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윤태호 전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방역총괄반장(사진)을 만났다. 많은 국민에게 이름보다 얼굴이 더 친숙한 인물이다. 지난해 1월27일 감염병 위기 단계가 ‘경계’로 상향되며 보건복지부에 중수본이 구성된 이후 올해 6월까지 오전 11시 브리핑을 맡았다. 본래는 예방의학을 전공하고 건강 불평등을 연구하는 소장 학자였다. 2018년 3월 개방직인 보건복지부 공공보건정책관에 임용되며 공직 사회에 발을 디뎠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방역총괄반장을 겸임하게 됐다. 지난 6월30일 3년3개월 임기를 마치고 부산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로 돌아왔다.

그는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재난기에 방역 당국이 걸어온 길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일종의 ‘방역 블랙박스’와도 같다. ‘한국 정부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나?’라는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K방역은 지난해 ‘코로나19 성공 공식’이라 불릴 만큼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지만 2021년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 회복)’로 가는 길목에서 난맥상을 겪고 있다. 그의 대답은 우리가 지금 딛고 서 있는 성과와 한계에 도달한 경로를 이해하는 단서이다. 윤 교수는 1년6개월간 씨름한 팬데믹에 대해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효과적이고 표준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말했다. 9월23일 부산대 의대 연구실에서 180분간 인터뷰했다.

(노란 민방위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 낯설다. 그 옷은 어디에 있나?

임기 마치며 벗어놓고 왔다. 정부 자산이니까.

중수본 방역총괄반장 시절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됐나?

매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말씀드리면 보통 오전 7시30분 전에 출근한다. 8시30분부터 국무총리 주관 중대본(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1시간 정도 한다. 그 뒤 잠깐 중수본 반장 회의를 하고 11시에 브리핑을 시작했다. 브리핑을 마치면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원래 업무인 공공보건정책관 일을 본다. 오후 4시부터는 보통 보건복지부 장관과 질병관리청장이 참석하는 중수본·방대본(중앙방역대책본부) 합동 회의를 한다.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하고 조치를 취할 부분은 역할 분담을 한다. 예전에는 2시간씩 했는데 너무 길어서 1시간으로 줄였다. 그럼 오후 6시가 된다. 저녁을 먹고···.

또 도시락?

가끔 식당도 가지만 대부분은 도시락. 저녁에는 중수본 업무를 처리한다. 지자체(서울시·경기도 등 지방정부)와 중앙부처, 생활방역위원회 같은 전문가 위원회가 주로 밤에 열린다. 여러 회의를 마치고 정리하면 밤 10시쯤이다. 보통 10시에 퇴근한다. 별일 있으면 새벽까지 일하기도 하고.

회의가 굉장히 많다.

중수본의 기본 역할은 방대본이 방역 업무에 집중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방대본과의 가교 역할이 방역총괄반장의 일상적인 업무다. 지난해 유행 초기에는 대통령 주재 회의나 중대본 회의에서 방역 전략을 수립하는 비중이 컸다. 중수본 방역총괄반에서 다 하는 건 아니고 파트별로 분담을 한다. 역학조사·진단검사는 방대본, 사회적 거리두기는 중수본 사회전략반, 병상 대응은 또 다른 부서에서 자료를 준비한다. 방역총괄반이 종합해 회의 보고서를 만든다.

지난해 초 방역 전략은 어떤 방향으로 정해졌나?

방역 전략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차단 전략(Containment)’, 다른 하나는 ‘피해 최소화 전략(Mitigation)’. ‘차단 전략’은 감염병이 지역사회에 확산되지 못하도록 전파를 계속 막는 것이다. 검사와 역학조사가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극단적으로 이뤄지면 중국처럼 한다. 록다운(도시 폐쇄)도 아주 강력한 차단 전략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피해 최소화 전략’은 감염 발생 자체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때 중증 진행과 사망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독감이 대표적이다. 처음부터 정부의 공식 입장은 차단 전략이었다. 초반에는 메르스처럼 전형적인 차단 전략으로 갈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메르스와 달리 무증상 감염이 되고 증상 초기에 전파가 활발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완전 차단은 어렵다고 판단을 곧 수정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지속적 억제 전략’이다.

