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6일 〈오징어 게임〉 에미상 수상 기념 간담회에서 황동혁 감독(왼쪽 네 번째)을 비롯해 배우와 스태프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관객 500만명은 들어야 하는데 384만명에 그쳤다. 제작사인 싸이런픽쳐스의 김지연 대표는 당시 황동혁 감독에게 “다른 거 없나.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나”라며 농담을 던졌다. 그때 황 감독이 대본을 보여주었다. “어린아이들이 하던 게임을 어른들이 목숨 걸고 하고 거액의 돈으로 인생을 바꾼다는 상황이 재미있었다.” 9월16일 〈오징어 게임〉 에미상 수상 기념 간담회에 참석한 김 대표가 회고했다.

그때 그 대본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2021년 9월17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나머지는 알려진 대로다. 첫 4주(28일) 동안 16억5045만 시청 시간을 넘기면서 53일간 전 세계 넷플릭스 순위 1위를 기록했다. 배우와 감독 등 제작진은 골든글로브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에서 트로피 35개를 받았다. 이정재 배우의 말대로 ‘꿈같은 날들’이었다. 출연자들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SNS 틱톡에서는 영상 조회수만 300억 뷰가 넘었다. 드라마가 극 중 주인공 기훈보다 더 ‘극적인’ 성공을 거둔 셈이다.

세계가 K(Korea)드라마를 주목했다. 〈가디언〉은 ‘모든 것은 K로 통한다’고 했고, 〈뉴욕타임스〉는 에미상 최초의 비영어권 작품이 상을 받았다는 걸 강조하며 ‘최대 승자’라고 치켜세웠다. AP통신은 ‘한국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면서 (에미상 수상에 대한) 반응은 누그러졌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 말대로 〈오징어 게임〉 나아가 K콘텐츠의 성공담에 익숙해진 1년이었다. 간담회에서 김 대표는 말했다. “‘K-무엇’을 만들자고 의도를 가지고 달려가는 순간 오히려 잘 안 되는 것 같다.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면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시간과 유형·무형의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오징어 게임〉이 나온 지 1년, 넷플릭스가 국내에 상륙한 지 6년이 넘었다. 국내 드라마의 제작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미디어 시장 중심에 자리 잡은 OTT

최근 몇 년, 국내 드라마 업계는 어느 분야보다 OTT 플랫폼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실감했다. 한 방송사 소속 A 드라마 감독은 “대체로 내수시장을 겨냥하고, 일부 해외시장을 타깃으로 하던 과거와 달리 처음부터 해외를 염두에 두면서 해외 OTT 플랫폼의 힘이 확실히 세졌다”라고 말했다. 전에는 방송국에서 만들고 편성한 드라마를 해외에 직접 판매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OTT 회사에 일괄적으로 판매하고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하는 처지에서는 호재다. 제작사 소속 B 드라마 감독은 “예전에는 지상파 3사를 두드려보고 안 되면 엎어야 했다면, 이젠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케이블도 있고 OTT도 있다. 채널이 늘어나 기회가 많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배우 캐스팅을 할 때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한다. 출연을 결정할 때 해당 드라마가 어느 OTT 플랫폼을 통해 방영되느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A 감독은 “OTT를 통해서만 방영될 경우 어느 OTT인지, 지상파나 케이블을 통해 방영되더라도 해외 송출권을 어느 OTT가 가져가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드라마 감독 C도 배우들이 채널의 무게를 따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이 결정적이었다. “월드 스타와 업계 ‘미생’ 간 간극이 커졌다. 배우들 입장에서 ‘인생 한 방’ 같은 느낌이다. 성공하면 끝없이 성공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술렁임이 있는 것 같다.”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OTT가 미디어 시장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지난 4월 발표한 ‘세대별 OTT 서비스 이용 현황’에 따르면 국내 OTT 이용률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관통하며 급상승했다. 2019년 41.0%, 2020년 72.2%, 2021년 81.7%로 늘었다. 지난해 11월 디즈니플러스, 애플TV플러스가 국내에 진출했다. 지난 8월 기준 주요 OTT 이용자 수는 넷플릭스가 가장 많고 웨이브, 티빙, 쿠팡플레이 순이다(〈그림 1〉 참조). 

