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6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오징어 게임〉과 함께하는 뉴욕 속 한국 여행’ 행사 참가자들이 타임스퀘어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FOMO라는 신조어가 있다. 직역하면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fear of missing out)’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충동적 주식투자 심리 등 경제 분야에 주로 쓰이지만 영어권에서는 ‘어떤 유행을 따라잡으려는 강박’ 모두를 이렇게 부른다. K드라마가 단순한 흥행을 넘어 FOMO를 유발하고 있다는 게 해외 매체들의 평이다. 10월20일 〈워싱턴포스트〉는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강력한 FOMO”를 불러왔다고 적었다. 해외 온라인 포럼에는 ‘FOMO 방지를 위해 〈오징어 게임〉 본 척하는 법’이라는 게시물이 돈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 흥행 성적은 한국 드라마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그러나 홀로 튀는 예외적 사건은 아니다. ‘K드라마 현상’으로 묶을 만한 흐름이 보인다. 지난해 12월 나온 스릴러물 〈스위트홈〉은 한국 드라마 최초로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률 10위권(톱 10)에 올랐다. 최고 순위는 3위였다. 지난 10월15일 공개된 〈마이 네임〉 역시 한 달 가까이 드라마 부문 10위권을 유지했다. 11월19일 방영을 시작한 〈지옥〉은 열흘 넘게 세계 시청률 1위에 올라 있다(12월1일 기준). 외신은 리뷰 기사를 쏟아내고, 해외 누리꾼들은 SNS에 관련 밈(meme, 패러디)을 퍼뜨린다.

K드라마 현상의 핵심은 ‘서구권 인기몰이’다. 당초 주로 흥행하는 무대가 아시아권역 내인 ‘한류 드라마’와 구분하기 위해 생겨난 용어가 K드라마다. 자동차나 휴대전화, 운동선수의 해외 성공과 달리 K드라마의 인기에는 단순히 ‘선진국 기술을 따라잡았다’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문화 콘텐츠는 사상을 담기 때문이다. 세계 영화 시장을 미국이 석권해온 까닭은 미국이 가장 강하거나 부유한 국가여서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자유, 시민권 등 할리우드가 전파해온 ‘미국적’ 사상을 세계가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K드라마의 약진은 이 전통적 세계에 균열을 불러왔다. 한국이 서구에 사상을 수출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해외 언론도 궁금하게 여긴다. 11월26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배우 윤여정씨는 “몇 주 전 영국 〈가디언〉 기자가 한국 대중예술이 이렇게 갑자기 각광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라고 말했다. 올해 윤씨는 영화 〈미나리〉로 미국 아카데미상(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다. 윤여정씨는 〈가디언〉에 “한국에는 늘 좋은 영화·드라마가 있었다. 단지 세계가 지금 우리에게 갑자기 주목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근래 세계가 한국 드라마를 주목한 데에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역할이 단연 크다. 제작과 방영 양쪽에 기여했다. 넷플릭스는 직접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어 창작자들에게 제작비를 지원했다. 넷플릭스는 간접광고(PPL) 부담을 지우지 않고, 콘텐츠 내용에도 간섭하지 않는다. 관객의 접근성도 높였다. 현지 방송사·극장의 벽이 사라졌고, 더빙을 제공해 언어의 한계도 허물었다. 얄궂게도 이 추세를 부추긴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 때문에 넷플릭스 시청 시간이 늘어나며 콘텐츠 ‘소모’가 가속화됐다. 해외 온라인 게시판에는 유명 영어 드라마를 모두 본 뒤 여타 콘텐츠를 찾아다니던 와중 우연히 K드라마를 ‘발견’한 경험을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20년 2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 국제영화·각본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한 〈기생충〉. ⓒCJ엔터테인먼트 제공

K드라마와 ‘한류 드라마’의 차이

그런데 사실 넷플릭스 진출 이전에도 서구권에는 한국 드라마 마니아들이 있었다. 넷플릭스는 2016년 한국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14년 한국 드라마에 대한 미국 시청자 수를 약 1800만명으로 추산했다. 한 문화계 관계자는 “넷플릭스가 왜 한국에 진출했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미 2015년께 미국 내 외국어 드라마 중 한국 드라마가 가장 시청 인구가 많다는 조사가 나와 있었다. 한국을 성공 가능성 있는 파트너로 여겼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종전에도 한국 드라마에 관심을 가진 시청자들이 서구권에 있었는데, 넷플릭스가 한국 제작자와 함께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게 되자, 이 저변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설명이다.

