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코로나19 단기진료센터(경기도 제2호 특별생활치료센터)를 찾은 임승관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장. ⓒ시사IN 조남진

10월4일 임승관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장은 경기도 수원시 ‘코로나19 단기진료센터’에 있었다. 재택 치료 중인 코로나19 확진자들은 이곳에 들러 대면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상황실 모니터에 비친 모듈형 병동 안에서 평상복 차림의 입소자들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 정도 입원하며 검사와 치료를 받고 증상이 회복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이날 입소자 10명은 귀가해 재택 치료를 이어갔다. 나머지 한 명은 폐렴 증상이 있어 산소 공급 등의 처치를 하고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이송됐다.

‘몸이 아플 때는 집에서 컨디션을 살피다 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에 방문한다.’ 특별할 것 없는 상식이다. 그러나 코로나19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코로나19에 걸리면 병원이든 생활치료센터든 시설에 격리되고, 증상이 없더라도 며칠간 갇혀 있어야 한다. 집과 병원을 오가는 통원치료는 이제껏 상상하기 어려웠다. 임 원장은 진료 방식과 인식을 되돌려야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회복)’도 가능하다고 본다. 9월부터 10월12일까지 단기진료센터를 시범 운영했던 이유이다. 앞서 2월에는 경기도 코로나19 홈케어 운영단을 꾸리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택 치료를 도입하고 시행해왔다. 사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코로나 환자를 진료하는 방식이다.

코로나19 유행 초기부터 임승관 원장이 해온 얘기들은 당시 시점에서는 꽤 낯설게 들렸다. 지난해 3월 〈시사IN〉 ‘주간 코로나’ 대담 첫 화(제653호 ‘코로나19,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최선이다’ 기사 참조)에서 ‘수용 가능한 위험(Acceptable Risk)’이라는 개념을 언급했고, 그해 9월에는 “이제 전반전 15분을 뛰었을 뿐”이라고 짚었다. 그가 준비해온 사업들은 몇 개월이 흐른 뒤에야 쓸모를 인정받곤 했다. 돌아보면 그 모든 일이 코로나19와 함께 살기를 고민하고 행동에 옮겼던 흔적이다. ‘위드 코로나’로 가는 길을 묻기 위해선 그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전문가들이 ‘재택 치료’를 위드 코로나의 필수 조건으로 꼽는다. 정부도 이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이 사업을 준비해온 처지에서 반갑겠다.

사실, 조금 염려가 된다.

왜인가?

추석연휴 끝나고 하루 확진자가 3000명 넘게 늘어나면서 병상을 배정받지 못하는 가정 대기자가 생겨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서둘러서 재택 치료를 확대했다. 재택 치료자로 집계되면 그만큼 가정 대기자 수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으니까. 그런데 재택 치료를 하려면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 보건소나 지자체에서 집에 있는 확진자를 모니터링하고, 필요할 때는 병원과 연계해 신속하게 이송해야 한다. 경기도 코로나19 홈케어 운영단은 2월부터 이걸 준비했다. 3월에 32명으로 출발해 9월에는 1900명까지 점진적으로 대상자를 늘려왔다. 다른 지자체는 이런 인프라를 갖춰 나가는 단계이다.

지난 9월부터 경기도는 코로나19 단기진료센터(아래)를 시범 운영했다. ⓒ시사IN 조남진

앞서 재택 치료를 도입한 목적은 무엇인가?

무증상·경증 환자들은 집에 있어도 안전하다는 걸 보여주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중앙정부에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말이다. 5월에 재택 치료 심포지엄도 열고 여러 경로로 정책 건의도 했다. 진척이 잘 안 되다가 4차 유행 이후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전격적으로 채택이 됐다. 위드 코로나로 가는 길목에서 정말 중요한 사업인데, 사회적 공감대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혹시라도 신뢰가 훼손되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깊이 우려하고 있다.

