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전 의원(국민의힘)의 도전이 시작도 하기 전에 막을 내렸다. 1월25일 나 전 의원이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대표 출마가 ‘분열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국민에게 좋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동시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오늘 이 정치 현실은 무척 낯설다.”
그간 나경원 전 의원의 행보는 당의 주류에 가까웠다.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이후,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에서 4선에 성공했다. 그사이 당 대변인(2006년)·최고위원(2010년, 2011년)·원내대표(2018년) 등 당의 요직을 거쳤다. 원내대표 시절이던 2019년 패스트트랙 파동 당시, 자유한국당의 강경 대응을 지휘하며 당내에선 ‘보수 전사’라는 평가도 받았다.
최근 선거에서 나 전 의원이 받아든 결과는 내리 3연패(2020년 총선,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내 경선, 2021년 당대표 선거)다. 그 기간에도 당원들의 지지는 견고했다. 보궐선거·당대표 선거 모두 당원 선거인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당원 100%’로 치러지는 이번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1월 초까지만 해도 나 전 의원은 당 지지층 대상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1월5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신년 기자간담회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이날 간담회에서 나 전 의원은 저출생 대책으로 헝가리식 ‘대출 탕감’ 방안을 언급했다. 이튿날 안상훈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윤석열 정부의 관련 정책 기조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라며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나 전 의원 측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나 전 의원 측에서 ‘스텝이 꼬였다’라고 판단한 건 이때부터다. 나 전 의원을 도왔던 박종희 전 한나라당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안 수석의 반박 이후 나 전 의원은) 부위원장직 사직서를 내려고 했지만, (대통령)비서실과 나경원 부위원장을 조율하려는 힘 있는 현역 의원들이 ‘(사직서를) 내지 말라, 부위원장을 맡긴 건 당대표 하지 말라는 사인이다’는 식의 메시지를 줬다. 나 전 의원도 오해를 풀려고 멈칫멈칫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나 전 의원은 안상훈 수석의 공개 반박이 나온 지 일주일 뒤인 1월13일 부위원장직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실의 대응은 강경했다. 같은 날 대통령실은 사표 수리 대신, 나 전 의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과 기후환경대사직에서 해임했다.
대통령실과 나 전 의원 사이에 공개적인 충돌은 한 차례 더 있었다. 1월17일 나경원 전 의원이 해임 결정을 두고 ‘전달 과정의 왜곡’과 ‘대통령의 본의’를 문제 삼자, 같은 날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정확한 진상 파악에 따른 결정이다. 대통령이 나 전 의원의 처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본인이 잘 알 것”이라고 응수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충돌하자 국민의힘 내부에선 나 전 의원을 두고 “‘반윤(윤석열) 우두머리(장제원 의원)”라는 공격이 나왔다. 국민의힘 초선의원 50명은 나 전 의원을 비판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경원 전 의원은 불출마 선언 자리에서 “초선의원들의 상황을 이해한다”라고 말했지만 속내는 다르다. 나 전 의원 측은 나 전 의원이 비애·분노·서운함 등을 느꼈을 거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실과 마찰을 빚은 이후, 나 전 의원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보였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상황이 흘러가는 모양새가 자신의 징계 국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준석이 다시 (당대표에) 나오면 안 되니까 이준석 징계 한 번 더 때리고, 유승민이 나오면 안 되니까 (경선룰을) 당원 100% 만들어서 유승민 주저앉히려 하고, 나경원이 나오면 안 되니까 계속 때리고(CBS 라디오).”
나경원 전 의원의 정치적 미래는?
이에 맞서는 나경원 전 의원의 전략은 이준석 전 대표·유승민 전 의원과 달랐다. ‘친윤’ 장제원 의원과 설전을 벌이고, 윤석열 대통령의 참모를 비판하면서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선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큰 성과를 이끌어낸 윤석열 대통령에게 감사하다” “윤석열 정부를 지켜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당대회 불출마를 결정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략이 됐다.
박종희 전 의원은 “나경원 전 대표가 출마할 경우, 대통령과 윤석열 정부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풀지, 어떤 메시지를 내놓아서 어떻게 표를 얻을지가 제일 어려운 문제였다”라고 토로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반윤은 될 수 없다”라는 나 전 의원이 선거 캠페인 도중 윤석열 대통령과 또다시 부딪친다면, 당대표 주자로서 유권자를 설득할 메시지를 정교하게 설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나경원 전 의원은 불출마 선언문 마지막에 “건강한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기원하겠다”라며 이렇게 적었다. “포용과 존중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 질서정연한 무기력함보다는, 무질서한 생명력이 필요하다.” 국민의힘의 한 중진 의원은 “다들 공감하는 얘기 아니겠나”라며 나경원 의원의 불출마를 이렇게 평가했다. “전당대회 때는 다양한 후보들이 나와서 당원들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만 있으면 살아 있는 당이라고 할 수 없다. (나 전 의원의 불출마로) 나경원과 나경원이 내는 목소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선택지가 줄었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잔치 같은 전당대회를 치러야 하는데 그게 사전에 봉쇄되는 건 당원들 입장에서도 좋지 않은 일이다.”
나 전 의원은 ‘당을 사랑하는 마음’을 연방 강조하며 “출마 결정은 쉬웠을지 모른다. 불출마 결정은 용기가 필요했다”라고 말했다. ‘친윤’ 당대표 주자로 꼽히는 김기현 의원은 “고뇌에 찬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화답했다.
이번 불출마 결정이 나경원 전 의원의 정치적 미래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앞서의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나 전 의원이 정치인으로서 생명력을 잃었다고 본다. “국민들은 (정치인이) 권력에 의해서 억압받고 어려움을 겪을 때, 피해가는 게 아니라 그걸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인정한다. 이걸 회복하려면 (나 전 의원에게) 상당히 시간이 필요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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