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되지 않는 사람, 진실하고 성실한 배우 이지한님”의 어머니 조미은씨(사진)는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애쓰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지한씨의 어머니 조미은씨는 종종 아들의 죽음을 잊는다. 매일같이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 합동분향소를 들르지만 아들 영정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있다. 아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까먹어서다. 참사 후 100일간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로서 카메라 앞에 나서고, 국회에서 정치인들을 만나고, 길거리에서 경찰과 부딪히면서도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1월31일 오전 10시경 조미은씨는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합동분향소 앞에 나란히 섰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희생자 수에 맞춰 159번 절을 했다. 진행자는 절을 할 때마다 희생자 159명의 이름을 불렀다. “해가 되지 않는 사람, 진실하고 성실한 배우 이지한님을 기억하며 95배.” 기어코 돌아온 아들의 차례에 조미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엎드린 채 흐느꼈다. 타인의 입에서 아들의 이름이 불릴 때면 아들의 죽음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사 당일인 지난해 10월29일 새벽 이지한씨는 여느 때처럼 어머니 조미은씨를 찾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지상파 드라마 데뷔작 촬영을 경주에서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길이었다. 이내 잠든 이지한씨는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오겠다는 아들을 배웅하며 조미은씨는 ‘오늘만은 많이 먹고 왔으면’ 하고 생각했다. 이씨는 가수 연습생 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때부터 배불리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닭가슴살과 아몬드 따위를 갈아 식사를 준비해주며 늘 아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이날 조미은씨는 옷가게를 찾아 큰마음 먹고 19만8000원짜리 외투를 샀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혀 보내고 싶었다.

다음 날 새벽, 아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부모 앞에 나타났다. 병원 영안실에 누워 있는 아들의 얼굴은 너무도 깨끗해 죽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들의 입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조미은씨는 아들의 죽음을 직감했다. 비어 있는 통 안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절망했던 순간이라고 조미은씨는 그 당시를 기억했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다.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도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식사를 거르는 기간이 길어지자 점차 몸에도 이상이 생겼다. 눈이 침침해지고 귀에선 이명이 들렸다. 어느 날엔 울고 있는데도 눈에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건 아니다’라고 느꼈다. 이대로는 지한이의 억울한 죽음이 알려지지도 못한 채 잊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때부터 억지로 식사를 했다. 움직이기 위해서 먹었다.”

1월31일 조미은씨는 서울 용산의 대통령실 앞 바닥에 누워 윤석열 대통령 면담과 사과를 요구했다. ⓒ시사IN 신선영

“대통령을 믿었다, 그런데…”

조미은씨와 남편 이종철씨는 다른 유족들을 찾기 시작했다. 조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연락처를 구했다”라고 표현했다. 만나서 무엇을 하겠다는 구체적 계획은 없었다. 그저 아들과 한자리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이태원에 왜 갔는지 궁금했다.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받고 싶었다.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을 찾아가는 등 수소문 끝에 몇몇 유족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 중순경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더 많은 유족들을 만나게 됐다. 다른 유족을 만날수록 의문점은 더 늘어났다. 아이들이 왜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많았다. 마약 부검 요청처럼 자신은 겪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지난해 11월22일 조미은씨는 카메라 앞에 나섰다. 오전 11시 민변 사무실 지하에서 열린 첫 번째 유가족 기자회견이었다. 조미은씨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윤석열 대통령님. 간절히 부탁하고 또 부탁드립니다. 10만명의 아이들도 보호할 수 없다면, 158명의 희생자와 다친 청년들도 구할 수 없다면 이 5000만 국민들은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 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믿을 것입니다.”

참사 이후 100일이 지난 현재, 당시를 떠올리며 조미은씨는 냉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가족이 요구를 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남아 있었다. “그때는 대통령이 이렇게 치졸한 사람인 줄 몰랐다. 그래서 진심으로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우리 이야기에 공감하기는커녕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9재날 트리 점등식에 가 얼굴 가득 미소 지은 사진을 봤을 때는 분통이 터졌다. 지금은 그저 우리를 더 방해하지만 않았으면 한다.”

지난 100일간 조미은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희망과 절망을 자주 오갔다. 정치인들의 말 한마디와 작은 제스처에도 기대를 품었다. 지난해 11월21일 유가족 10여 명은 국민의힘 지도부에 면담을 요청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담에서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유족의 이야기를 듣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자신의 아이도 이지한씨를 좋아했다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 비대위원장의 말에 조미은씨는 희망을 본 것 같았다.

이튿날, 믿음은 바로 깨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 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정진석 비대위원장은 전날 면담에 대해 “그분들의 의견이 158명 희생자 유가족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물을 흘리며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던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유가족협의회를 만들어 최대한 많은 유가족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미은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오합지졸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고맙다. 그 발언 덕분에 유가족협의회를 만들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10일 유가족협의회가 출범한 후 유족들은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경찰청 특별수사본부, 국회, 이태원을 돌아다니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야 국회의원들을 만나 철저한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며칠 뒤인 12월14일 합동분향소가 생긴 뒤로는 돌아가며 분향소를 지키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조미은씨는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은 남편 이종철씨와 함께 대부분 현장에 참석했다. 이종철씨는 운영하던 사업체를 접었다. 폐업 신고를 한 뒤 유가족협의회 일에 전념하고 있다. 현장에 나갈 때 부부는 언제나 이지한씨의 유품을 착용했다. “너무 소중해서, 잊고 싶지 않아서”라고 조미은씨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조미은씨는 여전히 아들의 양말을 신고 팔찌를 찬 채 집을 나선다.