권덕철 복지부 장관(가운데) 등 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 관계자들. ⓒ시사IN 조남진

‘지속적 억제 전략’은 차단 전략과 피해 최소화 전략 사이에 있는 것인가?

차단 전략에 좀 더 가깝다. ‘발생 자체를 막지는 못하지만 확진자 수를 억제하자’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영국도 지속적 억제 전략이었다. 환자 수를 떨어뜨리려고 계속 노력했는데 먹혀들지 않았다. 지금은 백신을 맞고 피해 최소화 전략으로 가고 있다. 한국은 비교적 강한 ‘지속적 억제 전략’을 써왔다. 그것이 우리의 방역 기조였다. 대신 3차 유행이나 지금 4차 유행처럼 큰 유행이 오면 일부 ‘피해 최소화 전략’이 결합되는 형태로 간다는 구상이 있었다. 보완책으로 마련한 것인데 사실 지금까지 시도한 바는 없다. 지난해 2월 말~3월쯤에 이런 전략이 수립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위중증 환자·사망자 축소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정부는 왜 피해 최소화 전략을 택할 수 없었나?

피해 최소화 전략은 방역을 포기하고 환자가 발생하는 대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이 감염병의 치명률이 아주 낮지도 않은데 ‘피해 최소화’를 하는 것은 도저히 정부 정책으로 수용할 수 없었다.

첫 전략을 수립하던 지난해 2~3월은 대구 중심의 1차 유행을 막 수습하던 시기다. 앞으로 유행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나?

지난해에는 최대 하루 1000명까지 확진자가 나올 수 있다고 봤다. 1차 유행, 5월 이태원발 유행을 넘기고 6월쯤에 전략을 정비하면서 1000명 수준을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에 맞춰 병상 등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내부 전략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청와대에도 보고됐다. 외부에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았다.

당시로서는 예상 범위가 꽤 넓었던 셈인데 정부가 1000명까지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나?

당시로서 1000명은 극단적인 시나리오였다. 우리가 지속적 억제 전략을 하고 있으니 1000명까지 갈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고 봤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굳이 적극적으로 알리기보다는 내부적으로 준비는 하되 국민께는 안심이나 안도감을 드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지난겨울 3차 유행 때 막상 하루 1000명대 확진자가 생기니까 잘 대처가 되지 않았다.

1000명을 내다보기는 했지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렇게 확진자가 늘겠느냐’는 생각도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1000명 상황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준비 태세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병상 관련 플랜은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의료기관을 움직여서 병상을 확보하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일주일 정도 지연됐다.

공공병원 중심으로 마련했던 병상이 부족해 민간병원을 동원했는데 그 과정이 원활하지는 못했다.

중환자를 받을 수 있는 상급종합병원은 주로 민간병원이다. 각 병원에 코로나19 중환자를 받을 수 있는 병상을 신고하도록 했다. 예컨대 의료기관에서 ‘우리에겐 병상 10개가 있다’라고 신고하면 중수본에서 전화로 다시 확인한다. 그런데 유행이 터지고 보니 신고 병상 가운데 3분의 2 정도만 사용 가능했고 나머지는 쓸 수 없었다. 어떤 의료기관은 20개 이상 병상을 신고했는데 실제 가용 병상은 0개였다. 결국 지난해 12월 상급종합병원에 전체 허가 병상의 1%를 코로나19 중환자 병상으로 확보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려 고비를 넘겼다.

퇴임을 앞두고 기자간담회에서, 그 당시를 “2주 동안 고생해 병상을 마련했다.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을 갈아 넣어서 일하던 시기”라고 말했다.

