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원래 미국 민주당보다 왼쪽”
  • 천관율 기자
  • 호수 177
  • 승인 2011.02.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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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연일 진보 색채를 강화해나가고 있다. ‘3+1 복지 정책’은 진보 정당 변신에 들어갔다는 상징이다. ‘빅3’도 진보 고지 선점전에 나섰다. 과연 민주당의 ‘도박’은 성공할까.
60년을 ‘오른쪽 날개’로만 날았던 새에게 ‘왼쪽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 크게 보아 건국 이후 늘 보수 양당이 경합했던 원내 구도가 18대 국회 후반부 들어 근본적 재편을 준비하고 있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이 연일 진보적 색채를 강화해나가는 모습은 일회성으로 치부할 만큼 간단치가 않다.

우리 헌정사에서 진보 정당은 원내의 한 축을 형성하기는커녕 선거 때마다 생존을 고민해야 했고, 의회를 주도했던 권위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은 사회경제 정책만은 별 차이 없는 보수색을 공유했다. 제1 야당이 진보 지향 정당으로 가는 노정에 들어섰다는 것은 그래서 일대 사건이다. 분단과 냉전, 권위주의적 산업화라는 역사적 조건이 강제했던 ‘60년 보수 독점’ 정치 구조가 유럽식 ‘진보·보수 양당제’로 전환되는 길목에 왔다는 평가가 학계와 정치권 양쪽에서 나온다.

   
 
이른바 ‘3+1 복지 정책’은 진보 정당으로 변신 단계에 들어선 민주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민주당은 이미 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의료 공공성 강화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에 대학생 반값 등록금까지를 더한 복지 패키지를 제시했다. 여기에 주거와 일자리 플랜을 추가로 내놓아 ‘5+1 패키지’를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정책만 놓고 보면 미국 민주당보다도 왼쪽으로 한참 더 간,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비견될 만한 수준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우리는 원래 미국 민주당보다는 왼쪽이었고, 지금은 더 왼쪽으로 가고 있다”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심스러워했던 말을 이제는 거침없이 하는 분위기다.

당을 대표하는 이른바 ‘빅3(손학규 대표, 정동영·정세균 최고위원)’도 진보 고지 선점전을 벌인다. 참여정부 때 중도실용을 들고 나와 당내 좌파 블록과 대립한 정동영 최고위원은 아예 부유세 신설을 주장하는 가장 급진적인 복지 정책을 내놓았고, 역시 실용주의 성향이 강했던 정세균 최고위원 또한 ‘공동체적 복지’를 주장하며 좌향 이동했다. 한때 “한나라당 물이 덜 빠진 것 아니냐”라는 의심을 샀던 손학규 대표는, 1월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사실상 비정규직 폐지론에 가까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회견문에 넣어 노동계는 물론 측근까지도 놀라게 했다. 여기에다 당내 좌파 블록을 이루던 운동권 출신 486 정치인과 친노 그룹 70여 명이 ‘진보개혁연대’라는 이름의 민주당 역사상 최대 규모 진보 조직을 만들어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지난해 10월 전당대회 때부터 민주당이 진보로 가는 징후는 뚜렷했다. 당 강령에서 ‘중도 개혁’이라는 표현을 15년 만에 삭제했고, 당헌 2조에는 아예 ‘보편적 복지’를 당의 목표로 명시했다. 전당대회에 나선 후보들은 앞다퉈 ‘좌 클릭 경쟁’을 벌였다.

집권 10년 동안 청와대와 정부에서 일한 박선숙 민주당 의원은 “두 번 집권하는 동안 청와대는 진보 정권이었다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강할 때 어떻게든 복지국가로 가는 레일을 깐 덕에, 지금 이명박 정부가 ‘역대 최대 복지 예산’이라고 생색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은 진보 정당은 아니었고, 열린우리당은 일부 그런 성격이 있었으나 확고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최고 권력자와 집권 세력의 의지를 실현하는 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청와대는 어쨌거나 진보 성향을 드러냈던 반면, 선거를 치러야 했던 당은 여전히 보수 독점의 여론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의미다. 박 의원은 “지금은 청와대가 아니라,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당이 진보색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가 또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라고 평가했다. 본격적인 진보·보수 양당제의 서막이 올랐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인영 최고위원 “혁명 국면에 진입했다”

