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맡은 밴드 스파크스가 연주를 시작한다. 두 주연배우가 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온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다른 배우들과 함께 거리로 나선다. 뮤지컬 영화다운 시작. 일단, 여기까지는.
여자 안(마리옹 코티아르)은 아주 잘나가는 오페라 가수다. 남자 헨리(애덤 드라이버)는 요즘 잘나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자신의 쇼가 끝나자마자 오페라 극장으로 달려가는 남자. 파파라치에 둘러싸인 채 남자를 반기는 여자. 로맨스 영화 같은 전개. 그래, 아직까지는.
여자가 묻는다. “공연 잘했어?” 남자가 대답한다. “죽여줬지. 다 파괴하고 끝내버렸어. 당신 공연은?” “난… 관객을 구해줬어.” 이 대화가 복선이었을까. 사랑과 결혼이 삶을 구원해주길 바랐지만, 결국 사랑은, 그리고 결혼은 삶을 파괴하고 죽음을 부른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그 파멸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이며 또한 공범이다. 바로, 이때부터. 여느 뮤지컬 영화와 다른, 흔한 로맨스 영화가 아닌,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는 건 딸 아네트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어떤 사랑은 바다보다 우물에 가까운 것이어서, 한번 빠지고 나면 주변이 보이질 않는다. 서로만 바라보며 더 깊이 빠져든다. 시간이 흘러 우물 안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의 벽이 눈에 들어온다. 비좁고 차가운 관계의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허우적대던 두 사람은 그래서 크루즈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바다로 나가기로 한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거대한 폭풍우. 그리고 그 폭풍우 너머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건 감독 레오 카락스의 시네마틱한 상상력.
올해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 아닐까?” 뮤지컬 영화의 매력을 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지만, 뮤지컬 영화를 볼 때는 이를 당연한 듯 용납하고 본다. 관객이 이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면 어떤 환상이라도 영화에 겹겹이 더할 수 있을 것이다(〈씨네21〉 인터뷰 중에서).”
그가 ‘겹겹이 더해놓은’ 기발한 환상이 누군가에겐 ‘당혹’일 테지만, 누군가에겐 ‘매혹’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그러했듯이 〈아네트〉를 보면서도 어떤 이는 ‘낯선 영화’에 마음을 열지 못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이 ‘날 선 영화’에 마음을 깊이 베이고 말 것이다.
어떤 예술가의 작품세계 역시, 바다보다는 우물에 가까운 것이어서, 한번 빠지고 나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가 그 우물에 익숙해질 무렵, 진정 뛰어난 예술가는 바다를 보여준다. 우물 밖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의 우물을 바다로 만들어버린 아티스트. 레오 카락스는 이 영화로 올해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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