갖춰놓은 시스템으로 병상 확보가 안 되니까 병원장들 만나서 읍소하고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1% 병상을 확보하라는 행정명령이 나갔지만 공문은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다. 병원에서도 수용해야 상황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결국 여러 병원 협의체와 회의를 거듭하면서 병원마다 개별적으로 병상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행정명령을 내려 일괄적으로 병상을 확보하고 대신 보상을 충분히 하자는 쪽으로 정리가 됐다.

국내 의료자원 준비가 미흡했다는 지적이 코로나19 유행 내내 계속된다. 확진자가 수만 명 나오는 해외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1000명, 2000명 규모에도 병상 확보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의료체계가 위태로워진다.

외국의 코로나19 대응과 우리의 코로나19 대응은 결이 매우 다르다. 영국은 신규 확진자가 3만명 정도인데 입원 환자는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많다. 백신을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외국은 재택 치료가 기본이다. 영국은 코로나19 확진자의 95%가 집에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 미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봄 1차 유행 때는 영국도 병원 입원율이 30~40% 정도 됐지만 그럼에도 재택 치료가 더 많았다.

왜 그런가?

일단 확진자가 워낙 큰 규모로 발생해서 병상을 탈탈 털어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1차 유행을 겪어보니 코로나19가 치명률이 아주 높은 질환은 아니었던 것이다. 젊은 사람들, 기저질환이 없는 사람들은 굳이 치료를 하지 않아도 낫는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우리나라는 대구 유행을 겪으면서 외국보다 조금 더 빠르게 그 사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무증상·경증 환자들이 입소하는 생활치료센터가 일찌감치 만들어질 수 있었다.

외국에는 생활치료센터 같은 곳이 없나?

우리처럼 하는 곳은 거의 없다. 싱가포르 정도가 유사한 형태를 운영한다. 처음 생활치료센터를 도입할 때는 우리도 고민이 컸다. 코로나19는 1급 감염병이라 (감염병예방법상으로는)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해야 한다. 그 조항이 있는데 생활치료센터처럼 대안적인 시설을 만드는 게 정부 입장에서는 참 결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총리가 대구에 직접 갔는데도 늘어나는 환자 수에 맞춰 병상을 마련하긴 어려웠다. 특별한 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낫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런 의미에서 중간지대를 만들자는 의견이 전문가·중수본·방대본 회의를 하면서 계속 나왔다. 박능후 장관(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쪽으로 가자고 방향을 잡았다. 우리나라도 재택 치료 개념을 초기에 생각하기는 했다.

8월20일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의자에 적힌 사회적 거리두기 안내 표시. ⓒ연합뉴스

재택 치료로 가지 않은 이유는?

대구에서 집에 계시다 사망하는 분들이 나오면서 ‘방치했다’는 인식이 형성됐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재택 치료를 수용하기란 상당히 힘들었다. 우리나라는 방역이 국가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전반적인 코로나19 대응이 모두 국가의 품안에 들어와 있다. 국민들도 국가 방역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재택 치료를 하면 여기에 공백이 생기고 국가가 책임을 저버려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확대 해석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언젠가는 재택 치료가 기본이 돼야 한다고 봤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에 상당히 민감하게 대응한다. 좋게 말하면 아주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국가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원을 매우 소진하는 국가다. 생활치료센터는 시설뿐만 아니라 행정 지원, 의료, 간호 등등 엄청난 인력이 투입된다. 앞으로 백신접종률이 높아지면 전면적인 재택 치료로 가야 한다. ‘위드 코로나’로 가는 상징적인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재택 치료가 자리를 잡으면서 생활치료센터가 문을 닫는 장면일 것이다.

좀 더 빨리 이 전환을 준비할 수는 없었을까?

2월에 백신접종을 시작할 때 내부 계획이 있었다. 접종률이 올라가는데 대응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투입되는 자원을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처럼 집중적인 대응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응 방식, 일상생활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런 전환의 전제 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접종 완료 최소 70% 이상’, 두 번째는 ‘위협적인 변이 바이러스가 출현하지 않아야 한다’. 그때는 하반기로 넘어가면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봤다. 그런데 이런 예상을 깬 것이 변이 바이러스이다. 전환 준비는 안정적인 시기에 해야 한다. 위기 국면에서 전환을 하면 ‘정부 역량이 낮아서 결국 이렇게 간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지금까지는 그 포인트를 잘 잡지 못했다.