민주당이 왜 이렇게 자신 있게 몰아칠까. 유권자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판단이 바닥에 깔려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년 넘게 몰아친 양극화의 압력이 쌓이고 쌓여 폭발 단계에 들어섰으며, 여기에 제대로 된 답을 만들어내는 세력이 다음 정권을 잡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민주당에 있다. 당내 좌파 블록의 대표선수 격으로 지도부에 입성한 이인영 최고위원은 “일종의 혁명 국면에 진입했다”라고까지 표현했다. “1987년 6월항쟁은 짧게 봐도 전두환 정권 7년간 억눌려온 민주화 욕구가 한번에 터진 사건이었다. 이런 폭발 국면에서는 대중의 생각이 한두 달 만으로도 확 바뀐다. 지금이 꼭 그렇다. 나는 복지에 대한 대중의 사고틀이 완전히 바뀌는 복지 혁명 국면에 들어왔다고 본다.”

헌정사 내내 진보·개혁 진영을 억눌러온 냉전·반공 이데올로기의 ‘약발’이 예전 같지 않아서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우 민주당 수석사무부총장은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이 2010년 한 해에 일어났다. 이전 같으면 우리는 전멸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천안함 후폭풍을 뚫고 지방선거를 이겼고, 연평도 포격 이후에도 우리가 내놓은 복지 이슈가 공론장을 주도했다. 이건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 보는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보수 독점 민주주의로 규정하며, 그 원인을 냉전·반공 이데올로기와 권위주의적 산업화 과정에서 찾았다. 이른바 60년 보수 독점 구조를 만든 출발점인 냉전·반공 이데올로기의 위력이 약해지면서, 민주당으로서도 진보 깃발을 드는 데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학계에서도 진보·보수 양당제의 출현 가능성을 논한다. 정치 전문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정당 이론에서 정당의 개수는 ‘그 사회의 갈등축+1개’로 본다. 즉, 갈등축이 하나면 양당제가, 갈등축이 두 개 이상이면 다당제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상충하는 이해관계 개수만큼 그를 대변하는 정당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갈등축은 갈수록 분배 문제 하나로 모이고 있다. 기존 진보 정당에는 안된 얘기지만, 장기적으로 한국 정치의 골격은 다당제보다는 양당제로 갈 가능성이 높다”라고 전망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급격한 좌 클릭 바람이 민주당에 몰아치고는 있지만, ‘한철 장사’ 아니냐는 목소리는 좌우 모두에서 나온다. 한나라당이 말하는 ‘복지 포퓰리즘’이나 기존 진보 정당이 말하는 “방향은 맞지만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라는 평가는 표현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민주당은 좀 저러다 마는 정당’이라는 인식을 좌우 모두 공유한다.

진보화, 핵심 지지 기반 없으면 어려워

근거 없는 야유가 아니다. 민주당이 보여주는 ‘좌 클릭 바람’은 ‘진보 정당으로의 체질 전환’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민주당의 노선 전환은 정당의 성격 규정에 필수적인 핵심 지지 기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현재로서는 정치 엘리트들의 강령·구호·정책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다. 핵심 지지 기반이 공고하지 않으면 쉽사리 후퇴해 ‘진정성이 없다’는 평가를 듣거나, 시류 영합으로 흘러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그만큼 쉽다. 흔들리지 않는 핵심 지지 기반 구축은 그래서 중요하다. 민주당은 그동안 이 대목에서 좌우 경쟁자들에 비해 유난히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시사IN 안희태
2010년 10월 민주당 전당대회는 민주당에 본격적인 진보 색을 입힌 출발점이다. 그것이 일시적 흐름일지 장기적 추세일지는 다음 전당대회에 달렸다.
여기에서 근본 딜레마가 나온다. 사민당과 같은 유럽식 진보 정당은 하나같이 노동운동의 상승기에 그 흐름을 타고 만들어진, 조직된 노동자에 뿌리를 둔 정당이었다. 이와 관련해 손학규 대표의 후원회장을 맡은 최장집 교수는 손 대표에게 “노동계 인사들을 만나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손 대표 역시 신년 기자회견에서 노동 문제에 의욕을 보이는 등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노동운동이 절정기일 때에는 권위주의 정치 구조가 잔존하고 노동 조직률이 내리막길을 걸을 때에야 절차적 민주화가 안착되는, 서구와는 다른 ‘엇박자’가 발생했다. 민주당이 진보 정당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현재 노조 조직률은 고작 10%이다. 집권 가능한 진보 정당이 탄생하는 역사적 경로 자체가 달라져버린 것이다.

