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신간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로 돌아온 장하준 런던 대학 교수.ⓒ시사IN 이명익

장하준 교수(런던 대학, 이하 호칭 생략)는 1986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낯선 외국에서 지내는 삶은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러나 영국 음식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고기는 너무 익혀서 질겼고 양념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채소는 너무 끓여서 곤죽이 되어 나왔다.” 그는 잉글리시 머스터드(영국식 겨자 소스)와 소금을 ‘무기 삼아’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버텼다. 한국인에게 식생활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인 마늘은 구하기 힘들 뿐 아니라 영국인들에겐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겨지는 식재료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었다. 1990년대 들어 영국에도 ‘음식 혁명’이 터졌다. 인도식이나 멕시코식, 중국식, 튀르키예식은 물론 거의 모든 나라 출신의 음식점들이 문을 열었다. 영국은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사회로 발전했다.

그러나 장하준의 전공인 경제학에서는 정반대 사태가 발생했다. “1980년대 이후 경제학 분야는 1990년대 이전의 영국 음식 문화처럼 되어버렸다. 한 가지 학문적 전통, 다시 말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메뉴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신고전학파(신자유주의)라는 ‘유일사상’이 경제학의 철혈 독재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가 10년 만에 내놓은 책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Edible Economics)〉는 음식과 경제학‘들’에 대한 책이다. 다양한 식재료의 맛과 무역의 역사를 고찰하다가 어느 순간 실마리를 낚아채 경제학 부문으로 내달린다. 가볍게 읽히지만 무겁고 무서운 주제들을 다룬다. 이 책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유일사상에 대한 편식을 중단하라’이다. 이 편식이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로 폭발했으나 글로벌 정부들과 엘리트들은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세계는 다시 인플레이션 및 금융위기의 전조 앞에서 전율하게 되었다.

더욱이 유일사상만으론 기후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새롭게 제기된 인류적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것처럼 다양한 경제학들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아질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장하준은 주장한다.

장하준에게 던진 첫 질문은 그가 천착해온 개발경제학(Development Economics)에 대한 것이었다. 경제학의 다양성과 개발경제학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개발경제학은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학문’으로 정의된다. 신고전학파와 다른 점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시장이 존재’하고, ‘재산권이 확립되어 있’으며, ‘사람들이 (합리적 판단이 가능할 정도로) 교육을 받은’ 상태를 전제한다. 2차 대전 종전 뒤 독립한 국가들엔 이런 조건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개발경제학은 ‘이런 나라들은 어떻게 경제를 개발해야 하나’라는 문제의식으로 출발했다. 신생국의 경제발전엔 ‘유치산업 보호(개도국의 신흥 산업이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관세, 보조금 등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논리)’ ‘토지개혁’ ‘경제계획’ 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의 경제개발 과정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신생국 경제발전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건데, 이른바 시장주의자들은 한국이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으로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경제개발기 한국의 정책들은 이른바 자유시장 이론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분들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면서 한국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그래서 자칭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박정희를 신봉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기조엔 개발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섞여 있었다. 박정희 자신이 젊었을 때 공산주의자였고…. 모든 상황에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경제학적 해결책이나 모델(예컨대 신고전학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사회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맞는 경제학적 답을 찾아야 한다. 과거에 그랬고 미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인가.

신고전학파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을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선진국들은 발전 초기에 보호무역주의를 견지하다가 부국이 된 뒤엔 가난한 나라들에게 ‘너희는 자유무역 해라’고 압박하곤 했다. 특정한 경제 이론이 ‘나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며 우리가 몸담은 세상 전체를 뒤집어엎고 주물럭거리는 것을 ‘절망 어린 침묵 속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시민들 모두가 경제학의 몇 가지 원리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경제학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1987년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있다.ⓒ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제공

한국에서는 오히려 최근 들어 신고전학파 혹은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바탕한 주장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시장규제 최소화’ ‘노동시간 연장’ ‘복지 축소’ 등은 물론 노조를 공격하거나 민영화 소문이 떠돈다.

