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활동이 사회정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게 ESG다. 밍크(위)의 털로 만든 코트는 진저리나는 사치재다.ⓒEPA

ESG가 뭘까? 처음엔 기업을 ‘낀’ 환경운동 같았고, ‘착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참 어렵게 한다 싶었다. ‘고객에게 진정’인 기업들이 잘된다는, 다시 말해 고객을 함부로 대하면 망한다며 자세를 180° 바꿔버린 새로운 마케팅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달에 집을 비우고 새로운 살 곳을 찾을 걱정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된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대기에 탄소가 좀 끼어 있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삐딱한 시선으로만 ESG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지구가 병들지 않으면 병든 것보단 낫지 않은가. 새로운 물길이 트이자 큰 파도가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환경과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기업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단다. 이윤추구만도 벅찬데 혹이 하나 더 붙었다. 더욱 교묘해진 이윤추구를 위해 나온 새로운 전략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E는 환경(Environment)이다. 지금까지는 기업 성과를 높여 주가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산림 파괴나 탄소 배출 정도는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다. 잘 알려진 ‘주주 우선주의’의 폐해다. ESG가 대세가 된 데에 환경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E는 지구 위 모든 생물체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S는 사회(Social)다. 기업활동도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투자도 사회적으로 책임 있게 해야 한다. 더 이상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살인적인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운동화를 신거나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가운데 수입된 다이아몬드는 몸에 걸치지 말자. 밍크코트는 불쌍한 동물을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만든 진저리나는 사치재다(궁금하면 유튜브에 ‘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라고 치고 그들이 고발하는 동영상 몇 개를 보면 된다. 혐오감이 엄청날 거라는 경고는 미리 해둔다).

G는 거버넌스(Governance)다. 환경이나 사회 같은 큰 테제 뒤에 갑자기 거버넌스처럼 작은(?) 게 나오니 다소 느닷없다. 거버넌스는 기업에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주체들, 예를 들어 주주, 채권자, 경영자, 노동자, 소비자 등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하고 관리해야 기업가치를 최대로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이다. 영미권에서는 주주와 경영자의 갈등이나 주주와 채권자 사이의 갈등 등이 주요 주제이지만 한국에서는 지배주주와 소액주주의 갈등이 가장 중요한 이슈다. 만약 자신이 의사결정에서 소외된다고 믿는 주체들이 기업과의 이해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면 기업은 그들이 공헌할 수 있는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어머니(가운데)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세 항목 중에서 S나 G는 잘 안 보이고 왜 유독 E만 눈에 띄는 걸까. 사실 이런 의심을 갖게 된 건 꽤 오래전부터다. 그런데 최근 유력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ESG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했다. E와 S와 G를 한 단어로 묶기에는 각 항목들의 목표가 상충되는 경우가 많고, 이를 잘한다고 기업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며, 그 성과를 수치화하거나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그러면서 다소 성급해 보이는 주장을 건넨다. ‘ESG에서 다른 건 다 신경 끄고 E만 하자. E조차 이것저것 너무 많으니 그중에서도 탄소 배출(Emission)에만 집중하자’는 것. 이 주장에 따르면 ESG의 E는 Emission만을 뜻한다.

ESG가 탄소 배출 저감 운동?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ESG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경고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력지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허투루 넘기고 싶지는 않으니 조금만 더 살펴보자. 사실 ESG 중에서 유독 환경의 E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경제주체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대응’할 수밖에 없도록 외부로부터 강제된 조건을 ‘외부효과(externality)’라고 한다. ESG는 대표적인 외부효과다. 환경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외부효과다. 예를 들어 탄소 배출은 다른 항목들보다 수치화하기 쉽고 따라서 미흡한 성과를 벌하기 용이하다. 그래서 가장 눈에 띈다. 앞으로는 기업이 탄소 배출을 줄이지 않으면 투자를 받지 못해 제품을 만들 수 없고, 설령 만든다 하더라도 내다 팔 수가 없게 된다. 외부효과는 싫다고 회피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경제주체들은 모두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S는 어떤가. 아무래도 E보다 목소리가 작다. 환경이 ‘지구’의 생존에 관한 것인 데 비해 S는 그 하부조직인 ‘사회’에 관한 것인 탓일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S가 E보다 덜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것도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다. 이렇게 보면 S가 잘 안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만 아마도 S에서 중요한 부분일 산업재해에 대한 무관심은 더 이해하기 어렵다. 직접적으로 사람이 죽는 산업재해가 환경재해보다 덜 중요시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 설치 등 제반 노력에 들어가는 비용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지출해야 할 비용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비용이 크니 법을 늦춰달라는 목소리는 자주, 많이 들린다. ESG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산업재해에 관한 논의가 잘 보이지 않는 건 한국뿐 아니라 다른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물론 다른 선진국들이야 한국보다 이미 산업재해와 관련해 훨씬 더 많은 안전제도를 만들어 두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대답은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 교수가 이미 1968년에 답해주었다. 사람들을 죽게 놔두는 게 더 싸게 먹히니까 그런다고.