여기까지 보면 K드라마 현상은 2000년대 초반 한류 드라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읽힌다. 중국과 일본에서 품질을 검증받은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 방영이 가능한 플랫폼에 오르자 서구권이 “갑자기 주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인기를 끄는 ‘K드라마’와 전통적 ‘한류 드라마’의 면면을 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좁게 보면 장르, 넓게 보면 스타일 차이가 크다. 〈오징어 게임〉을 비롯한 K드라마는 주로 스릴러, 공포물에 속한다. 초현실적 재난 상황을 다루며, 피가 튀고 살점이 잘린다. 한류 드라마는 대부분 로맨스, 가족물이다. 젊은 배우들의 사랑과 주변 인물들의 서사가 주된 내용이다. 사실 최근까지도 한국 드라마의 주류 장르는 이쪽이었다. ‘장르물’이라고 불리는 〈오징어 게임〉 같은 드라마는 철저히 마니아들의 영역이었다.

한류 드라마(로맨스물)가 서구권에서 보편적 인기를 끌지 못한 까닭이 오로지 방송사와 언어의 벽 때문이었다면, 이를 해결한 넷플릭스 등장 이후에는 ‘한국 주류 드라마’인 로맨스물 역시 인기를 끄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넷플릭스 시청률 최상위권에 오르는 K드라마 가운데 로맨스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 세계는 ‘한국산 드라마’라고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워싱턴포스트〉 〈롤링스톤〉 등에 기고해온 미국 평론가 레지나 킴은 미국 일반 시민들이 한국 드라마에 대해 입장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사IN〉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이전에도 미국에 적지 않은 한국 드라마 마니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로맨틱 코미디는 미국 주류 시청자를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라고 답했다. “친구나 동료들과 터놓고 한국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불행히도 아시아 드라마 시청을 굉장히 특이하고 기이한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몰래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 주류 매체들이 조명한 최초의 K드라마는 〈킹덤〉(2019)이며,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은 “미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쿨하고 트렌디하다고 인식하게 했다”라고 적었다. 다수 미국인에게 쿨한 것은 ‘K드라마’일 뿐, 한류 드라마는 아닌 것이다.

아시아를 사로잡은 한류 로맨스 드라마가 왜 서구에선 ‘이상한 취미’에 머물렀을까? 레지나 킴은 인종과 정서 문제를 이야기한다. “‘동양인은 매력적이지 않다’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있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양인과 한국의 ‘미적 기준’이 다르다고 했다. “(한류 드라마 속) 한국 배우들은 ‘한국계 미국인 배우’들과 매우 다르게 생겼다. 미국인 친구들은 한류 드라마의 한국 배우들이 너무 창백하고, 어려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 모두가 배우 김태희의 사진을 보고 ‘평범하다’고 말했다. 립글로스를 바른 남자 배우들도 굉장히 기이하게 여긴다.” 대사나 연기도 미국 풍토에 맞지 않았다. “일부 연기가 ‘지나치게 귀엽다’ ‘과장되어 있다’는 평이 있다. 가령 애교 부리는 연기를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새롭게 탄생한’ K드라마는 어떤 요소로 ‘주류 미국인’을 설득했을까. 혹시 BTS의 세계적 성공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마니아의 절대적 수를 늘린 걸까. 레지나 킴은 〈오징어 게임〉의 관객이 반드시 BTS 등 한국 아이돌의 팬은 아니라고 말했다. “일부 K팝 팬들이 아이돌 출연 드라마에 빠지기는 했지만 이 드라마들이 주류 관객을 사로잡지는 않았다.” 그는 ‘추측’임을 전제로, “영화 〈기생충〉이 미국인 시청자들을 〈오징어 게임〉으로 이끌었을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교집합은 무엇일까? 쉬운 답은 스릴러 장르다. 그러나 반드시 K드라마가 아니라도 스릴러물은 이미 넷플릭스에 차고 넘친다. 2021년 나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셋 중 한 편 이상이 스릴러로 분류되거나, 스릴러 요소를 담고 있다. 제작비를 많이 들이거나 평단 반응이 좋은 스릴러들도 대다수가 넷플릭스 시청률 10위권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만다. 즉, K드라마의 성공 요인을 단지 스릴러 장르 덕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국 인터넷 매체 〈리뷰긱(The Review Geek)〉은 〈오징어 게임〉의 성공을 ‘미국 제작자들이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생긴 빈 공간 덕분’이라고 본다. 10월4일 기사에서 이 매체는 “할리우드가 창조적으로 파산한 것 같다”라고 썼다. 〈리뷰긱〉은 우선 디즈니가 미국 콘텐츠 업계를 독점하다시피 한 현 상황을 지적했다. “디즈니는 속편과 리메이크, 슈퍼히어로물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렇게 해도 일정 수준의 흥행은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넷플릭스가 해외로 눈을 돌렸고, “부자는 점점 부유해지고 빈자는 점점 가난해지는 우리의 현 상황”을 공략한 〈오징어 게임〉이 새 자극을 원하는 관객의 간택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K드라마 특유의 스타일을 조명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스탠퍼드 대학 대프나 주어 교수(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는 11월9일 〈스탠퍼드 뉴스〉 인터뷰에서 “예측 가능성과 독창성의 균형”을 주된 특징으로 꼽는다. 그가 지적하는 ‘예측 가능성’은 그간 국내에서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라고 지적해온 바와 대체로 겹친다. “극빈층이 부자가 되고, 부유한 남자가 가난한 여자를 만나고, 자녀가 부모의 뜻을 거역한다.” 사실 그가 “한국식 전개”로 꼽는 독창적 요소 몇몇도 국내 관객에겐 익숙하다. 가령 “등장인물은 연장자를 공경하고, 아들딸은 효도를 한다”. 그의 언급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인간화(humanize)’다. “한국 드라마는 가장 냉담한 억만장자조차 인간화하고, 관객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씨 역시 한국 장르물의 특이한 점으로 ‘인간’을 꼽는다. “한국 드라마는 어떤 장르든 ‘인간’이 보여야 흥행한다. 미제 사건을 다루는 내용 등의 장르물 가운데 미국에서 먼저 나오지 않은 소재가 있나? K드라마는 이걸 들여와서 한국적 색깔을 입혔다. 같은 범죄물이라도 ‘어떻게 죽일까’만 고민하는 게 아니라 (형사가) ‘어떻게 살릴까’도 생각하는 거다. 이게 한국형 장르물의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메시지다. 장르물의 형태를 빌려, 사회구성원들이 느끼는 첨예한 갈등 지점을 직설적으로 꼬집는다는 것이다. 최근 흥행하는 K드라마들이 대체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왜 한국 드라마는 더 직설적이고 사회비판적인가? “한국은 서구가 겪은 사회문제를 압축적으로 감당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희생된 것들에 대해 한국 창작자들이 더 민감하다. 개구리 삶는 것과 같다. 서구는 천천히 불을 올렸고 한국은 끓는 물에 빠트렸다. 한국 드라마를 보는 서구 관객들은 자기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다.” 그가 K드라마의 대표적 주제의식으로 꼽은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다.

