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 엘리엇’ ISDS(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의 핵심 쟁점 대부분에서 한국이 패배한 것으로 드러났다. 법무부가 6월23일 배포한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 판정 선고’ 제하의 보도자료(6월20일 나온 판정문 내용을 정리‧공개)를 보면 그렇다.

ISDS는, 외국인 투자자(개인)가 피투자국(국가)을 대상으로 제기하는 국제중재다. 다만 해당 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 다음 같은 조항이 삽입되어 있을 때만 제기할 수 있다. ‘당신 국가의 협정 위반으로 우리나라 투자자가 손해를 봤을 때, 우리 투자자는 당신 국가에 손해배상 중재를 제기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 간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에 ISDS 조항이 들어가 있다. 미국 투자자인 엘리엇이 한국에 ISDS를 제기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렇다면 엘리엇은 한국이 한미 FTA의 어떤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을까? 바로 ‘최소기준대우 의무(밑에 설명)’다. 엘리엇이 손해배상을 받게 된 것은, ISDS 중재판정부가 한국이 ‘최소기준대우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ISDS의 양측간 핵심 쟁점은 다음과 같다.

쟁점 1 :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연금공단 압박을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있는가

지난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당시 박근혜 대통령-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홍완선 연금공단 기금운본부장(이하 호칭 생략) 등이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에 합병 찬성 표결을 압박한 사실은 이미 한국 법정에서도 인정되어 있다. 엘리엇은 이 행위가 단지 박근혜, 문형표, 홍완선 등의 ‘개인’ 비위가 아니라 ‘국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래야 엘리엇은 해당 개인들이 아니라 한국에 ISDS를 걸 수 있었다.

2016년 12월27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6년 12월27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박근혜 등의 행위는 개인들의 비위일 뿐이지 ‘국가의 조치’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의 연금공단은 삼성물산 등 여러 삼성 계열사들의 대주주로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찬성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투자 수익을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봤다고, 중재판정부에 제출한 서면에 썼다. 연금공단은 장기 수익을 내려는 ‘순수한 상업적’ 동기에 따라 합병을 찬성했을 뿐이므로, 이 또한 ‘국가의 조치’가 아니라는 의미다.

6월23일 법무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중재판정부는 박근혜 등의 행위가 ‘국가의 조치’에 해당된다고 봤다. “중재판정부는 ▲복지부 관계자 등이 국민연금의 합병표결에 개입한 행위는 협정상 국가 책임의 근거가 되는 ‘조치’에 해당하고 ▲국민연금은 사실상의 국가기관이므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행위는 우리 정부에 귀속된다고 보았다.”

쟁점 2 : ‘국가의 행위’였다면 이 행위가 엘리엇 손해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는가

박근혜 등의 연금공단 압박이 설사 ‘국가의 행위’로 인정되더라도, 엘리엇이 ‘한국에 책임이 있다’란 논지를 입증하려면 ‘압박’과 ‘합병 성사(엘리엇은 이로 인해 손해를 봤다고 주장한다)’ 사이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한국 측은 중재 과정에서 엘리엇에 ‘연금공단이 찬성하지 않았다면 합병은 절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국민연금공단의 삼성물산 지분은 11%였다. 한국 측이 제출한 서면에 따르면, 11% 지분의 행사만으로 합병이 성사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해 주총에서 합병이 가결되려면 참석 주주 가운데 2/3(66.67%)의 찬성이 필요했다. 실제로는 69.53%가 찬성했다. 2.86% 차이다. 그런데 2.86% 이상의 지분을 가진 싱가포르 투자청, 사우디 국부펀드, 한국투신운용 등이 모두 가결에 동의했다. 이 중 한 곳만 반대했어도 합병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측은 ‘압박’과 ‘합병 성사’ 사이에 “명확하고 단절되지 않은 관련성”이 없고, 따라서 엘리엇이 한국 국가에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이 사실상 본건 합병에 관하여 캐스팅 보트를 가지고 있어 국민연금의 표결과 삼성물산 주주들의 손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었음을 인정”했다(법무부 6월23일 보도자료).