‘K방역’으로 불리는 한국식 코로나19 대응 방식과는 다소 다른 얘기를 꾸준히 해왔다.

지난해 대구에 1차 유행이라는 큰 파도가 덮쳤을 때, K방역 전략을 빠르게 수립하며 성공적으로 넘어왔다. 대규모 진단검사 시스템을 구축하고, 생활치료센터처럼 창의적인 방안을 고안하고, 총리를 비롯해 관료들이 모두 달려가서 집중력 있게 대응했다. 잘했고 박수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성공담이 각인 효과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대응이라는 자물쇠를 푸는 만능열쇠가 돼버렸다. 그다음부터 미로에 방이 나올 때마다 계속 같은 열쇠를 넣고 있다. 코로나19는 짧고 굵게 끝나지 않을 거고, 그 열쇠가 맞지 않는 순간이 올 텐데.

‘한국이 코로나19 대응 암호를 풀었다’라는 외신 보도가 나올 정도로 K방역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도 비교적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지 않나?

지난해 2월부터 올해 6월까지 경기도 코로나19 긴급대응단장으로 활동했다. 건축공사로 치면 현장 반장 같은 자리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이론을 토대로 의견을 내고 중앙정부 관료들은 회의를 통해서 현장을 접한다. 나는 일이 벌어지는 공사판에서 현장들을 접해왔다. 그래서 이 시스템의 실패적인 부분을 현실로 접했다.

K방역은 고비용·고효과·저효율 구조다. 검사와 추적에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쏟아붓는다. 반면 전쟁의 후방이라 할 의료자원 확보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모델이다. 보건소나 방역 인력들은 소진되는데 의료자원은 간당간당하니 확진자 수를 억제하기 위해 검사와 역학조사 강도를 점점 더 높여야 한다. 2차 유행, 3차 유행을 지날 때마다 손실이 축적돼왔다. 구해야 하는 환자들을 다 구하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다.

내가 매달려온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양적 확대’다. 코로나 환자를 두고 공공병원들만 보지 않고 민간 의료기관도 참여해서 절대적인 병상 수를 늘리고 이걸 아우르는 병상 배정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질적 전환’. 하루 확진자가 1000명에서 1500명이나 2000명으로 늘어난다면 생활치료센터 몇 개 만들고, 전담병원에 의료인력을 추가 파견해 병상을 더 확보하면 된다. 하지만 5000명, 1만명일 경우에는 방법론 자체를 바꿔야 한다. 산술적으로 자원의 양을 늘릴 게 아니라 ‘효율’을 높여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재택 치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행 규모가 어디까지 커질 수 있다고 예상했나?

코로나19가 시작되고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는 거다. 그때마다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늘 대본을 한 개만 만들어왔다.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쓰는 데 에너지와 시간을 온통 투입한다. 팬데믹을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한다. 이것이 내가 주도하는 경기가 아니라는 걸 안다면 ‘예측’보다는 ‘대비’에 대해 더 고민하고 토론할 것이다.

모든 경우를 완벽하게 대비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K방역 전략을 쓸 거야’, 좋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K방역이 실패했을 때에 대비해 백업 전략은 있어야 하지 않나. 메인 전략만큼 전력을 다하지는 않더라도 대안 전술을 준비하고 연습경기는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도하는 경기가 아니다?

주도권은 바이러스에게 있다. 기본적으로 이 관점을 공유해야 한다. ‘팬데믹은 생태적 현상이다. 인류가 취하는 조치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가늠할 수 없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다.’ 나의 사고 틀은 이거다. 바이러스는 강한 상대. 우리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면 코로나19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대표팀.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모두 결국은 통제에 성공하지 않았나?

