는 ISDS라는 황금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수천억 원의 추가 수익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ISDS는 소송이 아니다. 소송처럼 당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글로벌 스탠더드’도 아니다. 미국·영국·유럽연합(EU)·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선진국은 자기들끼리는 ISDS를 잘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는 한국 시민들은 어쩌다가 ISDS를 당연시하게 되었는가? 앞으로도 이 제도를 그대로 둘 것인가? 론스타 판정에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판정이 나온 8월31일 “관련 법령과 중재판정부의 절차명령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관련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판정문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중재판정부는 이미 중재 정보 대부분을 비공개하라는 ‘절차명령’을 내렸다. 무서운 명령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정부와 론스타가 비밀로 하자고 하니 중재판정부가 그렇게 하라고 ‘절차’를 정리한 것뿐이다. 지금이라도 론스타와 합의하면 공개할 수 있다.
정부는 또 중재판정의 취소신청(일종의 재심 절차)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관련 법령”인 정보공개법에 따르면 정부는 진행 중인 재판과 관련된 사항은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정부는 이런 이유로 한국이 패소한 최초의 ISDS인 다야니 사건의 판정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2019년 12월 취소신청에서 패소한 뒤에도 숨기고 있다.
판정문을 포함해 중재와 관련한 정보를 극소수 관료와 법률가가 독점하면 정보는 유통될 수 없다. 정보가 없으면 언론과 시민사회의 관심은 줄어들고, 사안을 다룰 수 있는 역량도 떨어진다(대다수 언론은 아직도 이번 사건을 ‘소송’으로 오해한다). 그러면 국민 여론이 생성될 기회가 차단된다. 그동안 ISDS를 둘러싼 극도의 비밀주의는 이렇게 강화·고착되어왔다. 이제 이 악순환을 끊어낼 때다. 론스타 판정문을 공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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