한국, 특히 윤석열 정부와 그 주변의 엘리트들 사이에선 ‘경제개발을 왜 했는지’ 자체가 의문스러워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다. 1인당 GDP가 3만5000달러에 달하는 나라에서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라거나 ‘싼값으로 외국 여성을 수입해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자’ 같은 대책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사실 한국은 저런 행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킨 것이다. 반(半)농담처럼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는 ‘선진국이 후진국처럼 되자’라는 주장이다. 시장규제 완화, 노동권 약화, 환경규제 무력화 등을 강행하면 지금의 가난한 나라들과 비슷해진다. 하루에 15시간씩 일하고, 노동자들이 조금만 목소리 내면 경찰이 와서 두들겨 패고, 산재 당해도 보상받지 못하고, 복지도 없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그런 세상에 살아봤다. 1970~1980년대엔 남성들이 장시간 노동을 하고 대다수 여성은 출산·육아를 맡았다. 여성들이 엄청난 문화적 억압 밑에서 희생당했기에 한국은 복지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상류층 여성들은 ‘가사도우미’들을 데려와 싼 임금으로 착취했다. 이런 옛날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인가? 한국이 남미처럼 되기를 바라나.

남미야말로 자유시장과 자유무역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망한 것 아닌가? 베네수엘라가 대표적 사례라고 한다.

‘팩트체크’를 권한다. 남미 국가들은 1960~1970년대에 보호무역, 산업정책 등을 구사하며 비교적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했다. 당시 1인당 소득성장률이 연평균 3% 정도였다. 1980년대 들어 ‘경제 자유화’ 바람이 불었는데, 이후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은 1%에 미치지 못한다. 숫자를 보면, 남미 경제가 자유화되지 않아 망했다고는 도저히 단정할 수 없다. 베네수엘라만 해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후임인 니콜라스 마두로가 (시장규제, 환율 등에서 극좌에서 극우로 오가는) 재앙 같은 정책을 펼치기 전엔 지금 같지 않았다. 베네수엘라는 이웃 국가들보다 더 빠른 시기인 1980년대 초에 경제 자유화를 감행했다. 그러나 우고 차베스 집권(1999년) 전까지 20년 동안 경제성장률이 0%였다. 오히려 차베스가 1인당 소득성장률을 1.5%까지 올려놓았다.

복지제도를 도입하려고 노력했던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왼쪽)과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EPA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어땠나. 광범위한 복지제도를 시행했으나, 브라질을 원자재 파는 국가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룰라는 금리를 지나치게 올렸다. 다른 나라들의 실질이자율(명목금리-인플레이션율)이 3~4%일 때 브라질의 실질이자율은 8~12%였다. 제조업 부문의 산업자본들은 돈을 빌려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브라질 국내외의 금융자본은 행복했다. 브라질 국채만 매입해도 (거의 위험 없이) 10% 내외의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외국자본이 브라질 국내로 대거 들어오면서 헤알화(브라질 통화)의 가치가 크게 올랐다(브라질로 수입되는 외국 상품의 가격은 내려간 반면 브라질 수출품의 해외 가격은 상승). 그 결과는 브라질 제조업과 수출산업의 절멸이었다. 통계에 따라 좀 다르지만, 브라질 GDP에서 제조업 비중이 198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30~35%였다. 지금은 10%가 안 된다. 영국 말고 이토록 급격하게 탈산업화를 한 나라는 없다. 룰라 정부는 지나친 친(親)금융자본 정책으로 인해 생산적 산업 육성에 실패했다. 결국 한때 개발도상국 중 제조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였던 브라질이 천연자원 수출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나마 복지 부문에서는 성공하지 않았나?

금융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펼쳐 거둔 세금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하긴 했다. 그러나 (산업정책에서 실패하면) 복지제도 역시 허사로 돌아간다. 진보 성향 정부가 산업정책에 성공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후임 우파 정권도 그걸 의도적으로 부수지는 못한다. 그러나 복지는 철회할 수 있고 이에 따른 사회적 퇴보가 불가피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정부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진보 성향 정당들의 비극이다. 영국의 노동당은 어떤가?

현재 노동당 주도 세력은 기본적으로 보수당의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수용한다. 다만 그 파괴성을 어느 정도 억제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1980년대 대처리즘의 기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유하자면 대처의 신자유주의는 시민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니 신호등 같은 교통 규칙을 모두 제거하자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집권에 성공한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신노동당’은 사고 피해자들을 치료해주고 교통안전 캠페인도 시행하자는 정도에 머무르고 만다. 제러미 코빈 전 노동당 대표가 당의 이런 기조를 바꾸려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 노동당 지도부는 블레어 노선으로 집권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영국 사회를 제대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한국의 더불어민주당은?

