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가져오세요.”

이상한 주문이었다. 스튜디오에 놀러 오는 사람은 꼭 돌 한 개씩 놓고 가야 한다니. 이왕이면 예쁜 돌을 가져가고 싶었다. 아빠가 어느 등산길에 주워와 마루 한편에 처박아둔 돌을 찾아 가방에 넣었다.

“옛날에 문자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돌편지를 주고받았대. 자기 마음과 가장 닮은 돌을 골라 주는 거지. 울퉁불퉁한 돌을 받은 사람은 상대를 걱정하고, 반질반질한 돌을 받은 사람은 함께 기뻐하는 거야.”

영화 〈굿, 바이〉의 대사를 떠올리며 가져간 돌을 스튜디오 입구 돌무덤에 올려두었다. 모난 돌을 찾기 힘든 돌무덤이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를 찾아오는 사람들 마음이 다 그랬던 거다. 둥글둥글하고 반질반질한, 연필로 명상하기가 만들어낸 영화를 닮은, 그런 마음.

그림으로 그린 ‘한국 단편문학 프로젝트’

10년 걸려 완성한 첫 장편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2011)이 개봉한 뒤, 안재훈 감독은 ‘한국 단편문학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성보다 먼저 사랑했던 문학” 작품을 “아무도 애니로 만들어주질 않아서 직접 나선” 그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봄봄〉을 하나로 묶어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을 개봉했다. 이어 황순원의 〈소나기〉(2017)를 중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김동리의 〈무녀도〉를 장편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해 최근 개봉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유명하나 이제는 무실해진 우리 문학작품에 그림으로 다시 숨을 불어넣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아쉽게도 여기서 멈춘다.

“뷰티풀(beautiful), 프리티(pretty)로는 안 되는, 우리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있어요. 아련하다, 아릿하다 같은 감정들요. 시골 냇가, 돌로 놓은 징검다리, 풀꽃과 갈대숲… 무슨 색깔이라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풍경들을 그리죠.”(안재훈 감독)

그래서 그렸다. 우리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그들이 차곡차곡 기록으로 남겨주었다. 벚꽃 대신 진달래와 개나리가 가득한 봄 풍경을 그리고, 모던한 경성 대신 인력거꾼의 눈에 비친 어두운 경성을 그려낸 이유다. “그림을 그리면 기억이 남고 글을 쓰면 생각이 남는다”라고 믿는 안재훈 감독이, 글로 된 이야기를 고집스럽게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든 까닭이다.

스튜디오 입구엔 돌무덤이 여전하다. 내가 가져다 놓은 돌도 그 틈에 섞여 열 살 가까이 나이를 먹었다. 어느 등산길에 돌을 가져왔던 아빠는 이제 세상에 없다. 그래도 그 돌 하나가 세상에 남았다. “누군가의 삶을 지켜본 돌들이 스튜디오 입구에서 사람들의 출퇴근을 맞이한다”라고 연필로 명상하기 식구들은 말한다. 오늘도 돌무덤을 지나 자리에 앉은 애니메이터들이 그림을 그린다. 그려두지 않으면 사라지는 세상을 끈질기게 그려내고 있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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