가로축이 전파력, 세로축이 치명률이고 각종 감염병이 좌표로 찍혀 있는 그림을 보셨을 거다(〈그림 1〉 참조). 점이 어디에 찍히는지에 따라 이 감염병이 국지적으로 끝날지 팬데믹으로 갈지가 정해진다. 코로나19가 찍힌 자리는 인류로서는 제일 안 왔으면 하는 지점이다. 치명률과 전파력 사이에 아주 적절한, 교묘한 균형. 에볼라처럼 최대 90%가 죽으면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근다. 코로나19는 1%(초기 데이터 기준) 정도 사망한다. 그것 때문에 전 지구가 활동을 정지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활동이 일어난다. 그런데 R0(기초감염재생산지수)는 2.5 정도로 전파력은 센 편이다. 게다가 나이에 따라 위험도가 크게 다르다. 노인들은 걸리면 치명적이지만 젊은이들은 가볍게 지나간다. 세대 간 존중과 연대가 싹터야 헤쳐 나갈 수 있을 텐데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모든 연령대에서 비슷한 비율로 죽는 병이었다면 통제는 더 쉽게 됐을지도 모른다. 무역·교류 다 중단하고 방법을 찾았을 테니까. 인류 입장에서는 대응하기 제일 까다롭고 부적합한 지점에 있다. 이 병을 알면 알수록 깨닫는 거다. ‘퍼질 가능성이 매우 높구나.’

우리 정부는 검사·역학조사·격리를 이용한 ‘3T 전략’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유행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단기적으로는 가능하다. 이론적으로도 가능하고. 확진자가 증가하는 탄성을 그런 수단으로 계속 누르면 올라오지 않을 거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건 ‘특정한 계(界)’를 설정한 거다. ‘사람의 행동은 내내 동일하다’라는 비현실적인 세계. 처음에는 술집에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지만 이제는 가지 않나. 사회적 거리두기 지키라고, 여행 가지 말라고, 시위하지 말라고 하면 지난해까지는 어느 정도 통했지만 올해에는 그렇지 않다. 이건 자연과학만으로 풀 일이 아니다. 행동과학이고 사회과학이다. 놀랍게도 유행 초기부터 이런 원리를 이해한 나라가 있다. 스웨덴이다.

지난해 스웨덴은 비난을 무릅쓰고 록다운을 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해 5월26일 따뜻한 날씨를 즐기는 스웨덴 말뫼 시민들의 모습. ⓒEPA

스웨덴? 스웨덴의 집단면역 실험은 전 세계적으로 큰 지탄을 받았다.

지난해 유럽 국가들이 록다운에 돌입할 때 스웨덴은 맹비난을 무릅쓰고 하지 않았다. 그때 스웨덴 정부가 이런 취지의 설명을 했다. ‘록다운이 유행을 통제하는 데에 효과적이라는 걸 우리도 안다. 그런데 두 번은 안 된다. 처음에는 수긍하고 따르겠지만 두 번째 록다운은 시민들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파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다음이 없는 정책은 쓸 수 없다. 지금 피해가 크더라도 록다운 없는 방법으로 균형을 찾겠다. 시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양식 아래에서 길을 찾겠다.’

스웨덴은 지난해 봄에 이미 대학을 제외한 학교 문을 열었다. 등교하면 그로 인해 확진자가 늘어날 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미래가치를 유보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 거다. 확진자 발생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잘 관리하자, 그래도 늘어나면 받아들이자 한 거다. 나는 스웨덴이 오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스웨덴은 집단면역이 아니라 일찍이 ‘위드 코로나’를 주장한 거다. 당시 그 용어는 없었지만.