(다른 나라 진보 성향 정당들과) 비슷한 흐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너무 거친 것만 좀 다듬자는 것 아닌가? 민주당 정책을 보면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같은 기독민주당 좌파보다도 오른쪽이라서 진보로 부르기 쑥스럽다. 그러니까 집권해도 금방 밀려나고 만다. 시민들 입장에선 큰 긍정적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진보 정권의 실수와 부정 사례가 자꾸 노출되니 다시 표를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후임 보수 정권은 그나마 진보 정권에서 이뤄진 성과도 퇴보시켜버린다. 다른 나라 진보 성향 정당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최근 한국에서나 글로벌 차원에서나 경제적 불안감이 점증하고 있는데, 어떻게 전망하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켰던 시스템의 기본적 틀이 계속 유지되면서 지금의 금융 불안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엔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 민주당 정권만 해도 이른바 ‘뉴딜’로, ‘적자재정을 통한 사회간접자본 개발’ ‘투자은행-상업은행 분리’ ‘증권거래위원회(SEC) 설립’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설립’ ‘사회보장법 제정’ ‘노동자의 협상력 강화(와그너법)’ 등으로 꽤 새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2008년 위기 이후엔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높이고 아주 이상하게 설계된 파생금융상품을 규제하는 조치 정도로 그쳤다. 근본적인 개혁이 없었기에 경제가 회복되지 않았고, 그렇게 되자 기준금리를 0%로 낮추면서 통화팽창으로 자산시장에 거품을 불어넣어 경기를 지탱했다. 그 덕분에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미국, 영국 등에선 실물경제가 10%씩 위축되는데도 주식 등 자산시장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이러는 와중에 팬데믹으로 인한 국제 공급망 교란,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사태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렸다. 1년 사이에 0%에서 5% 선까지.

금리인상으로 미국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서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사진은 SVB 본점 앞에서 고객들이 예금된 돈을 찾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REUTERS

기준금리 인상의 결과는?

0% 금리가 10년 이상 유지되어왔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파괴다. 자본시장에 진입하는 가격(돈을 빌려 투자하는 상황에서, ‘빌리는 비용’인 금리는 ‘자본시장의 가격’으로 표현할 수 있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0% 기준금리하에선 수익률 1%인 투자든 10%인 투자든 모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준금리가 갑자기 5%로 올라가니 예컨대 수익률 1%인 투자는 (투자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부실자산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런 상황이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폭발했다. 2008년 위기는 금융기관들이 위험한 금융상품을 대량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SVB가 대량 보유한 자산은 (가격 변동이 크지 않고 부도 가능성도 없으니 부실화할 위험도 극히 작은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였다. 그런데 금리인상으로 미국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서 SVB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지금의 금융 불안은 2008년 당시와 성격이 많이 다르다.

글로벌 차원의 금융위기가 발생할까.

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금융 당국들로선 진퇴양난이다. 인플레를 막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그랬다간 금융 불안이 더욱 심화된다. 지금 수준을 유지해도 그동안의 금리인상으로 부실화된 금융자산들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2008년 수준의 금융위기는 아닐지라도 부실자산들을 해소하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 불안을 진정시키긴 어렵다. 현 사태의 원인을 통찰하고 금융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자신이 주도한 이른바 ‘규칙 기반 무역체제’를 스스로 해체하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등 한국의 핵심 산업을 위협하기도 한다.

미국은 원래 그런 나라다. 국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떤 일이든 한다. 패권국이 되기 전엔 자유무역을 반대했다. 링컨의 후임인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은 ‘영국이 자꾸 자유무역 하자는데, 미국도 할 거다. 한 200년쯤 뒤에, 미국 경제가 영국만큼 강해지면…’이라는 취지로 연설하기도 했다. 이랬던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패권국으로 부상하면서 자유무역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다른 나라들엔 ‘산업정책 안 돼’라고 설교하면서 자신은 ‘국방 연구’라는 명목하에 컴퓨터, 반도체, 터치스크린, 인터넷 등을 개발했다. 실리콘밸리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만든 거다. 반농담이지만,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정책이 ‘우리는 산업정책 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자유무역주의는 양두구육(羊頭狗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70년대에 일본 자동차가 미국 시장을 점령했을 때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자발적 수출억제(Voluntary Export Restraint)’라는 이름으로, 협상(?)을 통해 일본이 대미 자동차 수출을 줄이게 했다. 사실상의 쿼터(수출 물량 제한)를 부과한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론 일본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대미 수출을 억제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미·중 갈등은 어떻게 전개될까.