3차 유행이 끝나고 올해 상반기에는 확진자 수가 나름 안정적으로 관리됐다.

300~400명대 확진자가 계속 나왔다. 3차 유행 여파가 잦아들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 정도면 많다고 판단했나? 외국처럼 확진자 수만 명이 발생하는 경우는 정부 시나리오에 없었나?

그것은 상정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으로 간다는 건 결국 방역의 실패이니까. 거의 방치하는 수준이니까.

정부는 무엇을 근거로 유행을 전망해왔나?

중수본에서는 7개 기관의 시뮬레이션을 받아본다. 방대본에서도 시뮬레이션을 하고, 국가수리과학연구소 같은 국가기관, 개인 전문가, 대학 연구팀도 있다. 각각 시뮬레이션 모델이 다르다. 종합해서 예측에 참고한다. (해당 시점으로부터) 1~2주까지를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그 이상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경제 부처의 경우, 정확하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이후 상황을 예측하고 이에 맞춰 정책을 만드는데 코로나19는 왜 그런 예측을 못하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뼈아픈 비판이지만 코로나19 상황은 예측을 못하겠더라.

지난해 봄에 미국·유럽 대유행을 보면서 ‘백신 없이 마치기는 힘들겠구나, 코로나19 상황이 오래가겠구나’ 판단했다. 그런데 방역을 하는 처지에서는 오래간다는 전망보다 앞으로 한 달 후에 확진자가 몇 명 발생하고, 어느 시점에 유행이 올지를 내다보는 게 중요하다. 그 예측은 정말 어렵다.

3차 유행 때 하루에 확진자가 수만 명 나올 수 있다고 하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점에 하루 확진자가 1000명이 될지, 5000명이 될지, 1만명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해 만 명대에 맞춰 의료 병상을 만든다고 하면 너무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소모해야 한다.

정부가 백신을 발 빠르게 확보하지는 못했다.

백신 관련 업무는 워낙 따로 움직여서 저는 잘 모른다. 중수본에도 백신 팀이 별도로 있었다. 대통령이 준비를 지시하면서 지난해 6월부터 관련 조직이 꾸려진 걸로 안다. 백신을 확보하는 데 시간이 조금 늦었던 것 같기는 하다.

국산 항체 치료제 개발에 너무 큰 기대를 걸어서 백신 확보가 늦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정치권에서 큰 기대를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수본과 방대본은 항체 치료제가 ‘게임 체인저’라거나 특효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행 초기에 혈장 치료제가 기대를 모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항체 치료제와 혈장 치료제는 메커니즘이 거의 비슷하다. 중증환자 치료가 중요한데 항체 치료제는 경증에서 중증으로 가는 걸 막아주는 데 제한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1시간30분 동안) 정맥주사를 맞아야 한다. 경구약이 아니라서 타미플루처럼 획기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지난해 4월, 대구시 중구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방호복 입은 의료진이 교대근무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지난 7월을 앞두고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가 예정되었다가 4차 유행으로 정반대 상황이 됐다. 당시 정부 구상은 무엇이었나?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얘기는 6월에 처음 나온 게 아니다. 올해 초부터 자영업자와 경제 부처에서 완화 요구가 줄곧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개편안 공청회도 가졌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추세를 보면, 3차 유행 정점은 지나갔지만 하루 300~400명대의 확진자 수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를 바로 시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위험 집단인 고령층의 면역이 형성되는 시점을 6월 말로 예상했다. 그때가 되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풀더라도 의료 대응에 큰 피해가 가지는 않을 거라고 봤다. (거리두기 완화) 적용 시점을 둘러싸고 더 빨리 갈 수도 있었는데 (7월로) 상당 부분 지연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낮추면 확진자 수가 늘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7월에 도입된 사회적 거리두기 개편안은 최고 단계인 4단계 기준을 2000명으로 잡았다. 의료 대응 여력도 2000명에 맞춰 마련했다. 이전 거리두기 단계는 최고 단계(3단계) 기준이 1000명이었다. 다만 이렇게 큰 유행은 내다보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택한 ‘지속적 억제 전략’이 확진자 수를 낮은 수준에서 관리하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피해를 불러온 측면도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실상 백신접종에 대한 대체재이다. 백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전파를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대체효과라기보다는 중첩되는 대체효과라고 할 수 있다. 백신접종이 많이 이루어지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예전보다 완화한다고 해도 그 부족분을 메워나갈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어떻게 정해지나?

