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1960년)의 한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만들며 참고한 영화로 고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들었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개성의 영화이자,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영화”라고 극찬했고 미국의 명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하녀〉를 보고 감탄해 이 영화의 디지털 복원을 후원한 바도 있어.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 영화 100선 공동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니 이 영화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하겠지?

영화 〈하녀〉는 1950년대 한국의 한 중산층 가정에 하녀가 들어와 살다가 주인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고 이후 하녀의 집착과 분노 속에 파괴되는 가정을 그린 스릴러 영화야. 이 영화는 1960~1970년대 한국에 흔했던, 하지만 지금은 잊힌 사람들의 비극에 그 기반을 두고 있어. 바로 ‘식모’란다. 요즘에는 ‘가사 도우미’라는 직업이 있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야. 식모란 1950년대 후반 이후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며 주로 지방에서 도시로 올라와 남의 집에서 숙식하며 그 집의 가사노동을 도맡았던 젊은 여성들을 의미해.

네 이모할머니가 사시던 오래된 아파트를 떠올려보면 부엌 옆에 창고라고 하기엔 뭐하고 방이라고 부르기엔 좀 작은 공간이 있었잖아. 그건 ‘식모 방’으로 설계된 공간이었어. 당시 그 정도 규모의 아파트면 식모를 들이는 게 상식이었고 그 상식이 설계에 반영된 것이지. 웬만한 살림을 꾸려가는 가정에서 식모를 들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영화 〈하녀〉에서 하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주인 역시 큰 부자가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었던 것처럼.

심심산골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아빠의 선배 한 명이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 “국민학교 졸업할 때 남자애들은 대개 읍내 중학교에 간다고 좋아했는데 여자애들은 전부 펑펑 울었어. 걔들은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죄다 식모로 나가게 돼 있었던 거야.” 가난한 집에서 입 하나 덜자는 절박함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은 물론 단칸 셋방살이, 판잣집 살림에서도 너도나도 식모를 두었던” 도시 사람들의 수요가 맞아떨어져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식모’로 고달픈 타향살이를 해야 했단다.

식모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 속했고 노동법 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인집의 ‘하녀’처럼 일해야 했어. 주인집의 호통과 학대에 시달리며 모진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이가 부지기수였지.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주인아주머니의 물품을 훔쳤다고 사형해 죽인 일, 5~6년이나 열심히 일했건만 한 푼도 못 받고 그 집에서 내쫓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중앙일보〉 1966년 1월13일).”

뼈아프고 통절한 ‘식모의 전성시대’

1965년 11월17일 〈경향신문〉 기사. ‘인텔리 주부’가 식모를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경향신문 기사 갈무리

1965년 11월17일 〈경향신문〉에는 ‘대학 나온 인텔리 주부’가 집에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식모를 가둬놓고 부젓가락으로 지지고 빗자루로 때린 끝에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등장한다. 죽은 식모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이었어. 같은 해 10월에도 충북 제천경찰서 간부 집의 열다섯 살짜리 식모가 도둑 누명을 쓰고 곤봉으로 두들겨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가 나왔으니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피해 사례는 얼마나 많았을까 싶구나.

반면 식모들이 절도·유괴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어. 영화 〈하녀〉에는 식모가 저지른 살인사건이 보도된 신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지. 실제로 김기영 감독은 경상북도에서 식모가 주인집 아이를 저수지에 빠뜨려 죽인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접했다고 해. 이 실제 사건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김기영 감독이 이 사건을 참고한 게 아닌가 싶은 범죄가 있었다.

1956년 7월19일 이순돌이라는 18세 여성이 자신이 식모로 있었던 대구사범고등학교 교사의 3남매를 저수지로 유인해 수영을 하자며 아이들을 물속으로 집어넣고 물 밖에서 돌을 던져 나오지 못하게 한 끝에 두 명을 익사하게 한 사건이 벌어졌어. 3남매 중 맏이는 잠수를 하며 버틴 끝에 살아 나와 경찰에 신고했고 이순돌은 바로 체포되었지. 처음에는 범죄의 이유가 “나병 초기 증상인 ‘노목’이라는 것이 온몸에 발병하자 부득불 해고시킨 데 원한을 품은 것 같다(〈조선일보〉 1956년 7월19일)”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사건의 이면이 드러났지. 실상은 이렇게 밝혀졌어. “4년 전부터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던 이 양은 약 1년 전까지 여덟 번에 걸쳐 집주인에게 정조를 유린당했다고 하며 이와 같은 기미를 눈치 챈 집주인의 부인이 이 양을 해고시키기 위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 양에게 절도 혐의를 뒤집어씌워 8개월 전에 해고시킨 데 원한을 품었다(〈조선일보〉 1956년 7월20일).” 즉 살인 동기는 성범죄 피해 때문이었다는 것이지. 이 사실은 짤막한 보도로 뒷받침된다. “경북대학교 의대 부속병원의 감정서에 따르면 ‘이순돌의 피부병은 나병이 아니며 처녀성이 상실돼 있었기에’ (···) 집주인의 꼬임에 의해 능욕을 당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으며 따라서 살인 동기도 복수라는 것이 수긍되고 있다(〈경향신문〉 1956년 8월13일).”

식모들은 모진 노동, 학대와 더불어 집주인 남자들의 성적 착취 대상으로 쉽사리 전락하기도 했다. 그 누구로부터도 제대로 된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했던 10대 소녀들은 더러운 욕망에 무방비로 노출됐지. “취침 중에 몰래 침입하여 욕정을 채운 후 그 후에도 범하려 하므로 (···) 동민들이 분개하여 경찰에 고발(〈조선일보〉 1949년 1월15일)”한 사건부터 “강도를 가장해 식모를 욕보인 뒤 나가서는 복면을 벗고 ‘강도야’ 부르짖었다가 들통난 집주인(〈조선일보〉 1975년 8월13일)”까지 세상에 알려진 일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는데 얼마나 많은 비통한 사연이 암장됐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산업화가 진행되고 산업 현장에 여성 노동력이 대거 유입되면서, 즉 식모를 대신할 일자리가 양산되면서 식모라는 직업은 점차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어. 하지만 그 시대를 다룬 영화나 문학작품 곳곳에서 무시로 그들의 야위고 팍팍한 얼굴,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범죄의 제물이 됐던 기구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에서 주인공 영자의 첫 직업은 철공소 식모였고 철공소 사장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최일남의 소설 〈가을 나들이〉의 한 대목은 우리 사회가, 우리 역사가 ‘식모’들의 어깨에 부려놓았던 기막힌 모순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가능한 한 빨리 식모살이를 집어치워라. 그게 어디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 그건 그렇고 지금 내가 꼭 필요한 데가 있어서 그러니 돈 3천원만 부쳐다오.” 이제는 사라진,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뼈아프고 통절한 ‘식모들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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