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넘어 장편 데뷔작을 찍은 아들. 1년에 한 편씩 내리 두 편 더 찍고 나니 사람들이 그 세 편을 묶어 ‘꽃 3부작’이라고 불러주었다. 세 편 모두 제목에 ‘꽃’이나 ‘플라워’가 들어가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영화제에 자꾸 불려가는 걸 보면 영화를 영 못 만든 것 같진 않은데, 극장에 가서 봐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 눈치였다. 아들의 영화 제목에는 매번 꽃이 피는데, 그걸 만든 아들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나지 않았다.

보탬이 될까 싶어 엄마가 거리로 나섰다. 영화 홍보 엽서를 직접 만들어 길 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사이 새 영화 찍겠다며 여기저기 돌아다닌 아들.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와 하소연을 한다. “마음을 다해서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데 잘 안돼요. 너무 힘들어요.” 아들을 토닥이며 엄마는 돈을 내밀었다. 중도 해약한 보험금 2500만원에 엄마의 작은 바람을 얹어 함께 내밀었다. “엄마가 친구들이랑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줄래? 엄마 세대들이 보기에 좋을 영화 좀 찍어봐줄 수 있겠냐?”

다시 힘을 낸 아들. 영화를 구상하며 강원도 태백을 어슬렁거리던 어느 밤. 어둑한 골목길 모퉁이에 멈춰 섰다. 화려한 번화가 뒤편 좁은 골목길엔 작은 조명 하나 어슴푸레 걸려 있었다. 그때 문득, 그 조명 아래서 누군가 전단지 붙이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있고, 전단지를 붙이는데 표정은 왠지 행복해 보이는” 그런 상상. 엄마가 나를 위해 거리에서 엽서를 나누어주었듯, 어쩌면 그 사람도 자식을 위해 전단지를 붙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시린 겨울 밤새도록 전단지 붙이는 엄마

영화 〈바람의 언덕〉은 영분(정은경)이라는 여성이 긴 세월 떠돌다 돌아온 고향 태백의 담벼락마다 전단지를 붙이는 이야기다. 오래전 헤어진 딸 한희(장선)를 찾아가지만 차마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해 그냥 ‘회원님’으로 불리게 된 엄마. 딸이 운영하는 필라테스 학원 전단지를 몰래 품에 안고 나와서 시린 겨울 밤새도록 붙이고 다니는 엄마.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마음이, 그 손길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저마다 작은 바람(wish) 하나씩 품고 삶의 세찬 바람(wind)을 버텨내는 영화 속 인물들이 오래도록 관객 마음을 서성인다.

아쉽게도 감독은 어머니의 바람을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엄마 세대들이 보기에 좋을 영화’를 선물하지 못한 것이다. 만들고 보니 ‘모든 세대가 보기에 좋은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혼자가 아냐. 방향을 잃고 헤맬 때, 내 이름을 크게 불러줄 너를 믿어.” 배우들이 직접 부른 엔딩곡 ‘항해’의 가사에 기대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보아도 좋을 영화.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 이른바 ‘꽃 3부작’을 만든 박석영 감독의 네 번째 영화는, 처음으로 영화 제목에 꽃이 피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영화가 닿는 마음마다 꽃이 피어난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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