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사당은 1948년 제헌국회가 열린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여러 장소로 옮겨다니던 국회는 1975년 지금의 자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에 안착했다. 총공사비 135억원, 시멘트 64만 부대, 벽돌 850만 장, 연인원 100만명이 투입된 큰 공사 끝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물이자 대표적인 현대 건축물로 거듭났다. 국회의사당은 올해로 딱 쉰 살이 되었다.2024년 12월3일 밤, 국회의사당에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1980년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전국
“됐어요, 당장 나가세요.” 아직 바람이 차갑던 봄날이었다. 고독사를 취재하러 갔다가 들른 부동산이었다. 공인중개사에게 명함을 내밀자마자 문전박대를 당했다. 여기뿐일까. “아이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다른 기자들 다 왔다 갔어.” 어느 찌는 여름날, 사망사건을 취재하러 대구에 갔다가 만난 세탁소 사장님이 했던 말이다. 각기 다른 사고로 몇 차례 빈소를 방문하고 현장을 떠돌면서 생각했다. 아, 이토록 환대받지 못하는 직업이라니.더군다나 주간지 기자다. 취재하다 보면 때를 놓친 것만 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마감은 매주 수요일. 이
얼마 전 노란봉투법에 대해 기사를 썼다. 법의 취지대로 하청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자원이 배분되려면, 원청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다소 논쟁적인 내용이었다. 예컨대 정규직 노동자 임금과 성과급의 ‘최대치’가 아닌 ‘적정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야 일부라도 하청 노조에게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런 생각에 대해 취재 과정에서 마주쳤던 반론은 이랬다. ‘원·하청 구조를 만든 기업이 책임져야지, 왜 노동자끼리 나눠야 하나?’양대 노총은 법정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2025년 내에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요
지난 3월, 제주에서 있었던 재판 이야기다. 2023년 3월에 제주교도소 앞에서 제주공안탄압대책위 주최로 기자회견과 집회가 열렸다. 경찰과 충돌이 있었다. 두 여성 활동가가 기소되었고, 1심에서 집행유예,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올해 3월, 항소심에서 판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 시간부터 방청인들은 어떤 소리도 내지 마라, 움직이지도 마라, 한탄도 하지 마라, 항의도 하지 마라, 한숨도 쉬지 마라, 오로지 눈으로만 보라, 이를 어길 경우 바로 이 자리에서 구속시키겠다, 그리고 이 말은 피고인과 변호인에게도 적용된다.” 이 말을 한
회사 근처 카페에 ‘소원을 들어주는 트리’가 있었다. 2023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손님들이 적어 붙인 메모로 만든 나무였다. 동료들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기” “섭외가 잘되게 해주세요ㅠ” “이달의 기자상” 등을 적었다. ‘김은지의 뉴스IN’ 론칭을 앞둔 나는 “〈시사IN〉 유튜브 구독자 50만명 달성”이라고 썼다. 놀랍게도 이듬해 그 소원들은 모두 이루어졌다. 사랑을 빌던 동료는 신앙을 찾았고, 또 다른 동료는 단독 취재로 상을 받았다. 유튜브 역시 9만명이던 구독자 수가 50만명 넘게 늘었다.너무 용했기 때문일까. 작년에는 그
‘세계에 이름 떨칠 딸.’장연미씨의 휴대전화 속 딸은 이름 대신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장씨는 여전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고, 마지막 나눴던 문자메시지를 보고 또 본다. 딸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얼마나 다정했는지, 얼마나 똑부러졌는지, 얼마나 글을 잘 썼는지···. 그렇지만 지난 1년 장씨는 딸에게만은 할 말이 없었다. 네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곡기를 끊었다. 28일 이어진 단식 끝에 ‘90대 할머니’의 몸을 얻었다. “의사가 그러더라고. 몸의 기능이 다 떨어져서 90
추석 연휴에 경복궁을 지나다 한복 차림의 외국인들을 봤다. 빛깔 고운 한복들 중 낯선 모습이 섞여 있었다. 위아래 온통 검정색인 한복이었다. 갓까지 쓰고 있어 이색적이라 자꾸만 돌아보게 되었다. 한복 대여점을 지나다 그 차림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 나오는 ‘사자보이즈’ 한복이 있다고 광고하는 글이 붙어 있었다. 저승사자 복장이었다.〈케데헌〉의 글로벌 흥행을 분석한 기사를 쓴 지 한참 되었는데도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기사를 쓸 때만 해도 혹시 마감 직후 〈케데헌〉 OST의 미국 빌보드 순위나
