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17일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전기차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AP Photo

미국이 구축해온 국제무역질서를 미국 스스로 허물고 있다. 이미 수년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IRA)은 체스 게임의 “체크(장기에서는 ‘장군’)”를 외치는 순간에 해당한다. 한국과 유럽연합(EU)의 무역 당국은 ‘WTO 제소’를 시사하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미국이 WTO 제소가 무력하도록 이미 판을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IRA는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부자 증세로 7400억 달러를 조달해 ‘기후위기 대처’ ‘복지 강화’ 등에 사용한다. IRA는 미국의 산업정책을 위한 법률이기도 하다. 미국은 그동안 금융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을 적극 육성하는 대신 제조업은 해외에 맡겨왔다. 그랬던 미국이 제조업을 다시 자국 영토 내로 되돌리려 한다. 한국·독일 같은 제조업 강국들로서는 IRA를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바이든 정부가 제조업 강국들에게 겨눈 단도의 이름은 ‘세액공제(tax credit)’다. 미국 소비자가 어떤 제품을 샀을 때 그 비용 중 일부를 정부 예산으로부터 돌려받는 제도다. IRA 세액공제의 대상은 ‘미국산’ 전기차, 청정에너지 등이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소비자들이 세액공제로 대폭 할인된 미국산 전기차와 청정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면 탄소 배출 감소는 물론이고 미국 산업도 육성할 수 있을 터이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은 전기차를 샀을 때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다만 그 전기차는 다음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첫째, 북미 지역(미국·캐나다·멕시코)에서 최종 조립된 제품이어야 한다. 한국·영국·유럽연합·일본·중국 등에서 조립되어 미국에 수출된 전기차는 세액공제를 받지 못한다.

둘째, 전기차 배터리를 구성하는 핵심 광물(알루미늄·흑연·리튬·니켈) 가운데 40% 이상이 미국 및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서 채굴·가공되어야 한다. 이 비율은 매년 10%포인트씩 올라가 2027년에는 80%에 도달한다. 특히 핵심 광물은 ‘요주의 해외 법인(foreign entity of concern)’에 의해 채굴, 가공, 재활용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요주의 해외’는 이 부문 글로벌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중국을 의미한다.

셋째, 전기차의 배터리 부품(양/음극재, 음극 기판, 솔벤트, 전해질 등) 역시 50% 이상이 북미산이어야 한다(2028년부터 100% 북미산).

IRA는 청정에너지(태양열·풍력·지열) 부문에서도 미국산 제품(태양광 패널·풍력 터빈 등)에 대한 세액공제 규모를 외국산보다 10%포인트 높였다. IRA와 별도로, 지난 9월 중순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에 따르면 미국에서 생산된 바이오 제품에만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을 늘리기 위해 지난 8월 초 제정된 ‘반도체와 과학 육성법(The CHIPS and Science Act)’과 비슷한 취지다.

기후위기 전문가들은 IRA의 취지에 대체로 긍정적이다. 조너스 냄 존스홉킨스 고등국제연구소 조교수 등의 〈워싱턴포스트〉(8월12일) 기고문에 따르면, “IRA는 미국 연방정부가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나선 가장 야심찬 노력”으로 “기후위기 정책(지구온난화 둔화)과 산업정책(미국 제조업 육성)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다. 국가안보 차원의 대응이기도 하다. 미국은 청정에너지 등 첨단산업의 소재와 부품에서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중국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권위주의 국가다. 정치적 분쟁을 상대국에 대한 경제적 강압으로 해결하려는 유혹에 취약하다. 한국은 2016년 사드 배치로 중국의 경제보복을 감수한 바 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첨단산업 지배를 우려할 이유가 충분하다.

“다자간 무역체제는 죽었다”

현대 아이오닉5 같은 한국산 전기차의 미국 시장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현대차 제공

한국·일본·유럽연합 등 미국의 무역 상대국이자 동맹국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현대 아이오닉5, 기아 EV6 등 한국 및 ‘미국 이외 지역’에서 만든 전기차들의 미국 시장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세액공제를 받는 미국산 전기차들이 동종의 한국산에 비해 최대 7500달러까지 싸게 팔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제약사로부터 위탁받아 생산한 의약품을 다시 미국에 수출해온 삼성바이오로직스나 SK바이오사이언스도 만만치 않은 무역장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IRA는 세계무역기구(WTO)로 상징되는 그동안의 국제무역질서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산업정책을 지지하는 미국의 통상 분야 비영리기구인 ‘미국의 번영을 위한 연합(CPA·Coalition for a Prosperous America)’ 같은 단체가 이렇게 표현할 정도다. “‘다자간 무역체제(WTO를 의미)’는 바이든 대통령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서명으로 칼에 찔려 죽었다.” 다만 이 문장의 뉘앙스는 바이든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찬사다.

