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보는 한가위 보름달이 조금 지겹게 느껴진다면 망원경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망원경으로 보면 같은 보름달도 새삼스럽다. 보름달에 방아 찧는 토끼가 보였던 것이 실은 달 표면의 높낮이와 밝기 차이로 인한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자연이나 사물에서 익숙한 패턴을 찾아내는 심리 현상으로, 변상증이라고도 한다)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역사도 이와 비슷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도 새로운 렌즈를 들이대면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지역’이라는 렌즈가 있다. ‘한국사’의 범위를 ‘한국’ 대신 ‘지역’으로 좁혀보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에 끝난다. 하지만 당시 경남 하동 지역에 살았던 내 할머니의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은 좀 다르다. 할머니에게 한국전쟁은 1950년 7월 말쯤에 나타난 국군 패잔병으로 시작되어 약 두 달 뒤에 쫓기듯 도망가는 인민군으로 끝난다. 전라도에 살았던 사람의 한국전쟁은 이와 또 다를 것이고, 다른 동네 사람들의 한국전쟁은 또 그것대로 다를 것이다.

〈혼돈의 지역사회〉는 지난 100년간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역’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본 결과다. 한국 근현대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식민 지배의 질곡에도 치열하게 전개된 민족운동·사회운동의 결과로 간신히 해방을 맞았지만 극심한 좌우 대립 끝에 한국전쟁으로 동포끼리 죽고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무엇 하나 무심히 잊을 것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한 근현대사에도 ‘지역’이라는 렌즈를 들이대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에는 목포와 나주, 영광, 강진·능주(화순)의 근현대사가 빼곡히 담겨 있다. 이들 지역으로 범위를 좁혀서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간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지역사회의 구체적인 공간과 사람들이 훨씬 생동감 있게 설명되어 독자의 시야도 자연히 깊어진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목포의 시가지 구조가 전통과 근대, 조선인 거주지역과 일본인 거주지역이 뚜렷이 구분되는 이중 도시(dual city)라는 점을 쉬이 꿰뚫어볼 것이고, 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해 재편성된 호남 지역사회와 그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 조선인 자본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해 보이는 해방 직후의 좌우 갈등도 문중 간의 오랜 길항관계와 식민지 시기 사회운동의 연장선에서 훨씬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전쟁기 전남 지역 전체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절반 가까이가 영광에 집중된 까닭을 알고 나면 도서(島嶼) 지역이라는 영광의 지리적 특성과 근대 시기 영광 지역 사회운동 세력의 동향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도 간파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촘촘히 설명된 이 책을 읽고 나면 근현대사에 흩어진 구슬 서 말이 하나의 보배로 꿰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019년 1월 전남 목포시 대의동 1가 일대의 모습. ⓒ연합뉴스
019년 1월 전남 목포시 대의동 1가 일대의 모습. ⓒ연합뉴스

많은 인명과 지명이 등장하고 서술도 압축적이라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주눅 들지 말고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꼭 이 지역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 책과 같은 방식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내 고향과 내 동네가 적잖이 달라 보일 것이다. 범상하게만 느껴졌던 내 주변의 풍경과 공동체가, 실은 오랜 역사가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까.

기자명 탕수육 (필명·한국 현대사 연구자·팟캐스트 ‘역사책 읽는 집’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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