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준비위원회. 이 회의 이후 GATT가 출범했다. ⓒWTO 홈페이지 갈무리

각 나라가 멋대로 혹은 이웃 국가의 외교적 압박에 밀려 자국의 무역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다. 1947년에 출범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이전까진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방국가들은 대체로 각국이 경쟁적으로 보호무역 장벽을 쌓은 결과가 대공황과 전쟁이었다고 인식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무역질서의 목표는 ‘자유무역’이어야 했다. 자유무역에 동의하는 국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만약 두세 국가가 ‘앞으로 우리들끼리 관세 없이 무역하자’고 약속한다면 이는 특수한 ‘경제블록’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수십 개의 국가들(다자)이 자유무역의 핵심인 ‘차별금지 원칙’을 수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로소 자유무역은 마치 각국 정부가 마땅히 따라야 하는 보편적 ‘세계 규칙’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었다. GATT는 ‘양자(양국)’가 아니라 ‘다자(수많은 나라)’가 ‘규칙(자국의 자의적 결정이나 강대국의 강요가 아니라)’에 따라 교역한다는 ‘규칙 기반 무역 시스템(rules-based trading system)’을 건설하기 위한 국가들 간의 논의 틀로 만들어졌다. 어떤 국가에서 생산된 상품이든 국적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마치 자기 나라에서처럼 다른 나라에서도 거래될 수 있는 자유무역의 이상세계가 GATT의 지향점이었다. 

출범 당시 GATT가 그 이상을 실현하는 데 동원 가능한 수단은 많지 않았다. 각국이 20세기 초처럼 관세율 올리기 경쟁에 돌입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나라의 관세율을 0%로 만들고 싶었겠지만, 나라마다 각자의 경제발전 수준과 현실, 필요가 다르다. 

이에 따라 주로 공산품을 대상으로 국가들이 관세를 멋대로 올리지 못하게 하는 규범을 만들었다. 국가마다 상품별로 ‘그 이상 올릴 수 없는 관세율(양허관세)’을 정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미국이라면 외국산 자전거에 부과하는 관세율을 3% 이상, 인도는 40% 이상으로 올리면 안 된다는 식이다. 양허관세는 다른 회원국들과 협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회원국들은 양허관세 정도로는 자유무역의 이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가들은 세계무역에 규칙이 필요하다는 점엔 대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 규칙에 자국의 주권(예컨대 선진국의 저렴한 상품이 수입되어 자국 산업을 말살하지 못하도록 막을 국가의 권리)을 완전히 복속시켜야 한다고 보는 국가는 없었다. 노주희 변호사(민변 국제통상위원회)에 따르면, “1947년에 합의된 GATT(GATT 1947)는 잠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차차 자세한 규범을 만들어가며, 그 규범을 국가들이 따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시킬 계획이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국가들은 여러 차례의 협상 테이블(라운드)을 열었다. 세계경제 상황의 변동과 이에 따른 다양한 이슈들(보조금, 비관세장벽, 농산물, 지식재산권, 해외투자 등)이 새롭게 발생하면서 회원국 전체나 일부는 ‘GATT 1947’과 별도로 크고 작은 수십 개의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GATT는 이런 협정들의 내용을 회원국에 강제할 수 없는 느슨한 시스템이었다. 자유무역의 이상과 달리 국제무역의 현실 무대는 무법천지였다. 1970~80년대에 미국은 일본에 섬유·반도체 등의 수출을 ‘자발적(?)으로 줄이라’는 요구를 외교적 강압으로 관철했다. ‘세계화’가 세계적 유행어로 등극한 1980년대 하반기부터 자유무역의 규범을 더욱 심화하고 확산시키려면 GATT보다 강력한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미국을 중심으로 제기된다. 급기야 1994년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린 GATT의 9차 라운드에선 ‘WTO 설립’이 합의되었다. WTO는 이듬해인 1995년 1월1일 공식 출범한다. 2019년 현재 164개국이 WTO 회원이다.

WTO가 GATT를 대체한 것은 아니다. 공산품 관세율 중심이던 ‘GATT 1947’의 규범과 정신, GATT의 틀 내에서 만들어졌지만 다양한 회원국에 대해 강제력을 발휘하진 못했던 여러 협정 등이 WTO 협정에 부속서 형태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당초의 ‘GATT 1947’이 수정 보완되는 한편 GATT 틀에서 논의된 다른 협정들과 결합하면서 몸집을 불린 결과가 WTO라고 보면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WTO가 GATT 시절에 비하면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회원국들에 발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WTO 체제, “외교에 대한 법률의 승리”

6월11일 WTO 해체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스위스 제네바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EPA

GATT 시절엔 회원국들이 GATT 틀에서 만들어진 협정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에만 들어가도 괜찮았다. 그러나 WTO에서는 부속서에 포함된 수십 개의 협정에 모두 동의해야 회원국이 된다. 이를 ‘일괄 동의(single undertaking)’라고 부른다. 출범 당시의 미국은 자국에 부과된 ‘너무 낮은’ 양허관세율보다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으로 다른 GATT 회원국들을 WTO로 끌어들이는 데 훨씬 큰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지식재산이 미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WTO 회원국 자격으로 미국에 수출하고 싶은 나라들이 TRIPs까지 받아들이게 하려면 ‘일괄 동의’가 필요했다.

또한 회원국들은 자국이 협정들을 준수하는지 여부에 대한 감독 권한을 WTO에 부여했다. 노주희 변호사는 “GATT는 각국의 협상 대표들이 모여 뭔가 협의하고 약속하는 데 그친 반면 WTO는 GATT의 논의 틀에서 만들어진 협정들을 뒷받침하며 끌고 나갈 수 있는 국제기구로 설계되었다”라고 말했다.

WTO가 GATT 당시와는 달리 주권국가인 회원국들에게 감독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바로 2심제인 ‘WTO 분쟁해결기구’다. 분쟁해결기구에서 나온 최종 판정엔 대다수 국가가 승복하기 마련이었는데, 이는 GATT에 비해 현격히 높아진 WTO의 위상을 입증한다.

이로써 GATT로 시작된 자유무역의 이상이 WTO에 이르러 ‘규칙 기반 무역체제’를 거의 실현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노주희 변호사는 WTO 체제가 “‘외교에 대한 법률의 승리’로 여겨졌다”라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WTO 이전엔 국제무역분쟁이 발생하면 외교관들이 만나 협상으로 해결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WTO에선 협정 위반 여부를 법률가들이 해석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외교 교섭의 대상이던 통상 문제가 드디어 법적 규율의 문제로 전환되었고, 이를 분쟁해결기구로 뒷받침한 것이다.”

그러나 ‘규칙 기반 무역 시스템’의 이상은 GATT 출범 이후 75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체제가 타협과 보완을 통해 기존 자유주의적 기조를 성숙시켜 나갈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뀔지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한다. 

기자명 이종태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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