K드라마의 ‘중산층 이데올로기’

기자 출신 아시아 문화 연구자인 정호재씨는 최근 〈다시, K-를 보다〉라는 책을 냈다. 정 작가는 최근 인기를 얻은 K드라마들이 단순히 ‘사회비판적’인 것을 넘어, 어떤 지향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중산층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양극화된 현실을 비판하며 보통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과 계층 통합을 주된 논제로 올린다는 것이다. “K드라마의 주제는 궁극적으로 풍요로운 삶이다. 자가 주택을 갖고 차를 가지고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중산층이 늘어나는, 평등한 사회를 요구하는 지향이다.” 서로 달라 보이는 K드라마들의 교집합이 여기 있다고 그는 본다.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와 달리 〈킹덤〉 속 좀비는 반상이 있고, 사람들의 재난 대처 방법도 계급에 따라 갈린다. 〈지옥〉의 핵심적 인물 중 하나는 빈곤한 미혼모다. 경제적 궁핍에 빠진 자들이 게임에 참여하는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이것은 최근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한 베트남·인도네시아·중국 등 전 세계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봤을 때 K드라마는, K팝보다 〈기생충〉과 훨씬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미국은 어떨까. 정호재씨는 중산층으로 통합되는 사회가 ‘미국의 잃어버린 꿈’일 수 있으며, 이런 분위기가 문화산업에도 반영되었다고 진단한다. “미국 문화산업의 대작은 주로 SF다. 초현실적 인물과 외계인을 다룬다. 전문직은 수백억 원을 벌고 빈곤층은 의료보험조차 불안정한 사회가 문화산업을 점차 판타지로 이끈 것이다. 자본 게임이 너무 극단으로 흐른 사회에서는 계층 통합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여기에 더해 그는 창작자들의 ‘개인사’도 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1960~1970년대생 영화·드라마 감독들은 유년 시절 서울의 판자촌을 목격했다.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까? 사회가 양극화된 채 수세대가 지나버렸다.”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경제 정의’를 넘어선 철학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드라마, 영화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게임이다. 인간성에 대한 보편적 철학이 들어가야 한다. K드라마의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다수 일반인의 평범한 욕망을 겨냥한다. 따라서 도덕적·보편적 인간관을 담고 있다.” 책에서 그는 이 가치관을 두고 ‘아시아적 보편성’이라는 표현을 쓴다. 내용은 단순하다. “공자의 군자론과 비슷하다. ‘바른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세계 평화를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 꿈이 되는 평범한 윤리에 가깝다.” ‘뻔해 보이는’ 윤리를 담은 K드라마 속 대사와 연기는 종종 ‘신파’라는 혹평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레지나 킴에 따르면 예상외로 “미국 시청자 다수는 K드라마의 신파 연기를 극찬한다”.

‘지역적이면서 보편적인’ 작품이 세계에서 통한다는 생각은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상식이 되고 있다. 무엇이 지역적이고 무엇이 보편적일까. 넷플릭스를 타고 불어온 K드라마 바람은 힌트가 될 만한 사례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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