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기 게임이 한창이다. 고대하던 영화 촬영을 앞두고 다 같이 고사를 지낸 스태프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지는 감독. “여러분, 감독님 지금 쇼하시는 거예요.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웃어넘기는 사람은 프로듀서 찬실이(강말금)뿐이다. 감독은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작가주의 감독의 독립 예술영화’에서 프로듀서가 도맡는 궂은일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한눈팔지 않고 그 감독 한 사람만 보필하며 살아온 것도 패착이다. 다른 영화에서 불러주질 않는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찬실이가 유난히 추운 겨울을 맞이한 사연이다.

감독의 돌연사로 엎어진 영화 제목이 〈뒷산에 살리라〉였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정말 뒷산에 살게 된 주인공. 도시의 맨 뒷산, 변두리 산꼭대기 낡은 집 문간방으로 쫓기듯 이사 가는 찬실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탈길을 오르는 게 영화의 시작이다. “아… 망했네.” 이게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대사다.

독립 예술영화 프로듀서로 7년을 일하다 그만둔 마흔한 살 김초희는 “마음속에 꺼져가는 영화의 불씨를 지피려고” 무작정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살아온 인물”이면서 “나이 마흔이 되도록 이렇다 할 결실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한 자신의 주인공에게 빛날 찬, 열매 실, 찬실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그 이름 덕분인지, 마흔여섯 살에 직접 연출한 첫 장편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에 이어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까지, 정말 빛나는 결실을 맺었다.

찬실이가 될 운명의 배우 강말금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직장인으로 20대를 보낸 뒤 나이 서른에야 다시 연기를 시작한 주연배우 강말금을 처음 만났을 때 “저 사람은 찬실이가 될 운명이다” 하고 감독은 생각했다. 마트 시식 코너에서 일하며 연극 무대와 단편영화를 오가다가 나이 마흔에 첫 장편영화의 주인공이 된 그가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하고 당찬 대사를 입에 담을 때, 나 역시 “이 사람은 찬실이가 될 운명이었구나” 하고 수긍했다.

궁상맞은 캐릭터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찬실이는 강말금 배우 덕분에 한없이 곰살맞은 캐릭터로 영화 안에 살아 움직인다. 무심한 듯 마음 써주는 주인집 할머니 복실(윤여정)에게 의지하며, 자신을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사나이(김영민)의 응원을 받으며, 씩씩하게 자기 인생의 다음 시퀀스를 열어간다. 감독이 말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내내 겨울일 것만 같던 혹독한 계절을 지나 비로소 봄을 맞이했을 때 느껴지는 가슴 벅참! 그것이 바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관객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다(보도자료 인용).” 그 마음, 고스란히 전해졌다. 웃기다가 울리다가, 뭉클하고 가슴 벅찬 코미디 〈찬실이는 복도 많지〉 덕분에 내 마음엔 벌써 예쁜 봄꽃이 피었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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