위드 코로나가 그런 것인가? 일반적으로는 코로나19가 사라지진 않아도 백신접종률이 높아지면 독감처럼 되고, 확진자 수도 점차 줄어들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얼마 전 정부에서 주최한 ‘단계적 일상회복’ 토론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사회는 위드 코로나를 잘못 이해 혹은 잘못 설명하고 있다고. 우리는 여전히 K방역의 종식 담론 안에서 사고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는 K방역과 다른 장르다. K방역은 위드(with) 코로나가 아니라 ‘어게인스트(against) 코로나’이다. K방역은 제로 전략 혹은 통제 전략이었다. 그 전략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수용할 수 없는 존재다. 5~6월에 델타 변이 때문에 집단면역으로 종식이 어렵다는 게 확실해지고 다른 나라에서 한다니까 위드 코로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지금 한국의 위드 코로나 담론은 사실 K방역과 다를 게 없다. 위드 코로나는 우리가 2년간 인내해서 고난을 극복한 끝에 다다르게 된 성공 서사의 결말이 아니다. 보통 위드 코로나를 어떤 사건, 어떤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업시간 제한을 푼다든가, 마스크를 벗는다든가. 어쩌면 정부·여당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 노래를 다시 틀고 성대하게 기념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위드 코로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

어떤 과정 말인가?

위드 코로나 국가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영국·미국 유형이다. 유행 억제에는 실패했지만 생산력과 구매력을 바탕으로 백신을 일찍 확보하고 빠르게 접종률을 높인 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제하겠다는 전략. 두 번째는 북유럽 유형. 덴마크는 위드 코로나를 선언한 건 최근이지만 사실 올해 초부터 단계적으로 사회적 통제를 풀어왔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와 공존을 모색해온 스웨덴도 여기에 속한다. ‘과정으로서 위드 코로나’인 국가들이다. 한 방향의 항로로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델타 변이가 나왔다 하면 대응 수준을 좀 높이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정보가 쌓이면 다시 대응 수준을 조정하고. 구불구불 가지만 추세선은 점차 낮아진다(〈그림 2〉 ① 참조).

세 번째는 동아시아 유형인데 싱가포르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강한 억제 전략을 유지해온 국가들이다. 백신이 나온 뒤에는 접종률을 최대한 높인 뒤 계속 유행을 통제하면서 위드 코로나로 간다는 것(〈그림 2〉 ② 참조). ‘결과로서 위드 코로나’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과 가장 비슷한 노선이다. 정부가 백신접종률 70~80%에 도달하는 11월 초부터 ‘단계적 일상회복’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싱가포르의 백신접종률이 80%이니 한 달 뒤 우리의 미래다. 나는 요즘 정부나 전문가들이 싱가포르 때문에 당황하고 있다고 본다. 싱가포르 하루 확진자가 8월 중순까지만 해도 40명대였다. 지금 3000명 넘게 나온다. 우리나라로 치면 하루 신규 확진자 2만5000명이 생기는 셈이다.

9월15일 ‘전국신혼부부연합회’가 서울 여의도 인근에서 웨딩카 22대에 현수막을 건 채 시위를 벌였다. ⓒ시사IN 신선영

백신이 소용없는 건가?

아니다. 백신은 ‘열일’을 하고 있다. 정확히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덴마크(약 581만명)와 싱가포르(약 589만명)는 인구수가 거의 같다. 백신접종률도 비슷한데 최근 일주일간 일평균 확진자 수는 약 700명 대 약 3200명으로 매우 다르다(10월19일 기준). 앞으로 두 국가의 유행세가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현 시점에서 눈에 띄는 차이점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 유럽은 엄청난 규모의 확진자가 나와서 알게 모르게 자연 감염된 사람이 많다. 덴마크의 백신접종률이 75%이지만 면역력을 가진 인구는 사실 그보다 많을 것이다. 반면 싱가포르는 유행을 성공적으로 관리해왔기 때문에 자연 감염된 인구가 별로 없다. 일종의 역설이다.

두 번째로 싱가포르는 ‘확진자’를 찾는 나라이고, 덴마크는 ‘환자’를 찾는 나라라는 것이다. 아주 결정적인 차이다. 싱가포르는 한국의 3T 전략과 비슷하게 방역을 한다. 추적검사해서 무증상, 경증 확진자까지 샅샅이 찾아낸다. 유럽은 그렇지 않다. 기본적으로 아픈 사람, 증상이 있는 사람만 검사를 한다. 우리가 ‘70%다, 90%다’ 말하는 백신 효능도 임상시험 참가자 중에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검사해서 나온 수치이다. 싱가포르는 덴마크라면 찾지 않았을 감염자들을 다 찾고 있는 거다. 한국도 이렇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확진자가 3000명 넘게 나와도 싱가포르 상황은 사실 위험하지 않은 걸까?