미국이 중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는 쉽지 않다. 예전의 미국·소련 경쟁 때와 달리 두 나라의 경제가 분리되기는커녕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에서 소비재를 수입하지 않으면 경제를 지탱할 수 없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중위임금(median wage)이 거의 오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값싼 중국산 소비재 덕분에 서민들의 생활이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다. 더욱이 미국 국채의 13% 정도를 중국이 갖고 있다. 설사 미국이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해도, 중국과 완전히 등을 돌릴 수는 없다. 양국은 일정 부문에서 다투더라도 실용적 차원에선 얽혀 지내게 될 것이다. 한국은 이런 상황을 잘 감안해서 움직여야 한다.

최근 경제적 차원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한·미·일 공조가 구축되고 있는 양상이다.ⓒ연합뉴스

그러나 군사적 측면은 물론 경제적 차원에서도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한·미·일 공조가 구축되고 있는 양상이다.

일본은 한국과 경제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한쪽에 붙는 것이 가능하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세계에서 무역의존도가 제일 낮은 나라 중 하나다. 수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은 12~13%이지만, 한국은 30~40%다. 한국이 일본의 장단에 춤을 추며 자해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맺게 된다면, 중국은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한 기계로 소비재를 만들어 미국으로 계속 수출할 것이다.

일각에선 미국이 원한다면 한국이 어떤 일이라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언론에서도 일본이 미국에 대들다가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엔화 가치를 두 배 이상 올려 일본의 수출경쟁력을 떨어뜨린 조치)로 몰락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온다.

참 낯선 이야기다. 일본이 미국에 언제 대들었나? 플라자 합의를 한 것 자체가 대들지 않았다는 제일 좋은 증거다. 하루아침에 자국 통화가치를 두 배 이상 평가절상하라는데, 이에 동의하는 나라가 미국에 대들었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기후위기, 돌봄노동, 자본시장 개혁, 인공지능 등 글로벌 차원에서 최근 제기된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의 경우, 한국에서도 재생에너지 사용, 재활용, 채식 기반 식습관 갖기 등 작지만 소중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에너지 전환, 대체 기술(대체에너지뿐 아니라 철강, 시멘트 등에 들어가는 화석연료의 감축 및 제거 등) 개발, 대중교통 시스템(과 도시계획 체계) 개선 같은 과제들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문에 대한 공공투자를 크게 늘려야 한다. 태양전지의 경우, 25년 정도 투자하니 당초에 비해 비용이 1~2% 수준으로 내려갔다. 2차 대전 때라면 나치에 맞선다는 결의로 총력을 기울여야 기후변화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자본시장엔 어떤 개혁이 필요한가.

최근 영국과 미국에서는 기업이윤(corporate profit) 가운데 90~95%가 주주에게 환원된다는 연구가 있다. 이 비율은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50% 정도였다. 기업이윤의 대부분이 주주에게 돌아간다면, 기업은 무엇으로 투자할 수 있을 것인가. 기업의 진짜 주인은 주주이며 따라서 기업이 주주의 이익에 따라 경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영국의 경우, 1960년대만 해도 주주들의 평균 주식 보유 기간이 5년이었는데 지금은 1년도 안 된다. 회사에 자기 돈을 1년도 안 묻어두겠다는 사람들을 주인으로 부를 수 있을까? 주식을 오래 보유하는 장기 투자자의 의결권을 늘려준다거나, 노동자와 부품 조달 업체, 해당 기업 소재지의 지방자치단체 등 이해관계자들도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장하준 교수는 “지난 250여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동화의 역사”라고 말한다.ⓒAP Photo