중수본과 방대본이 논의를 통해 초안을 마련한다. 워낙 파급력이 크다 보니 초안을 만들 때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각 부처 의견도 수렴한다. 예를 들어 문화체육관광부는 다중이용시설 중에서 실내 체육시설, 프로 스포츠, 종교 시설 쪽을 관장하니까 그 분야 종사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지자체 의견도 다 듣는다. 그런 다음 생활방역위원회에서 조언을 받는다. 그래도 불만이 모두 해소되지는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쟁점은 총리실에서 관계 부처 장관 회의를 소집해 논의를 한다. 최종 결정은 (국무총리가 본부장인) 중대본이 한다. 중대본은 결정 기구라 설왕설래가 있더라도 길게 하지 않는다.

부처 간에 의견이 종종 엇갈렸을 것 같다. 경제 부처는 거리두기 강화를 꺼리지 않았나?

각 부처의 기반이 다르니까 한목소리만 나올 수는 없다. 기획재정부 같은 경우는 손실보상 부담이 크기 때문에 방역 조치를 좀 약하게 가자는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확진자가 무한정 늘어나게 두자는 취지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정부 내에 ‘방역이 중심이 돼야 한다’라는 데에 공감대가 있었다. 예컨대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하는 기준을) 방역 당국이 1000명이라고 보면 기재부는 2000명,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수준은 좀 달랐다.

방역총괄반장으로 일하며 제일 까다로웠던 부분은 무엇인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모토가 ‘일상과 방역의 조화’였다. 이 모토가 모든 정책을 관통했다. 일상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방역 성과를 거두는 게 어찌 보면 모순이다. 그걸 현실에서 구현하며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특히 방역 현장에서 인력들이 지쳐 떨어지고, 못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자살 같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니까 과연 이것이 현장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전략이 맞는지 어떨 때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데 지휘소에 있는 사람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 않나. 그런 부분이 제일 힘들었다.

‘이건 잘했다’ 하는 장면이나 정책은?

지난해 대구 1차 유행 때 K방역의 기틀이 대부분 마련됐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대규모 검사다. 검사 역량은 어느 정도 갖춰졌는데 검체 채취 단계에서 병목현상이 생겼다. 당시 ‘드라이브 스루’를 도입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나중에 개방된 곳에서 검사를 하는 방식(선별진료소)으로 이어졌다. 생활치료센터도 1차 유행 대응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골격을 기본으로 2차, 3차, 4차 유행을 지나왔다.

다시 돌아가면 달리 결정할 부분도 있을까?

정신병원이나 장애인 시설, 요양병원처럼 취약계층에 대한 방역은 일반 인구집단보다 더 섬세하고 더 많은 투입이 필요하다. 요양병원 같은 경우 치매·와상 환자가 많아 돌봄 인력이 따라붙어야 한다. 병원은 치료 인력은 있어도 돌봄 인력이 부족해서 이런 분들을 받기 상당히 꺼려 한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3차 유행을 맞았다. 환자를 빨리 빼내지 못하고 코호트 격리를 하면서 그 안에서 다시 감염이 일어났다. 3차 유행을 거치며 중수본에 (요양병원) 전담반이 꾸려지고 이분들을 이송할 병상 확보를 전적으로 맡게 됐다. 좀 더 일찍 중앙정부가 전담반을 만들어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기자명 양산·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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