확진자가 대량으로 발생했을 때 위험은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중환자 수나 사망자 수 같은 지표이다. 백신이 확진자 수를 기대만큼 줄이지 못할 가능성이 있지만, 중환자 발생이나 사망 위험을 감소시키는 효과는 어느 정도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10월19일 기준, 일주일간 일평균 사망자는 덴마크는 2명, 싱가포르는 9명이다). 또 다른 위험은 의료체계의 과부하이다. 병상이 포화된 상황에서 의료적 처치가 꼭 필요한 사람이 제때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런 상황이 사회에 알려지면 불안과 공포가 상승하게 된다. 이는 코로나19 대응에 필요한 의료체계를 얼마나 넉넉히 확보했는지 그리고 그 운영을 얼마만큼 효율화했는지에 달려 있다.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백신접종률이 목표에 도달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위드 코로나’라는 항해에 백신접종률은 단지 출항의 조건일 뿐이다. 진짜 항해는 그다음이다. 폭풍을 만날 수도 있고 암초 지대를 건너야 할지도 모른다. 백신이 우리 손에 있다 해도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 앞으로 나오는 변이에도 효능이 유지될지, 미접종자들을 어떻게 할지, 남아 있는 불확실성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지난해 11월에 이미 〈시사IN〉 ‘지속 가능 방역’ 연속 토론의 네 번째 순서로 ‘진단키트, 백신, 치료제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백신 같은 ‘과학기술’에서 재난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고 한다. 물론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주연은 ‘사회체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가 취해왔던 자세는 이런 거다. ‘히어로(백신)가 올 때까지 시민들은 움츠리고 있자.’ 문제는 히어로가 오셨는데, 훌륭하기는 한데, 악당은 그사이 레벨업(델타 변이)을 했고, 우리 영웅은 악당을 없애버릴 정도는 아니네. 세상에 완벽한 슈퍼히어로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렵지 않나. 그래서 나는 지난해부터 이렇게 말하고 다닌 거다. ‘영웅이 오겠지만 그 사이에 시민들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코로나19 대응의 균형점을 모색하고, 고통이 어느 한 편에 몰리지 않도록 무언가 해보자.’

영국처럼 백신접종률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기본적인 방역 수칙만 남긴 채 일시에 사회를 여는 방법도 있지 않나?

‘위드 코로나’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1번은 확진자 수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전략. 이전까지는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유일했고, 올해는 백신이라는 훌륭한 수단이 생겼다. 백신접종률을 높이면서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강도는 점차 낮출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기에만 신경 써왔다. 하지만 조건이 더 필요하다. 2번 의료자원이다. 한국은 이걸 원활하게 못해서 코로나19 유행 내내 고생하고 있다. 재택 치료처럼 자원 활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질적 전환도 제때 준비를 못해 지금 고전하고 있지 않나. 3번은 인식 체계이다. 백신접종률이 높아지고 의료자원을 탄탄히 깔아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여전히 코로나19를 두려워하고 옆집에서 확진자가 생활하는 것을 꺼린다면 우리는 위드 코로나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영국은 하루에 확진자가 4만명씩, 사망자가 100명씩 나오는데 프리미어리그를 열고 경기장에서 막 응원하지 않나. 그 차이다. 한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율은 0.6% 정도다. 약 160명 중 1명. 이게 묘한 숫자다. 코로나19 유행이 2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간접적인 경험을 했다. 본인 혹은 가족이나 친구가 코로나19에 걸린 경우는 별로 없다. 보통 지인의 지인이 확진된 얘기를 전해 듣는 정도다. 유럽은 워낙 큰 유행을 겪은 탓에 코로나19를 직접 경험한 비율이 더 높다. 그러면서 위험 수용성이 생기고, 위험에 대한 인식도 실제에 가까워진 거다. ‘우리 아이가 걸렸는데 그냥 코감기 앓듯이 지나가네. 하지만 요양원, 요양병원 같은 곳은 정말 위험하니 우리가 거기는 철저히 보호해야 해’ 이런 식으로.

