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 연휴, 미국에서 고등학교 은사님이 메일을 한 통 보내왔다. 한국에 있는 어느 뮤지션의 연락처를 알아봐달라는 내용이었다. 알아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무엇 때문일까. 그에게 자신이 만들고 있는 문집에 실을 글을 청탁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진 긴 글에 그 이유가 담겨 있었다. 은사님의 친구는 지난해 10월29일 이태원에서 딸을 잃었다.
‘그날’ 이후 매주 토요일 오전,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주말 일정을 물어보는 것이 선생님에게도 주요한 주말 일정이 되었다.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친구 딸의 생일에는 다른 친구들과 마음을 모아 ‘청년문간’에 하루치 밥값을 기부했다. 청년문간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청년들에게 저렴한 한 끼를 제공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이다. 그렇게 ‘친구 딸의 생일상’을 차렸다.
첫 기일에는 편지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친구가 글을 모으고 본인이 편집하고 다른 친구가 교정을 봐주는 식이다. 친구의 딸이 생전 좋아했던 뮤지션의 앨범을 만든 제작자에게 앨범 사진을 문집에 써도 괜찮으냐고 문의하는 일도 선생님의 몫이었다. 고인과 동명의 뮤지션에게 글을 부탁하고 싶은데 최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나에게까지 연락이 닿았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달했다. 답장으로 문집에 실릴 글 일부를 전해 받았다. 고인의 친구가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두 사람의 인연을 회상한 글이었다. ㅎㅎ와 ㅋㅋ가 섞인, 무겁지 않고 발랄한 문장이었다. ‘엄청난 문장집은 아니고 작은 기억을 공유하며 아픔을 견디고 치료하는 과정’이라고 했지만 읽어 내려가다 보니 ‘엄청난 문장’이었다. 둘만 아는 기억을 누군가와 공유함으로써 고인의 생전 삶이 죽음 이후에도 확장되고 있었다. 애도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참사 당시의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 구조자들의 1년을 복기하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여기에 ‘어떤 근황’을 하나 더 보탠다. 희생자와 유가족의 지인에 관한 근황이자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문집은 매년 발행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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