CPA가 IRA를 ‘WTO 살해범’으로 단정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IRA가 WTO 규범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차별금지’를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별금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이다. ‘상품은 그 자체의 경쟁력으로 평가되어야지 국적에 따라 차별되면 안 된다’는 이른바 ‘자유무역’의 이상이 WTO 조항들에 촘촘히 구현되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미국은 ‘수입 제품’과 ‘미국산 제품’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내국민대우). 국산품에 10%, 수입품에 20%의 국내 세율(내국세율)을 부과해 후자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소리다. 또한 미국은 자국에 수입된 WTO 회원국들의 제품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최혜국대우). 예컨대 멕시코산에 10%, 한국산에는 20%의 내국세율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같은 WTO의 차별금지 원칙에도 ‘예외’는 있다. 아무리 냉철한 자유무역의 이상을 들이대더라도 회원국들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 보호·육성해야 하는 산업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현실까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IRA의 목표인 ‘미국 산업 보호·육성을 위한 수입품 가격의 상대적 인상’ 역시 WTO에서 전면 금지되어 있진 않다. 다만 그 수단은 관세 인상(다른 회원국과 협의 필요)으로 한정되어 있다. 내국세 제도의 변경으로 국산품의 경쟁력을 올리는 것은 명백한 WTO 위반이다.

미국산 전기차 관련 IRA 조항은 내국 세제 변경으로 미국산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행위다(내국민대우 위반). WTO 회원국을 ‘미국의 FTA 체결국’과 ‘비체결국’으로 갈라 체결국을 우대하는 ‘배터리 핵심 광물’ 관련 규정 역시 최혜국대우 위반으로 다툴 소지가 크다.

더욱이 어떤 나라든 다른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를 시행하는 경우, 그것이 조약(예컨대 WTO)과 어긋나지 않는지 검토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수입제한 조치들을 단행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행위이므로 WTO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다’ 같은 대의명분을 내세우곤 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9월 말 현재까지 ‘IRA의 WTO 위반’ 여부에 대한 어떤 논의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IRA를 행정부와 의회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부터 WTO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과실범’이 아니라 ‘확신범’의 마인드다.

WTO에 대한 미국의 불만 

무역에서 IRA 같은 차별 행위가 용인된다면 다른 나라들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20세기 초엔 다수 국가들이 제각기 시행한 ‘무역장벽 높이기’가 대공황 및 전쟁을 초래했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이후 WTO로 흡수)라는 수단으로 ‘규칙 기반 무역 시스템(rules-based trading system)’의 구축을 도모한 바 있다. 국가들이 강대국의 힘이나 의도가 아니라 초국가적인 규칙(물론 국가들의 합의에 따라 정한)에 따라 교역하는 ‘무역에서의 법치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모든 국가들이 ‘규칙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주권 중 일부를 희생할 수 있다’는 태세를 갖춰야 한다. 규칙 위반을 처벌하는 시스템도 필수다. 

그러나 ‘논의의 공간’에 가까웠던 GATT에는 그런 힘과 기능이 없었다. 1995년에 출범한 WTO는 GATT의 강화·확대로 회원국들의 무역 관련 행위에 대한 실질적 감독을 가능하게 만들어 ‘규칙 기반 무역 시스템’을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6월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 ⓒEPA

