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현실에서 상처를 받을 때면 자신이 있을 곳이 여기가 아닐지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은 아이가 현실을 잠시 버텨낼 수 있는 꿈이다. 지금은 비록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지만 분명 내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야, 생각하며 순간을 버틴다.”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은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소개하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아이들이 숨어 지낸 상상 속 아지트의 길고 긴 목록엔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도 있다. “무지개 너머(over the rainbow)” 어딘가 “걱정이 레몬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곳을 노래한 주인공 도로시와 함께 아이들이 새로운 상상을 시작했고 영화는 크게 흥행했다.

촬영 당시 주디 갈랜드는 열여섯 살. 나이도 키도 얼굴도 어중간한 배우였다. 떠오르는 열 살배기 아역 스타 셜리 템플을 캐스팅하는 데 실패한 제작자는, 아쉬운 대로 주디 갈랜드를 촬영장에 세워놓고 말했다. “너보다 예쁜 아이들은 많아. 하지만 그 애들에겐 없고 너에게만 있는 게 뭔 줄 알아? 바로 그 목소리.”(영화 〈주디〉의 한 장면)

타고난 목소리 덕분에 뮤지컬 스타가 된 도로시, 아니 주디는 곧 회사의 주력상품이 되어 쉼 없이 불려 다녔다. 회사는 각성제를 밥처럼 먹였다. 밤샘 촬영에 졸지 말라고. 그러고는 수면제를 먹였다. 얼른 자고 일어나 또 촬영하라고. 훗날 첫아이를 가졌을 땐 회사 뜻에 따라 원치 않는 낙태를 했고, 엄마가 미성년자 주디를 영화계의 힘 있는 어른들 방에 밀어넣어 수차례 성접대를 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주디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자신보다 예쁜 아이들을 목소리로 이겼지만,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은 이길 재간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 현실의 도로시에겐 마법 구두가 없었으므로 이런저런 무대를 전전하면서 어릴 적 히트곡을 부르며 살았다. ‘지금은 비록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지만 분명 내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야’ 하는 희망으로 남은 생을 버티다가 마흔일곱 살에 약물 과용으로 사망했다.

영화 〈주디〉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디(르네 젤위거)가 오른 마지막 무대 이야기다. “기억해. 얼마나 사랑하느냐보단 얼마나 사랑받느냐가 중요한 거야.”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이 대사를 나지막이 외우며 술에 취해 매일 밤무대에 오르던 실제 이야기다. 그 ‘무지개 끝에서’(원작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비틀대던 도로시는 어떤 세상에 당도했을까. 주디가 끝까지 짊어진 건 무엇이고 또 마침내 내려놓은 건 무엇일까.

각본을 쓴 작가는 말한다. “주디는 단지 ‘피해자’가 아니다. ‘생존자’다.” ‘그러했기 때문에’의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생을 절절하게 연기한 주연배우 르네 젤위거가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속 주디의 노래를 모두 라이브로 불렀다. 그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장면마다 관객 마음에 무지개가 뜬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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