9월21일 북한 김정은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이재명 정부에 대해 ‘흡수 통일 야망에 있어서는 이전의 보수 정권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라며 대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한국의 이른바 보수 우파 세력들은 남북 교류·협력 정책에 대해 ‘한국을 북한에 통째로 넘기려는 종북 세력의 술책’ 따위 근거 없는 모함을 일삼아왔다. 그러나 정작 북측은 햇볕(교류·협력) 정책을 한국의 ‘흡수 통합’ 시도로 경계해왔던 것이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때도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은 ‘김대중을 보수 정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는 내
9월15일 오전 10시10분에 시작된 18차 공판은 오후 8시20분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피고인 윤석열에 대한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 이야기다. 긴 시간 재판이 이어졌지만 법정 밖으로 전해진 소식은 내란 특검의 사건 병합·신속 재판 요구 정도에 그쳤다. 방청석에 앉은 취재진은 시간대별로 조금 바뀌었지만 5명 안팎에 불과했다.이날 재판에 출석한 증인 중 한 명은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 본관에 진입한 특수전사령부 707특임단 소속 박 아무개 소령이었다. 박 소령은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46분 김현태 당시 707특임단
한 기후위기 대응 단체에서 언론인 몇몇을 불렀다. 주제는 ‘메탄’이었다. 온실가스 효과가 이산화탄소의 80배에 달한다는 메탄을 줄여야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는 브리핑이 열렸다. 메탄 발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축산업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벼농사였다. 벼농사를 지을 때 물을 가두는 과정에서 땅속 유기물이 분해되며 메탄이 발생하므로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발표가 이어졌다.내가 다소 까칠하게 물었다. 벼농사의 메탄 발생량 데이터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홍수 조절 등 논과 벼농사가 환경에 기여하는 부분도 고려해야
최근 강원도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는 지인 A씨가 농지를 잃었다. 그 땅은 그의 처가가 15년 전 귀농해 이웃에게 빌린 ‘돌밭’이었다. 외지인이던 A씨의 장인은 농지를 구하기가 어려워 동네에서 가장 비싼 임차료를 주고 그곳을 빌렸다. 얼마 전, 계약서에 적힌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계약을 연장한다’는 조항이 무색하게 15년 만에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다. A씨의 가족이 땅 주인에게 농업경영체 등록을 요구한 탓이다.농업경영체로 등록한다는 것은 정부에서 공식 농민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공익직불금 수령부터 비료 지원까지 세세한 정부 정책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제21대 대선 예비 후보 중 한 명이었던 한덕수. 그는 이제 피고인 신분이다. 8월27일 법원의 기각 결정으로 구속은 면했지만, 다음 날 특검은 내부 논의를 거쳐 한 전 총리에 대한 수사 계획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적용된 혐의는 ‘내란 우두머리 방조’ 등이다.대선 기간, 그는 3년 안에 개헌을 마무리한 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하며 권력욕이 없음을 강조했다. 기자들의 질문 쇄도에도 대체로 차분히 답하던 그는 단 하나 ‘12·3 비상계엄’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다른 모습이었다. 계엄 관련 질문이 나올
휴대전화에 저장된 오래된 동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2021년 12월26일 오후 3시 국민의힘 당사에서 촬영한 7분41초짜리 영상이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카메라의 초점은 한 사람에게 맞춰졌다. 허위 이력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히겠다며 기자들을 불러 모은 김건희씨였다.영상 촬영 당시엔 김건희씨가 어떤 말을, 어떤 표정으로 했는지 제대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기껏 취재하러 가서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가 영상에 담겨 있다. 화면은 마이크 앞에 선 김건희씨의 전신에서 상반신으로 점점 당겨지다가, 5분가량 지나 손가락으로 향한다. 휴대전화