'한국 대 엘리엇' ISDS에 중재 서비스를 제공한 PCA는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궁(Peace Palace)에 소재하고 있다. ⓒAP Photo
'한국 대 엘리엇' ISDS에 중재 서비스를 제공한 PCA는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궁(Peace Palace)에 소재하고 있다. ⓒAP Photo

쟁점 3 : 한국은 한미 FTA의 ‘최소기준대우 의무’를 위반했는가

한미 FTA엔, 양 국가가 상대국 투자자에게 지켜야 하는 ‘최소기준대우 의무’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의 의미는 극히 모호하다.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짓을 했을 때 최소기준대우 의무를 위반한 것인지, 협정문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법무부 보도자료는 최소기준대우 의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한미 FTA는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와 충분한 보호 및 안전을 포함한 국제관습법상 외국인에게 인정되는 대우를 최소기준대우 의무로 규정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는가? 법률가들도 잘 모른다. 그래서 국제중재에선 최소기준대우 의무 위반을 대체로 ‘국가가 외국인 투자자에게 아주 나쁘고 엉뚱한 짓을 한 경우’ 정도로 보는 듯하다. 이번 한국 대 엘리엇 ISDS에서도 양측은 피투자 국가가 상대국 투자자에게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행위”를 범하는 경우를 최소대우기준 위반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당시 박근혜 등의 연금공단 압박이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행위”에 속하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엘리엇은 서면에서 ‘그렇다’라고 주장했다. “놀라운 수준의 범죄성과 부정의 절정을 보여주는, 정부의 고의적 개입”이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박근혜 등의 연금공단 압박이 국내법(한국 법률)을 위반한 소지가 있다 하더라도, 국가 경제의 장기적 미래를 염려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선 공익적 측면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익적 측면이 있었으니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행위”는 아니라는 항변이다.

당시 박근혜 등 한국 정부 관련 인사들이 아무리 사익에 눈멀고 책임감이 없었다고 해도, 한국 경제의 중추 중 하나인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벌처펀드 엘리엇이 개입하는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재판정부는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관련 국내 형사 확정판결에서 인정된 사실관계를 인용하여 우리 정부가 협정상 최소기준대우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판단했다.”(법무부 보도자료)

‘93% 승소’라는 말장난

여기에서 이 '사실관계'는 무엇일까?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뇌물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절친한 최순실씨가 삼성 측으로부터 이런저런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한 것은 사실이다. 국정농단 관련 검찰 수사팀은 박근혜를 제3자 뇌물죄, 문형표를 직권남용, 홍완선을 업무상 배임 혐의 등으로 수사‧기소했고, 이는 법정에서 유죄로 판결되었다. 중재판정부에겐 이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박근혜 등 한국 정부 인사들이 ‘국가 경제의 장기적 미래’라는 공익을 위해 엘리엇을 배제하도록 연금공단을 압박했다면, 이는 중재법정에서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행위”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행위가 박근혜, 문형표, 홍완선 등의 사적 이익을 위한 범죄행위로 한국 내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결론지어졌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법무부의 보도자료에 나온 것처럼, 중재판정부는 ‘합병 관련 국내 형사 확정판결’을 인용해서 한국 정부가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봤듯이 한국은 거의 모든 쟁점에서 엘리엇에게 패배했다. 유일한 승리는 엘리엇의 손해액에 대한 산정 부분이다. 엘리엇은 당시 매입했던 삼성물산 주식에 엄청난 ‘내재가치’가 있었고, 한국 정부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 내재가치를 실현해서 큰 수익을 올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엇은 그 ‘상상의 수익’에서 투자 원금을 빼는 방법으로 손해액을 산정했다. 손해배상금 청구액이 한국 돈으로 1조원에 달했던 이유다. 한국 측은 당시 삼성물산 주식의 실제 주가를 기준으로 손해를 산정했다. 이 부분에선 중재판정부가 한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엘리엇의 산정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국제중재에서도 청구인들은 터무니없게 부풀린 손해배상금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법무부는 이번 ISDS의 결과를 ‘한국의 93% 승소(배상 원금 기준)’로 표현한 바 있다. 엄청나게 이겼는데 거의 1400억원을 상대방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것은 좀 황당한 일 아닐까? ‘한국 대 엘리엇’ ISDS의 결과는, 한국의 93% 승소가 아니다. 우리 정부는 대부분 쟁점에서 패배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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