여론조사 전문가 출신으로 손학규 대표가 영입한 민주당 전략기획위원회 이철희 부위원장은 이 딜레마를 거론하며 “그래서 복지 정치가 복지 정책보다 먼저다”라고 말했다. 무슨 의미일까. “복지 제도에서 이익을 얻는 지지 블록을 다수파로 구축하는 것이 예산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보다 먼저다. 이를테면 친환경 무상급식은 학부모 외에도 유기농 농산물을 다루는 농민과 유통업자를 지지 블록으로 묶어낸다. 의료에서도 보육에서도 이런 ‘이익을 얻는’ 블록을 형성해 다수 연합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지금 우리는 노동자의 90%와 중소 자영업자 전체가 조직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복지를 매개로 해서, 이 층을 지지 블록으로 묶어내자는 거다. 이 지지 블록의 힘을 업고 국가 재정을 재구성해야 한다. 현재 재정 구조 내에서만 하자는 것도, 섣불리 증세부터 하자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서구 진보 정당이 의지했던 조직된 노동이라는 지지 기반이 없는 지금, 그 빈자리를 복지 블록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이 부위원장은 “어떤 경우에도 한나라당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것은 오랜 시간 이익을 공유하며 형성된 지지 블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안함과 연평도에 동반 침몰하지 않은 것 역시, 지난 10년 집권 동안 평화에서 이익을 얻는 ‘평화 블록’이 생겼기 때문이다”라며 지지 블록 형성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는 사실상 ‘복지 전선’으로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를 대체하자는 구상이다. 흔히 말하는 정계 개편보다도 한 단위가 더 큰, 정치의 핵심 갈등 구조를 개편하자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 두드러진 갈등축인 ‘지역 구도’에서 이익을 얻는 세력의 반발은 사실상 필연이다. 민주당에서는 호남에 뿌리를 둔 정치인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다.

민주당이 이른바 ‘3+1 복지 패키지’를 내놓은 직후, 언론은 민주당 당내에서 벌어진 ‘재정 조달 방안 논란’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특히 보수 언론에서는 관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교한 재정 조달 방안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를 두고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 당에서는 사실상 ‘관료=호남’ 등식이 성립한다. 언론이 거론한 반대파 면면도 거의 호남이다. 관료 출신들을 국회로 들일 때 가장 ‘손쉬운 경로’가 호남에 공천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용 조달 방안을 둘러싼 기술적 논쟁처럼 보이지만, 실은 ‘호남 기반 지역정당 전략’ 대 ‘복지 기반 진보 정당 전략’이 부딪치는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다.”

호남당이냐 진보 정당이냐 갈림길에 서다

민주당을 진보 정당으로 ‘체질 전환’하기를 시도하는 세력은 하나의 역설을 뛰어넘어야 한다. 호남 유권자는 전국 단위 선거에서 가장 진보적 성향의 투표를 하지만, 정작 이들을 대표하는 호남 정치 엘리트는 민주당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축에 속한다는 역설이 그것이다(제166호 〈시사IN〉 기사 참조).

이인영 최고위원은 “손학규 대표 사퇴 후, 올해 연말이나 내년 초쯤 벌어질 전당대회가 무척 재미있을 거다”라고 말했다. “2012년 총선 공천권이 걸린 이 전당대회는 민주당의 노선을 둘러싼 대회전이 될 것이다. 1970년 대선 후보로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이 맞붙은 전당대회 이후 지금까지 DJ의 자장에 있었던 민주당이, 이제 40년 만에 다음 단계로 나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핵심 당직자 역시 “결국 ‘호남당’이냐 ‘진보적 정당’이냐가 화두다. 공천이 걸려 물러설 수도 없다. 다음 전당대회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난리가 날 거다”라고 거들었다.

중앙 권력 장악을 포기한 채 남부 지역당에 만족하던 미국 민주당은,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들고 나온 ‘뉴딜·남부 동맹’에 힘입어 공화당 지배를 청산하고, 40년 민주당 시대를 열었다. 정치 세력이 전선 자체를 바꿔내며 ‘새로운 다수’를 형성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복지를 무기로 민주당을 바꾸고, 나아가 한국 정치를 진보·보수 양당제로 재구성하려는 이들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호남 동맹’이라고 불러도 좋을 ‘새로운 다수’를 만들어낼 야무진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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