챗지피티 등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으로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완전히 없어질 테니까 기본소득을 시행해야 한다고들 한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우선 최근 일자리에 대한 우려가 공론화되고 있는 현상은 일정 부분 ‘계급적 위선’에 기반한 것으로 본다. 과거엔 기자나 교수 같은 지식인들이 블루칼라들의 자동화 반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 진보를 막는 행위’라며 비웃기 일쑤였다. 그런데 인공지능으로 자동화가 육체노동을 넘어 정신노동 영역까지 넘보면서 회계사, 변호사, 교수, 기자 같은 일자리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니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식인 계층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사실 지난 250여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동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사람과 동물이 하던 일이 기계로 대체되더니 그다음 단계에선 컴퓨터가 기계를 컨트롤했다. 이후엔 로봇(기계와 컴퓨터의 합체)이 나왔다. 그런데 일자리란 없어지기도 하지만 계속 만들어지기도 한다. 로봇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면, 로봇을 만들고 정비하고 수리하거나 그 부품을 만드는 일자리가 생긴다. 자동화 자체는 일종의 트렌드다. 우리가 어떤 정책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 트렌드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돌봄노동’에 대한 13장이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에서 가장 급진적인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출산, 육아, 노인 돌보기, 요리, 청소 같은 돌봄노동은 사회·경제적 가치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거나 아주 낮게 평가받아왔다. 돌봄노동은 아니지만 사회의 생존에 ‘필수적인 직원’들(식료품 등 필수품을 생산·운송·배송하거나 대중교통에 종사하는 직종)도 마찬가지다. 이런 노동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책의 주장은 경제학을 넘어 문명 비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팬데믹 당시 영국에선 보호 장비가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어서 환자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 하루에 3000여 명씩 사망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일론 머스크(테슬라 CEO)와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CEO) 같은 사람은 한가하게 로켓 쏘기 경쟁을 벌였다. 그런 사업엔 수조 원 규모의 엄청난 자금이 붙는다. 그러나 사회의 생존에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 입증된 돌봄노동과 ‘필수 직원’의 가치(보수)는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된다. 사회적 가치체계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출산율이 세계 최저이고, OECD 기준으로는 노인 빈곤율 1위, 자살률 1위(2020년 기준), 노동시간 2위, 남녀 임금격차 1위를 기록 중인 나라다. 이런 상황이라면 ‘시스템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대대적으로 나와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적 관심이 온통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에만 쏠려 있는 듯하다. 시장의 논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논리를 지금보단 약화시켜 사회적 균형을 회복하지 않으면 야만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시스템에 질문하는 능력을 되살려야 한다.

4월2일 부산도서관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강연하는 장하준 교수. ⓒ시사IN 이명익

자유를 주장하는 분들이 들으면 펄쩍 뛸 논리다. 돌봄노동이든 필수 직원이든 낮은 보수(혹은 무보수)에도 불구하고 일하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한 것 아닌가? 윤석열 정부는 주 69시간 노동할 자유를 주장한다.

‘가진 자’의 자유 개념일 뿐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자유’무역을 제일 먼저 도입한 지역은 남미다. 영국보다 빠르다. 그러나 남미 국가들이 자유무역을 자유롭게 선택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힘센 국가들과의 불평등조약으로 3~5%의 낮은 관세율을 강요받았다. 강국의 수출업자들은 자유로웠지만 남미 국가들은 자유롭지 않았다. 19세기 미국에서 자유무역을 제일 좋아하는 계층은 남부의 지주들이었다. 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의 기본적 자유를 박탈하면서도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1973년에 쿠데타로 3000여 명을 학살하며 아옌데 당시 대통령(대단한 좌파도 아닌)의 진보 정권을 몰아내고 칠레 정권을 불법 찬탈한 군부 독재자 피노체트를 지지했다. 프리드먼은 자유를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 특히 자산가들이 재산을 마음대로 운용할 자유에 국한했던 것이다. 이런 자유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자유인가?

저출생에 대처한다며 ‘20대에 3명의 자녀를 출산하면 병역 면제’ 같은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출산하지 않는 것도 자유일 텐데 그런 자유는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결국 ‘내’가 좋아하면 자유고, 싫으면 자유가 아니란 말이다. 자유는 제일 많이 남용·오용되는 단어다. 누가 자유라고 부르짖으면 반드시 반문해봐야 한다. 첫째, 무엇을 할 자유인가? 둘째,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정치적 자유가 있고 사회적 자유가 있고 경제적 자유가 있고 문화적 자유가 있다. 경제적 자유라도 ‘누구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자유냐’란 문제가 따라붙는다. 자산가를 위한 자유인가 아니면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얻어맞지 않고 일하며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자유인가?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기자명 이종태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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