하루에 5.6명이 산재로 사망하는 선진국이 21세기 대한민국이다. 물어보자. 정말 ‘RE100’이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다급하다고 생각하는지? E가 S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S도 E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이다. 당신의 아들이나 조카는 오늘 당장 아무런 보호 장구 없이 동네 전신주에 올라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만져야 할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에서 아동노동을 통해 만든 제품은 쓰지 말자면서 제 나라 노동자를 산업재해로 갈아넣은 제품을 생산·소비하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한국에서 G는 아예 ESG와는 다른 차원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미권이야 애당초 G를 새삼스레 강조할 이유가 한국처럼 많지 않다. 주주들을 함부로 대하면 어떻게 되는지 기업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회사에 투자해준 고맙기 그지없는 ‘주인’인 주주들을 때리고 후려쳐서 허리와 목을 부러뜨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 한국만의 얘기다. 생각해보자. LG화학의 주주였다가 물적분할로 뒤통수를 맞은 당신에게 정말로 탄소 저감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ESG가 다소 뜬금없이 들리는 이유 한 자락을 의심하게 된다. 혹시 한국에서 ESG는 후지기 그지없는 G를 가리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양질의 거버넌스가 정당한 이윤 보장해

ESG에 힘쓰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글이 아님을 강조해둔다. ESG는 G가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ESG는 기업의 이윤추구가 ESG로 대표되는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규제이지만 엄연히 이윤추구를 인정하는 개념이다. 이윤을 얻는다는 것은 기업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이윤 없이 생존하는 기업은 없다. ESG는 환경이나 사회를 위해 나의 투자를 희생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투자가 성과를 내기 위한 중요한 새로운 기준과 기회로 환경이나 사회를 제시한다. 이 지점에서 ESG는 어떤 이상주의적 망상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리고 우리가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기업이 계속해서 이윤을 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자신도 투자수익을 얻어야 한다.

‘경제’를 위해 ‘총수’를 사면·복권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 기업들의 후진 거버넌스를 드러낸다.ⓒ시사IN 신선영

투자자들이 투자의 대가로 이윤을 챙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양질의 거버넌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거버넌스는 기업에 투자한 투자자, 다시 말해 주주와 채권자들이 그들의 투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장치다. E와 S를 잘한 기업에 투자했는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G 탓이다. ESG의 성패가 G에 달려 있다는 말이고, G가 ESG의 가장 기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좋은 G를 위해서는 기업 내부의 노력보다 한 국가의 법적인 규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거버넌스가 꼬여 있으면, 투자는 주주와 채권자가 하고, 그로 인한 보상은 대주주나 경영진이 차지하는 일이 생긴다. 심지어 투자자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면서까지 말이다. 이런 걸 제대로 규제하지 않는 나라에서라면 누구도 주주나 채권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투자자가 없는 회사는 존속할 수 없다. 그렇다. 이 또한 생존의 문제다. 거버넌스에서 국가의 역할은 이처럼 중요하다.

출범한 지 100일도 되지 않은 새 정부가 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들을 ‘경제’를 위해 사면·복권시켰다. 정치인들을 사면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해서 사면 자체가 탈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경제’를 위해 ‘총수’를 사면·복권해야 한다는 건 한국 기업들의 너무나 후진적인 거버넌스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이제 총수 한 명에 기대는 거버넌스는 혁파해야 하지 않겠는가.

ESG에 관해 자주 잊고 있는 것이 있다. ESG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E도 아니고, S도 아니고, G도 아니다. 바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굳이 ESG로 대별하고 싶었던 건, 이 항목들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아니 성장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어도 벌을 주지 않겠다는 사회가 얼마나 지속가능한 사회인지는 굳이 ESG를 갖다 대지 않아도 몇천 년 역사에서 배워온 교훈 아니던가?

죄 짓고도 벌 받지 않겠다는 건 ESG 이전에 염치의 문제다. 죄 지은 자에게 벌을 안 주겠다는 건 ESG 이전에 ‘싸가지’의 문제다. 재벌 총수가 아닌 다른 국민을 2등 시민으로 격하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SG에 염치와 싸가지를 측정하는 항목은 생각보다 많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기자명 이관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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