유가족들이 전면에 나서자 2차 가해가 이들에게 쏟아졌다. 특히 비교적 얼굴이 많이 알려진 조미은씨와 이종철씨 부부에게 2차 가해가 집중됐다. 조미은씨는 초기부터 2차 가해에 적극적으로 맞섰다. 11월22일 유가족 중 처음으로 실명을 밝힌 채 진행한 KBS 뉴스 인터뷰에서 2차 가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랬던 그도 면전에서 이뤄진 비난을 견디지 못해 쓰러진 적이 있었다. 지난해 12월19일 오후였다. 이태원 인근 주민이라고 주장한 여성은 합동분향소 근처에 찾아와 유가족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귀신 축제에 갔다가 죽은 것을 왜 대통령에게 따지느냐”라며 유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종철씨와 조미은씨를 보고는 “탤런트 자식으로 시체팔이 한다”라며 비난했다. 조미은씨도 아들을 직접 지목해 비난하는 소리엔 버티지 못했다. 가해자와 설전을 벌이다 호흡곤란으로 구급차에 실려간 그는 일주일이 넘게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2월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독립적 진상조사 기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모르겠다”라는 증언만 반복된 국정조사

국정조사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즈음 조미은씨는 다시 현장에 나왔다. 다른 유족들과 함께 국정조사 회의장에 들어가 회의를 참관했다. 유족들이 국정조사에 거는 기대는 컸다. 파행을 거듭한 국정조사가 재개될 수 있도록 여야 국조특위 위원들을 찾아다니며 부탁했다. 그러나 어렵게 시작한 국정조사는 유가족들에게 실망감만 안겼다. 허위자료 제출과 거짓 증언을 둘러싼 실랑이에 시간이 낭비됐다. 결정적인 질문 앞에 증인들은 “보고받은 바 없다”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행정안전부가 재난관리주관기관이었다는 점이 새로 밝혀졌지만, 주관기관으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는지 따져 묻지 못했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행적 등 참사 초기부터 유족들이 제기한 질문에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조미은씨는 “참사의 원인을 명백히 알지 못하기에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기에 억울함만 남았다”라며 국정조사에 아쉬움을 토했다.

국민의힘 소속 위원들의 질의가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닥터카’ 탑승 논란에 집중되자 청문회 회의장 안팎에서 유족은 반발했다. 항의하는 유족에게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은 “같은 편이네, 같은 편이야”라고 발언했다. 조미은씨는 조수진 의원의 발언을 반박했다. 신현영 의원의 잘못을 짚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힘 의원 7명이 모두 같은 질의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는 것이다. 조미은씨는 진짜 편 가르기를 한 것은 조수진 의원이라고 비판했다.

국정조사 현장과 기자회견, 추모 행사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일상이 계속됐다. 그러다 이따금 찾아오는 여유, 그 시간이 조미은씨에게 고통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는 날이면 조미은씨와 남편 이종철씨는 집에서 마주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지난 1월27일엔 이지한씨의 지상파 데뷔작이 될 뻔했던 드라마 〈꼭두의 계절〉 첫 화가 방영했다. 이지한씨의 배역은 다른 배우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함께 모여 드라마를 지켜봤다. 아버지 이종철씨는 드라마를 보며 괴로워했다. “꽁지 잡힌 쥐”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이종철씨는 결국 TV를 꺼버렸다. 그날 이종철씨는 참사 이후 처음으로 아들 이지한씨의 방에 들어갔다.

어느 날 이지한씨의 누나 A씨가 어머니 조미은씨에게 그만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 A씨는 참사 이후 심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딸의 말을 들은 조미은씨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딸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라고, 사실은 이제 그만하고 지한이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딸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꾹 참고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지한이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어요.”

이태원 참사 100일(2월5일)을 앞두고 유족들의 발걸음은 다시금 바빠졌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는 참사 100일을 앞둔 1주일(1월30일~2월5일)을 ‘집중추모주간’으로 정했다. 수차례 기자회견과 1인 시위를 통해 2월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릴 시민추모대회를 알리고, 국정조사에서 밝히지 못한 사안을 조사할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를 촉구했다. 2월1일에는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만나 조사기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조미은씨 등 유가족협의회가 참석한 비공개 면담에서 주호영 원내대표는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2월4일 참사 100일 시민추모대회를 앞두고 조미은씨에게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한다. 많은 시민이 함께 참여해 추모하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도 광화문광장에서의 집회신고를 반려 중인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지만 조미은씨는 앞으로도 전면에 나서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어쩔 때는 용기를 잃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지한이 사진을 보면서 ‘엄마 갔다 올게’라고 이야기해요. 만약 제가 그 길에서 죽었다면 지한이는 분명 맨 앞에 섰을 거예요. 저도 지한이를 위해서 뒤로 물러설 수 없어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지한씨의 어머니 조미은씨가 1월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이태원 광장에 설치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고 이지한씨 사진이 붙어있는 조미은씨 휴대전화.ⓒ시사IN 신선영
기자명 글 주하은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ki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