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는 작가 J. D. 샐린저(니컬러스 홀트)가 주인공이다. 유명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쓰기 전, 아직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 작가 지망생 샐린저 이야기다. 잡지에 글이 실려야 작가가 되는 시대였다. 특히 ‘그 잡지’에 글이 실려야 진짜 작가로 인정받는 미국이었다. 마침내 그 잡지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는 날, 천하의 샐린저가 어린아이처럼 기뻐한다. 세상 사람들도 그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앤디(앤 해서웨이)가 주인공이다. 어쩌다 보니 패션지 편집장 비서가 되지만, 진짜 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바로 ‘그 잡지’에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 그가 뉴욕에 온 진짜 이유. 하지만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전국대학기자상을 받은 앤디도 넘지 못한 그 잡지의 높은 문턱은, 헤밍웨이, 카포티, 하루키, 그리고 샐린저 정도는 되어야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저널리스트에게 바치는 러브레터
‘그 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 1925년 창간한 미국 주간지. 칼럼과 르포, 소설과 에세이가 공존하는 종합 매거진. 잡지 이름과 달리 ‘뉴욕 사는 사람’만 독자로 삼지 않는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늘 ‘힙’했던 이 잡지의 전 세계 애독자 가운데는, 미국 텍사스주 고등학생 웨슬리 웨일스 앤더슨도 있었다.
처음엔, 사진 대신 일러스트로 채운 표지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중엔, 개성 강한 글쟁이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대학생이 된 뒤엔 도서관에서 수십 년 치 과월호를 일일이 찾아 읽었고, 매주 사 모은 잡지 수백 권을 바인더에 묶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이 되어 〈로얄 테넌바움〉과 〈다즐링 주식회사〉 〈문라이즈 킹덤〉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이야기는 〈뉴요커〉에 실린 단편소설처럼 독특하고, 이미지는 〈뉴요커〉의 일러스트처럼 다채로운 9편의 필모그래피. 그리고 10번째 장편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는 아예 영화 전체가 한 권의 ‘뉴요커’다.
프랑스 가상 도시 ‘앙뉘 쉬르 블라제’에서 발행되는 잡지 〈더 프렌치 디스패치 오브 리버티, 캔자스 이브닝 선〉 편집장이 사망한 뒤, 남은 편집실 식구들이 마지막 호 기사 4개를 고르는 설정. 그렇게 선택된 이야기가 4편의 단편영화에 담겨 장편영화로 묶이는 형식. 감독이 실제 〈뉴요커〉에서 읽은 글이 시나리오의 씨앗이 되었다. 영화로 인쇄한 매거진의 지면 안에서, 웨스 앤더슨이 사랑한 배우가 웨스 앤더슨이 사랑한 잡지를 만들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또! 그의 영화는 황홀하고 사랑스럽다.
“이 영화는 저널리스트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라고 그는 말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웨스 앤더슨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를 쓰고 싶어졌다. 이번에도. 역시. 또.
-
[비장의 무비] 정말 친했던 친구를 20년 만에 다시 만나다
[비장의 무비] 정말 친했던 친구를 20년 만에 다시 만나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까르륵. 자지러지는 여자아이들 웃음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교복 입고 다니는 학생 신분이 오늘로 마지막인 모양이다. 친구 넷을 세워두고 태희(배두나)가 사진을 찍으려 한다. 배경이...
-
[비장의 무비] ‘낯설지만 날 선’ 로맨스가 궁금하다면
[비장의 무비] ‘낯설지만 날 선’ 로맨스가 궁금하다면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음악을 맡은 밴드 스파크스가 연주를 시작한다. 두 주연배우가 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온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다른 배우들과 함께 거리로 나선다. 뮤지컬 영화다운 시작. 일단, ...
-
[비장의 무비] ‘마라맛 〈기생충〉’이 나타났다
[비장의 무비] ‘마라맛 〈기생충〉’이 나타났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기생충〉은 김기택씨(송강호) 가족의 이야기다. 그들을 따라 우리는 박 사장(이선균)네 집에 들어가 삶의 돌파구를 찾는다. 의도한 대로 일이 풀릴 땐 같이 즐겁고, 곤경에 빠지면 ...
-
[비장의 무비] 한국의 단편문학, 스크린에서 다시 꽃피다
[비장의 무비] 한국의 단편문학, 스크린에서 다시 꽃피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돌을 가져오세요.”이상한 주문이었다. 스튜디오에 놀러 오는 사람은 꼭 돌 한 개씩 놓고 가야 한다니. 이왕이면 예쁜 돌을 가져가고 싶었다. 아빠가 어느 등산길에 주워와 마루 한편...
-
[비장의 무비] 당신에게도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나요
[비장의 무비] 당신에게도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나요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눈에 밟힌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어차피 이리저리 밟히며 사는 인생, ‘이왕이면 눈에 밟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발에 밟히면 노려보지만 눈에 밟히면 돌아보니까. 쉽게...
-
[비장의 무비] 브랜드 뒤에 감춰졌던 구찌 가문의 진짜 욕망
[비장의 무비] 브랜드 뒤에 감춰졌던 구찌 가문의 진짜 욕망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마우리찌오.”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그러고는 이름 뒤에 성을 붙여 다시 한번 말한다. “마우리찌오… 구찌.” 먼저 손 내민 건 그였으나 이제 그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