WTO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WTO 설립을 주도한 미국이 이 무역체제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거스른다고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패권국가 입장에선 다른 수많은 나라와 협의해 규칙을 정하는 절차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WTO에 규정된 미국의 양허관세(그 이상 올리지 못하는 관세)는 매우 낮다.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자료에 따르면, 각국의 평균 양허관세율은 미국 3.4%, 유럽연합 4.9%, 영국 6.0%, 일본 4.5%, 중국 10.0%, 브라질 31.4%, 인도 50.8% 등이다. 한국은 17.0%. WTO가 중국·브릭스(BRICs, 신흥경제국) 등의 부상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변동 및 이에 따른 새로운 이슈들을 미국의 국익에 합치하는 방향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강했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은 여러 수단으로 WTO에 저항하게 된다. 첫째, 한·미 FTA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처럼, 하나의 해외 국가 혹은 소수의 해외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대다수 국가가 가입한 WTO가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부 회원국들 사이에서만 더 좋은 혜택을 주고받는 ‘자유무역 블록’을 만들었다. 동질적 집단 내에서 분파를 조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이 이런 일을 추진한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회원국들이 블록화해서 다른 회원국들을 소외시키더라도 해당 블록의 무역장벽이 WTO의 그것보다 낮다면(예컨대, WTO에서 특정 상품의 관세율이 10%인데 블록에서 5%라면), 최혜국대우 위반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기이한 WTO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엔 WTO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WTO 위반 가능성을 무릅쓰면서, 중국과 유럽연합 등의 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주요 상품들에 대한 관세를 일방적으로 대폭 올린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 대 중국, 혹은 미국 대 유럽연합 간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일이 사실상 WTO의 규범 밖에서 되풀이되었다. 피 튀기는 주먹다짐을 멍하니 뒷짐 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감독기구(WTO)의 권위는 어떻게 될까?

셋째, 2019년에는 규칙 위반자를 ‘처벌’하는 WTO 기능을 마비시켰다. 회원국들은 무역분쟁에서 합의하지 못할 때 WTO의 분쟁해결기구로 사건을 가져간다. 2심제다. 1심에선 사실관계를 따져 분쟁 양측의 승패를 가른다. 2심(WTO 상소기구)은 1심 결정이 WTO 규범을 제대로 해석한 것인지 심리해서 최종 판정을 확정한다. 2심이 진행되려면 최소한 세 명의 위원이 필요하다. 위원들에겐 임기가 있다. 그때마다 기존 위원을 재임명하거나 새 위원을 임명해야 상소기구가 돌아간다. 

WTO 상소기구가 헛도는 까닭

미국은 2017년부터 (재)임명을 방해했다. 2019년 12월엔 위원 두 명의 임기가 만료되어 한 명만 남았는데 미국은 모든 후보를 ‘비토’해버렸다. 상소가 동결되었다. 1심에서 패소한 국가는 상소만 제기하면 최종 판정을 한없이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WTO는 국가들의 협정 위반 여부를 감독할 실질적 힘을 상실했다.

2018년 9월24일 당시 한·미 정상이 FTA 개정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를 혐오하는 미국의 진보진영 일부도 ‘상소기구 동결’엔 환호한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 매체 중 하나인 〈아메리칸 프로스펙트〉(5월31일)의 주장을 읽어보자. “(트럼프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였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외교적 강공책과 더불어 전략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상소기구 위원의 추가 임명을 막아 WTO를 주변화시켜버린 것이다. 이로써 구속력 있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WTO의 권력이 중단되었다. 미국은 WTO의 주변화 덕분에 산업정책을 추진할 공간을 열 수 있다. WTO 규범 위반으로 간주되는 상계관세도 다른 나라에 부과할 수 있다. 미국은 국내 생산능력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상계관세는 상대 수출국이 특정 상품에 대하여 수출장려금·보조금 등의 혜택을 주어 그 가격을 현저히 싸게 했을 때, 수입국이 경쟁력 상계를 위해 과세하는 차별관세를 말한다).

한국과 유럽연합이 IRA 건을 WTO 분쟁해결기구로 가져간다고 해도 바이든 정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최종 판정이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사법절차를 밟는데 대법원이 해체되어 가해자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미국은 자국이 지난 75년 동안 주도적으로 구축해온 자유주의적 이상(다자간 규칙 기반 무역 시스템)에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흠집을 내고 있다. IRA 등 최근 미국의 보호주의 정책들은 이 거대한 흐름에서 파생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더해 힘센 나라들에선 환경, 노동권, 인권 등을 자유무역에 우선하는 가치로 내세우며 이를 기준으로 수출입을 제한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WTO로 상징되는 자유무역주의는 파국에 처하게 될까? 함부로 미래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무역주의의 운명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예측하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자명 이종태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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