회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김건희씨 구속영장이 발부된 다음 날이라 당연히 대화 주제는 김건희씨였다. 한 선배가 말했다. “반클리프 목걸이 말고 또 명품 받았던데? 뭐더라, 뒤슝슝?” 바쉐론 콘스탄틴이 아니냐고 하자 선배는 한사코 아니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뒤슝슝… 뒤슝슝 뭐였는데.” 방금 속보로 떴나? 아무렴, 받아도 또 뭔가를 받았겠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몇 주 내내 3대 특검에서 쏟아지는 [속보]와 [단독] 기사를 하루 종일 쳐다보노라면 어느새 검색할 의지도 사라진다. 어차피 한 시간 뒤면 온 국민이 그 브랜드에 대해
마침내 김건희씨가 포토라인에 섰다. “국민 여러분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심려를 끼쳐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조사 잘 받고 오겠습니다.”본인 이름을 딴 특검팀에 출석한 ‘피의자 김건희’는 자신을 한껏 낮췄다. 공천 개입, 뇌물 수수, 주가조작 의혹 등 모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저지른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주장일 테다.대단한 전략이랄 것도 없지만, 김씨는 자기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그 말을 듣는 시민들을 아찔하게 만들 뿐. 김씨의 계산된 발언을 들으며 당장 같은 날 아침에 보도된 한 기사가 떠올랐다.8월6일 〈
“이대로 가다간 곤두박질칠 겁니다. 공영방송의 ‘안락한 망함’이에요.” 전화기 너머로 취재원의 격앙된 반응이 전해졌다. 한 언론학자에게 국회 과방위를 통과한 방송 3법에 대해 의견을 묻는 중이었다. 그는 방송법 개정 논의가 너무 오랜 기간 ‘정치적 독립성’에만 갇히면서 정작 중요한 ‘경영 전문성’에 대한 논의는 빠져버렸다며 한탄했다.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시대인데 한국의 공영방송은 십수 년째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 주권을 글로벌 OTT에 다 내어주고 있어요.” K콘텐츠 시대
그날 행진의 종착지는 서울 중구 명동의 세종호텔 앞이었다. 이틀 전인 2월13일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지부장이 그곳에서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지난 2월15일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 참석했다가 행진을 따라가게 된 나는 한동안 두리번거렸다. 설마, 거기가 고공 농성장일 줄이야. 6차선 도로의 한복판에 ‘서행운전 하세요’라는 전광판 문구가 번쩍이는 철제 구조물. 높이 10m, 길이 9m, 폭 80㎝의 가냘픈 난간 위에 헤드 랜턴을 쓴 사람이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집으로
언젠가 내가 만든 콘텐츠로 관객들과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종종 꿈꿔왔다. 7월11일 금요일, 〈시사IN〉 편집국이 지은, 12·3 계엄에서 파면까지를 기록한 책 〈다시 만난 민주주의〉 북토크가 열렸다. 〈시사IN〉 PD들은 ‘계엄의 밤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영상으로 기록했는데, 이 인터뷰 정리본도 책에 실렸다. 편집국장이 북토크에서 PD들의 이야기도 들려주면 좋을 거 같다며 참여 제안을 했다. 꿈꿔오던 독자와의 만남이라니! 마음이 부풀어올랐다.북토크가 다가올수록 설렘은 긴장감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
구글 검색창에 영어로 ‘wallet brands’를 입력하고 검색 버튼을 눌러보자. 각종 지갑 제품 이미지가 검색 상위에 노출된다. 이번에는 한국어로 ‘지갑 브랜드’라는 키워드를 넣어보자. 이상하게도 영어 검색 결과와 달리, 웬 피라미드 그림이 검색 상위에 뜬다. 그리고 검색 결과 옆에 이런 관련 검색어가 갑자기 등장한다. ‘서열’ ‘계급’ ‘티어’ ‘순위’. 피라미드 이미지는 속칭 ‘브랜드 계급도’를 그린 그림들이었다. 지갑 대신 다른 키워드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패딩’ ‘핸드백’ ‘시계’ ‘자동차’, 심지어 ‘커피’까지도.이
우리 아파트 승강기에는 태블릿이 있다. 24시간 광고 영상이 나온다. 29개월 된 아이가 그걸 좋아한다. 신나게 무언가 이야기하다가도 화면을 보면 입을 다문다. 몇 달 전 시작된 ‘개꿀’ 광고가 나올 때면 특히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선글라스를 낀 개구리 캐릭터가 나와 “개꿀~개꿀~개꿀”이라 노래를 불러대는 영상이다. 빈 병을 반납하고 보증금 받으라는 자원순환보증금관리센터의 홍보 영상이다. 환경부 산하단체라고 한다.아이가 그 화면에 집중하는 순간마다 참 마뜩잖다. 유아는 스펀지 같아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흠뻑 빨아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