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눈을 뜬다. 주위를 살핀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가로막힌 공간. 낯선 룸메이트가 들려준 이야기. “48층이야. 다행히 48층은 꽤 괜찮은 층이야.”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남자는 아직 알지 못한다.

천장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방바닥도 마찬가지. 아래층 사람을 부르는 순간, 룸메이트가 소리친다. “그들에게 말 걸지 마!” “왜요?” “우리 밑에 있으니까. 위층 사람들도 대답 안 할 거야.” “왜요?” “우리 위에 있으니까.”

“여기선 뭘 먹죠?” “뻔하지. 위층 사람들이 먹다 남긴 거.” 룸메이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멍을 따라 내려오는 커다란 테이블, 일명 ‘플랫폼’. 그 위에 음식물 찌꺼기가 널려 있다. 게걸스럽게 입에 욱여넣는 룸메이트. “안 먹어?” “역겨워요.” “후회할걸.” “한 층에 두 명씩, 위로 47층이니까… 우린 94명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먹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하나 깨쳐가는 이 공간의 규칙. 첫째, 맨 꼭대기 층 ‘레벨 0’에서 호화 만찬을 처음 먹고, 남은 음식을 내려보낸다. 둘째, 중앙 통로를 따라 ‘플랫폼’이 하루 한 번, 층마다 일정 시간 멈췄다가 내려간다. 셋째, 플랫폼이 멈춰 있는 동안에만 먹을 수 있고 음식을 따로 챙겨두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넷째, 층마다 정원은 두 명이며 매달 층을 무작위로 재배정한다.

여기에 규칙 하나 더. 원하는 물건 딱 하나만 지니는 걸 허용한다. 대부분 무기가 될 물건을 고른다. 그런데 이 남자, 책을 골랐다. 소설 〈돈키호테〉를 읽으며 인간의 품위를 지키려 애쓴다. 하지만 마음의 양식은 일용할 양식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으니. 머지않아 남자도 손을 뻗는다. 94명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에.

캐릭터도 비주얼도 ‘적당히’가 없다

스페인의 공포 스릴러 〈더 플랫폼〉은 한마디로 ‘미친 영화’다. 이야기도 캐릭터도 비주얼도 ‘적당히’가 없다. 정말 대담해서 짜릿한 영화였다. 폐쇄 공간 호러의 걸작 〈큐브〉에 〈설국열차〉와 〈칠드런 오브 맨〉의 이야기를 보탠 것 같은 스토리텔링. 그렇다고 다른 영화들이 쓰다 남긴 시나리오 찌꺼기에나 손대는 영화가 아니다. 레벨 0의 최상위급 상상과 은유로 계급 불평등 문제를 한입 크게 베어 무는 영화다.

자, 가까스로 한 달을 버텨내고 다시 눈을 뜬 남자. 숫자가 보인다. 171층. 음식물 찌꺼기는 진작 동이 난 채로 계속 빈 플랫폼만 내려오는 곳. 이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 수직 감옥의 정체는 무엇일까. 빠져나갈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당신은 이제 고작 영화 시작 후 15분까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아직 1시간20분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와아…, ‘미친 영화’답게 결말도 제대로 미쳤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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