ⓒ시사IN 최예린

특히 OTT 선호도는 드라마 업계에서 두드러진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국내 171개 제작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2021 방송 프로그램 외주제작 거래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드러난다. 프로그램 제작 계약 시 어떤 사업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느냐는 질문에 드라마 제작사들은 해외 OTT(77.8%), 종편(74.1%), 국내 OTT(63%), 지상파(59.3%) 순으로 답했다. OTT에 대한 호감이 예능 분야에 비해 두드러진다. 지상파의 영향력의 감소도 뚜렷하다(〈그림 2〉 참조).

ⓒ시사IN 최예린

OTT의 강세를 등에 업고 드라마 규모 자체도 커졌다. 제작 편수와 제작비가 그걸 증명한다. 최근 KB증권은 리포트를 통해 국내 콘텐츠 제작사의 연간 드라마 제작 편수가 지난해 140편 수준에서 올해 160편으로 증가했다고 전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하던 2016년 회당 4억원이던 드라마 제작비도 2020년 회당 6억~7억원 수준으로 올랐고 많게는 8억원까지 상승했다. 최근 넷플릭스가 공개한 6부작 드라마 〈수리남〉에는 제작비가 350억원 들었다. 영화감독들이 시리즈물을 만들면서 영화와 드라마 사이 경계도 흐려졌다.

한국 드라마가 해외시장을 의식한 시간은 짧지 않다. 해외 판매 수익이 늘면서 한류스타 중심의 제작 관행이 만들어졌다. 한동안 일본 시장에서 ‘묻지 마 투자’가 일었지만 한·일 관계가 악화되자 중국 자본이 흘러들었다. ‘사드 이슈’로 그마저 중단되었다. 국내시장만으로는 커진 제작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배우들의 몸값, 감독·작가의 개런티를 기존 방식으로 회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타이밍에 넷플릭스가 들어왔다.

CJ ENM과 JTBC 드라마, 지상파 드라마의 방영권을 사들이던 넷플릭스가 직접 제작한 첫 드라마는 2019년 방영된 〈킹덤〉이다. 매년 국내 제작 드라마 편수를 늘려 올해는 30여 편이 제작되거나 예정되어 있다. 국내외 OTT가 늘면서 플랫폼 가입자의 증가세는 주춤한 상황이지만 한국 시장은 강고한 상승세다. B 감독은 “옛날에는 홍콩·일본이 아시아의 교두보였다면 요즘은 일단 한국을 거쳐 동남아로 나간다. 이런 흐름은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산업 지형이 재편되는 가운데 제작사의 힘도 커졌다. OTT를 경험한 시청자가 늘면서 채널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작품을 고르는 경향이 강해졌다. 방송사보다 제작사의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 유건식 KBS공영미디어연구소장은 “드라마가 외주제작 형태로 넘어갈 때부터 시작된 흐름이지만 OTT까지 들어오면서 힘의 균형이 제작사로 완전히 넘어갔다. 방송사가 힘을 가지려면 기획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제 제작사의 몫이다. ‘좋은 작가’를 확보하면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OTT든 어느 채널에서도 방영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넷플릭스가 공개한 6부작 드라마 〈수리남〉은 제작비 350억원이 들었다. ⓒ넷플릭스 제공

기획 프로듀서 역할 강조돼

제작 업무도 분화되었다. 지상파와 케이블채널, OTT와 두루 작업을 해본 C 감독은 달라진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좋게 얘기하면 전문적으로 업무가 분화되어서 내 일만 하면 된다. 달리 말하면 연출자가 고용인이라는 감각이 확실해졌다. 예전에는 감독이 작품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작가와 상의하며 통일성 있게 만들어간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주어진 대본을 영상으로 번역해주는 번역가가 된 것 같다. 연출을 대하는 업계의 태도가 확실히 정리된 것 같다. 기획이 우선이다.” 제작사 주도하에 주연배우 캐스팅하듯 연출자를 섭외하고 나면 감독에게는 ‘기획의 비전’을 소화해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방송사 소속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상 프리랜서처럼 일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A 감독은 “과거에는 해당 채널에 편성을 하려면 그 채널 연출이 반드시 작품을 해야 했다. 제작사가 원치 않더라도 방송사가 전제 조건으로 내걸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채널의 위상이 떨어지니까 그걸 고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상파 감독들은 자신의 작품이 채널에 묶여 다양한 플랫폼을 만나지 못할까 봐 염려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제작사 규모와 성격에 따라 업무 범위가 다르지만 기획 프로듀서는 드라마 작업의 첫 단계를 책임진다. 가령 원작이 있는 경우 그걸 구매하고 어떤 작가에게 맡길지, 원작 그대로 갈지 달리 갈지를 판단한다. B 감독은 “기획 프로듀서 일을 시작할 때 직무 자체에 대한 인지도가 없는 편이었다. 10여 년 지나자 공로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콘텐츠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어떤 걸 제작할지 결정하는 기획 파트의 중요성이 높아졌다”라고 말했다.