한국 사회에서 아직 코로나19의 위험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걸까?

지난해 3월 대구 유행 때는 온당한 평가였다. 이 감염병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위험 인식을 1년9개월째 변함없이 유지하면 오작동이 일어난다. 정부가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위기 소통)’을 통해서 적정한 위험 인식을 찾아가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통 실패로 생겨난 시민들의 불안을 K방역, 통제 전략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물론 백신을 접종하면 질병의 객관적인 위험이 대폭 낮아진다. 하지만 그 전부터 위험 인식 체계를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왔어야지 갑자기 ‘백신 맞았으니까 높은 층에서 뛰어내려’ 하면 단번에 될 리가 없지 않나. 더 늦기 전에 위험 인식 체계라는 볼륨을 반대 방향으로 조금씩 돌려 낮춰야 한다.

또 하나, 그사이 코로나19 위험 이외에 사회의 다른 위험은 과소평가됐다. 감염병 재난의 피해를 살필 때 발생률이나 사망률 같은 의료적 지표만 있는 게 아니다. 자영업자들의 생존, 어린이들의 학습권, 젊은이들의 문화생활, 어르신들의 복지 등은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니까. 매일매일 생중계되는 확진자 수에 시선이 과도하게 쏠려 있었다. 언론에서 주로 마이크를 잡는 건 의료계 전문가들이었고. 다른 사회적 피해는 의제와 담론에서 밀려났다. 위드 코로나는 이걸 되돌리자는 얘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사람 몸속에 있는 바이러스만 봤다면 이제는 사람을 보자.

감염병 재난의 피해를 살필 때 의료적 지표만 있는 게 아니다. 자영업자들의 생존, 학습권 등은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위는 지난해 3월 한 대학의 캠퍼스. ⓒ시사IN 이명익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면 이번에도 모른다고 할 건가?

그렇다. 모른다(웃음). 확진자가 증가할 가능성이 높지만 줄어들 수도 있다. 만약 늘어난다면 외국 사례를 봐서는 껑충 뛸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 시나리오를 폭넓게 대비하려면 K방역처럼 고비용 전략은 안 된다는 점이다. 효율화·최적화를 해야 한다. 무조건 많이 검사하고, 많이 역학조사하고, 많은 확진자를 격리시키는 방식에서 벗어나 정말 효과가 있는 것들을 추려야 한다.

백신이 없던 2020년은 전반전, 백신이 개발되고 접종률을 높여온 2021년은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반전을 마치면 경기가 끝날 거라고 기대한다. 허탈하겠지만, 아니다. ‘위드 코로나’라는 연장전이 남아 있다. 코로나와 공존하는 길을 찾아가는 데에 또다시 시간이 걸릴 거다.

연장전은 어떻게 치러야 할까?

우선 인정해야 한다. 한국은 위드 코로나 준비에 늦었다는 것을. 요즘 혼란이 커지면서 조금씩 성찰이 일고 있다. 오류를 빨리 찾고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삶은 단판 승부가 아니다. 서로 원망하고 비난하고 있으면 경기를 또 망치게 된다. 시민은 시민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밀려 있는 과제들을 성실히 해나가야 한다. 올해 초에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다.’ 역시 비웃음을 살지 모르겠지만, 참 많이 공감이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 확진자 몇 명이 나왔고 사망자 몇 명 생겼다 같은 결과가 그 사회의 유산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정이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힘으로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재난을 만났을 때,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이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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