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우리의 계절은 여름과 겨울뿐이었다. 한국 축구가 사상 첫 월드컵 4강에 오른 여름, 그리고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겨울. 두 사건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해 봄과 가을은 기억조차 희미한 계절로 남았다. 하지만 한국의 어떤 이들에겐 2002년의 봄이 가장 선명한 계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오랜 겨울을 비집고 새싹이 올라온 5월! 영화 〈미스비헤이비어〉의 주인공들에겐 1970년 11월이 그러했다.

주인공 샐리(키라 나이틀리)가 대학 면접시험을 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를 재빨리 훑어본 뒤 ‘10점 만점에 7점’이라고 노트에 적는 면접관도, 그 점수를 지우고 ‘9점’을 써 넣으며 실실 웃는 면접관도, 모두 남자다. ‘학교에 다니겠다는 애 엄마를 남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 질문만 이어가다가 처음으로 받은 전공 관련 질문. “왜 영국엔 혁명이 없었죠?” 샐리가 대답한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거겠죠. 왜 우리의 혁명은 매번 실패로 끝났느냐.”

가까스로 학교에 들어간 샐리는 우연히 급진 페미니스트 조(제시 버클리)를 알게 되고 조가 이끄는 단체의 일원이 된다. 왜? “지난해 미스 월드 선발대회를 달 착륙 때보다 더 많은 시청자가 지켜보았다”라고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샐리의 어린 딸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딸이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 앞에서 포즈를 연습했기 때문이다. 남자 눈에 들고 싶어 안달하고, 남자 눈 밖에 날까 조바심 내는 여자로 키우긴 싫었다. 그딴 세상, 딸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 해프닝? 새 시대의 오프닝!

같은 마음으로 뭉친 여자들이 꾸민 일. 1970년 11월20일 미스 월드 선발대회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 언론이 하룻밤 ‘해프닝’으로 기록한 그날을 영화는 새 시대의 ‘오프닝’으로 재평가한다. 대회를 무산시키려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대회에 참가한 여성들 이야기까지 폭넓게 담아낸다. 예상했던 순간에는 통쾌함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는 뭉클함을 만들어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날 함께했던 실제 인물들이 차례로 카메라 앞에 서는 감동적인 에필로그는, ‘미스비헤이비어 (misbehavior, 잘못된 행동)’를 멈춰 세운 ‘미스 비헤이비어(behavior, 행동)’들에게 이 영화가 수여하는 왕관이다.

아, 그래서 2002년 봄, 한국에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당시 신문기사 한 토막.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지상파 중계가 30년 만에 사라진다. 다음 달 19일 열리는 제46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케이블 TV와 인터넷으로만 방영된다. 여성계는 1998년에 방송국 앞 시위를 통해 목청을 높였고 1999년부터 ‘안티 미스코리아’를 개최, 미인대회의 ‘억압성’을 꼬집어왔다.”(〈한겨레〉 2002년 4월29일)

당연해 보이던 풍경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낸 ‘미스 비헤이비어’들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오랜 싸움 끝에 그해 봄, 작은 승리 하나를 손에 넣었다. 세상은, 그렇게 바뀐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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