〈오징어 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영화로 구상했다가 각종 한계에 부딪혀서 포기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다.” 글로벌 플랫폼 덕분에 채널에서 방영하기에는 좀 낯선 〈오징어 게임〉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유건식 소장은 2020년 넷플릭스 드라마를 제작한 제작진 18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18명 중 15명이 향후에도 넷플릭스 드라마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이유로는 안정적인 제작비, 오픈된 소재, 짧은 러닝타임, 시청률 부담 해소, 글로벌 진출 등을 들었다(〈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시장을 바꾸다〉, 유건식 지음).

넷플릭스는 그동안 기존 방송사에서 방영하기 어려운 소재의 드라마를 직접 제작하고 한국에서 인기 있을 드라마(멜로 등)는 방영권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국내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제작사의 선호도는 여전히 높지만 최근 들어 무작정 넷플릭스행을 희망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OTT 플랫폼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제작비 전액과 10~20%의 추가 수익을 보장한다고 알려졌지만 작품 수가 늘면서 편차가 생겼다. 국내 OTT 플랫폼과 일한 경험이 있는 C 감독은 “손에 꼽히는 톱(top)급 연출이나 작가, 배우들이 아닌 이상 어느 플랫폼에서 해도 상식적인 제작비를 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오징어 게임〉이 남긴 지식재산권(IP) 논쟁도 한몫했다. 제작비는 300억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지만 〈블룸버그〉는 드라마의 경제적 가치가 1조원 넘는다고 보도했다. 넷플릭스가 IP를 가지고 있어 추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오징어 게임〉의 그늘로 지적됐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제작사 에이스토리가 지식재산권을 갖고, ENA·넷플릭스와는 방영권 계약만 체결했다. ⓒENA 화면 갈무리

그런 면에서 최근 성공을 거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사례가 주목받았다. 제작사인 에이스토리가 IP를 갖고 ENA, 넷플릭스와는 방영권 계약만 체결했다. 그 때문에 제작사는 기존 넷플릭스 오리지널과 달리 해외 리메이크 등 2차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채널에서 방영하기 어려운 성격의 드라마는 제작비를 보장하는 넷플릭스를 선호하지만 작품 성격에 따라서 방영권만 가져오는 방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저작권 이슈가 증명하듯 달라진 제작 환경이 모두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규모가 커지고 제작 편수가 늘면서 채널을 확보하는 게 전만큼 여의치 않다. 준비 기간이 한없이 길어지기도 해 캐스팅에 난항을 겪는다. C 감독은 “주요 갑·을 관계가 채널(플랫폼)과 제작 쪽으로 정리됐다. 그들끼리의 이슈가 너무 커서 실제 드라마 퀄리티를 내야 하는 연출자 선에서의 고민이 병·정 수준으로 밀리는 느낌이 있다”라고 말했다. 감독이나 작가의 입봉 루트가 다양해지고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현장에서는 피로도를 호소하기도 한다. B 감독은 검증 안 된 대본과 배우를 지적했다. “작품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퀄리티가 전반적으로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고 생각한다. 치킨 게임으로 가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제작 시장의 양극화도 당면한 과제다. 주요 OTT 사업자가 선호하는 장르가 제한적이고 해외 사업자에게 투자를 받을 수 있는 회사 역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제작사가 해외 OTT의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는 배경이다.

황동혁 감독은 ‘K컬처’가 환영받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항상 대답은 같았다. 우린 열심히 만들고 있었고,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해왔다.” 창작자들의 노력이 시대적 흐름을 탔다. 정부는 내년 방송영상콘텐츠산업 육성 예산을 올해보다 767억원 늘린 1228억원으로 책정했다. 이 중 OTT 분야 예산은 600억원이다. 지식재산권과 제작비 세제 혜택 등의 논의도 나오고 있다. 콘텐츠 산업 지각변동의 시기, 승자는 누가 될까?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 456명처럼 한국 콘텐츠 업계도 게임에 던져졌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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