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5년 11월1일 아침 9시30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규모 9의 대지진이 시작된다. 단 3분 만에 800년 역사의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도시의 85% 이상이 파괴되고, 인구의 약 15%가 사망했다.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던 국제도시이자 독실한 신앙의 도시였던 리스본을 초토화한 대재앙. 그런데 여기서 역사적 대반전이 일어난다. 신실한 종교적 믿음으로 막지 못한 대재앙은 계몽주의 사상이 빠르게 퍼져가는 계기가 된다. 희망을 잃었던 도시 리스본에선 인본주의가 꽃을 피운다. 건축물만 재건된 것이 아니라 문명적 차원의 도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똑같은 자연재해였지만, 문명적 차원의 퇴행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응교 교수는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기해 〈백년 동안의 증언〉을 펴냈다. 이 책에는 '15엔 50전'이라는 제목의 시가 등장한다. ‘15엔 50전’이라는 말을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발음하지 못한다.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조선인을 상대로 대학살이 일어난다.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놓고 ‘15엔 50전’을 발음시킨 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일본 정부는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일본 정부가 사주한 정황에 대한 다양한 기록과 증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때 학살당한 조선인이 6661명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상을 감추는 데 급급할 뿐이다.
저자는 '15엔 50전'을 읽고 일본인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가장 저급한 시 읽기’라고 말한다. 자국의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시정하려는 일본 시민단체를 포함해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 시민, 연구자, 작가들까지 모두 ‘우리’라는 개념에 담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질 때, 100년에 걸쳐 이어지는 문명적 차원의 퇴행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100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두 나라가 무작정 손잡고 미래로 가자는 식의 태도에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이 책은 명확하게 알려준다.
한편 〈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참담한 역사의 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고로 노력한 사람들의 활동상과 그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재일 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간토대학살의 진상규명에 평생을 바친 학자다. 그는 당시 정황에 대해 수수께끼 두 개를 제시한다. 바로 자신의 연구가 향했던 방향이다. ‘자연재해에 왜 일본은 계엄령을 발동했을까?’라는 것과 ‘조선인 학살을 조장한 유언비어는 어디서 나왔을까?’라는 질문. 그는 일본 내무성, 육군, 경찰 등 당시 정부기관의 자료를 찾아내고, 출동했던 계엄군의 회고와 일기까지 뒤져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수수께끼에 접근한다.
구체적 자료와 분석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명료하다. 당시 일본의 정치권력이 직접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그 이유는 재난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정부를 향해 시민들이 반정부 투쟁을 벌일 수 있어서다. 즉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강덕상 교수는 ‘계엄군과 경찰과 자경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조선인 사냥에 나선 것이 간토대학살의 본질’이라고 규정한다.
지난 100년을, 그리고 앞으로 100년을 ‘망각의 과정’으로 만들려는 자들과 ‘기억의 분투기’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맞서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권의 책이다. 어떤 장렬함이 역사가 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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