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취업, 진학, 정치. 명절에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되는 대화 주제들이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번 추석에는 ‘역사’도 이 목록에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일을 두고도 편을 나누어 싸울 수 있음을 요 몇 주 동안 새삼스레 확인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온 가족이 둘러앉은 추석 밥상을 세대와 진영 간의 싸움으로 얼룩지게 하고 싶지 않다면 섣불리 역사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것이 지혜롭겠다.
사실 역사에 대한 해석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갈린 것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예컨대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 이야기로 시작해서 정치 이야기로 끝나곤 한다. 한국전쟁도 꼭 그러하다. 한편에는 공산주의의 무력도발에 맞선 국난 극복의 서사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강조하는 서사가 있다. 보수와 진보의 전선을 따라 대립의 선이 그어진 두 서사는 휴전선처럼 수십 년째 대치 중이다.
영국에 거주 중인 저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 청년 데이비드 마이클 호크리지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된다. 영국에서 태어난 마이클 호크리지는 이스트본칼리지 재학 중에 소위로 임관해 한국전쟁에 참가했고 1952년 2월 연천과 동두천 사이 어딘가에서 전사하여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저자는 그가 다녔던 학교에서 단편적인 기록을 찾고 다른 참전군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흔적을 더듬는다.
책을 읽다 보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사실 ‘영국 청년 마이클’은 맥거핀(중요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에 가깝다. 마이클 호크리지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막상 어느 순간부터 그 행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저자가 더 주목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과 이국의 전쟁을 보는 평범한 영국인의 마음,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부모 세대의 마음과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저자 역시 우리들처럼 사회적 현안과 역사적 쟁점을 두고 부모 세대와 반목하고 불화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말하는 것은 세대(혹은 진영)를 넘어 서로 공감하고 화해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한국에서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으레 정치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대개의 역사 이야기는 ‘너 누구 편이야’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기 마련이고,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재단하고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역사조차 정치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요즘에는 역사 공부 많이 해봤자 결국에는 상대에 대한 냉소만 남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역사 공부의 목표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세대도 다른 타인과의 공감대를 찾으려는 노력은 요즘 같은 시절에 특히 필요하다. 저자가 영국 청년 마이클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 추석에 모여 앉을 가족에게 우리도 그렇게 노력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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