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중앙정보부는 ‘임자도 간첩단’과 남한 내 지하 정당인 통일혁명당(사진)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합동통신

우리나라가 걸어온 험준하고 가파른 현대사의 길섶에는 피 어린 ‘사실’들이 무더기로 들꽃처럼 피어나 있다. 그런데 이 들꽃들을 엮어 만든 저마다의 꽃다발은 서로 다른 경우가 많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실을 찾고 다른 사실은 무시하거나, 압도적인 사실에 매몰돼 일면의 사실을 외면하거나, 아예 사실을 제 맘대로 ‘창조’한 경우조차 적지 않지. 일례로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그리고 그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국가정보원이 생사람을 잡고 간첩을 제조해낸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단다.

하지만 북한이 집요하게 대남 공작을 편 것도 사실이고, 공작원과 남한 내 동조자들이 대한민국의 법을 어기고,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일 역시 엄연히 사실이야. 아빠가 네게 우리 현대사의 ‘간첩 시리즈’를 들려주는 건 누구에겐가 불편한 일일 수 있어. “수없이 많은 조작과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냈는데 진짜 간첩 얘기가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발언에 아빠는 고개를 젓는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만 반대편의 사실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들을 혁명가로 쳐줄망정 한국의 법을 위반한 범죄자임을 부인할 수 없지.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도 그중 하나야.

1968년 8월24일 중앙정보부는 남한 내의 지하 정당인 통일혁명당(통혁당)을 검거했다고 발표했어. “해방 이래 국내 최대의 지하당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에다가 “거물급은 쟁쟁한 일류 대학 출신이고, 정계·학계·군부 등에 인맥관계를 가지고 깊게 침투”해 들어갔다고 하니 남한 사람들 입이 벌어졌지. 실제로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관이던 신영복을 위시해 엘리트들이 체포됐다. 이 당 간부들 몇 명은 버젓이 북한에 다녀오기까지 했다는 사실에 취재기자들도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어.

이들이 덜미를 잡힌 계기는 한 달 전에 일망타진된 ‘임자도 간첩단’ 사건이었다. 빨치산 활동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던 정태묵과 최영도 등 옛 좌익 인사들은 고향 임자도를 거점으로 1961년 이후 활동을 재개했어. 남파 간첩과 접선하고 수차례 북한을 왕래하며 조직을 꾸려가던 이들은 뜻밖의 암초에 부딪혔지. 아편중독자였던 정태묵의 동생이 정보부에 찔렀다는 얘기도 있고, “공작금 배분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 불만을 품은 정태묵 동생의 아내가 신고했다(〈월간조선〉 2010년 10월호)”라는 기관원의 진술도 있다.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통혁당 중앙당의 꼬리가 밟혔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직접 나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대박 사건’으로 비화됐지.

통혁당 중앙당의 중심인물은 김종태라는 사람이었어. 전남 지역 통혁당의 지도급 인사였던 최영도의 친구로 일제 때부터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4·19 이후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품고 지하 정당 건설에 나서게 된다. 그가 생각한 변혁의 동맹이자 지향은 북한이었어. 북한은 1960년대 초반 이후 남조선 해방을 위해 북한이 직접 역량을 비축하는 ‘민주기지론’에서 벗어나, 남한 내에서 지하당을 조직하여 그들의 혁명을 수행하는 ‘남조선혁명론’을 외치고 있었으니 죽이 잘 맞았겠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몸소 법정에 나선 김형욱과 김종태의 대화를 보면 오히려 김형욱이 밀리는 느낌이 들어. “당신이나 박정희가 특권층을 대변하는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였는데 우리도 민중을 대변하는 통혁당을 결성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묻는 김종태에게 김형욱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알고 있는가”라고 반문했고, 김종태는 “우리는 그것을 인정한 일이 없다”라며 묵살해버려. 이에 김형욱이 “우리는 우리 법으로 당신을 재판한다! 당신 한 명의 죄명만 181가지다”라고 으름장을 놓자 김종태는 이렇게 되받아친다. “왜 181가지인가, 탄압을 가한다면 1810가지 죄명을 씌워도 좋지 않은가.”

어차피 사형이 확실한 상황이었지만 김형태는 181가지 죄목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모포를 엮어 만든 로프를 타고 교도소 창문으로 탈옥을 꾀하다가 들킨 것이지. 북한은 중앙정보부의 역공작에 휘말려 김종태를 구하러 특수부대까지 파견했지만 잔뜩 벼르며 기다리고 있던 남한 육해공군의 합동공격에 괴멸되고 말았어.

김종태 등 핵심 지도부가 북한을 방문하고 지령과 공작금을 받으며 활동한 건 요즘 말로 ‘빼박(빼도 박도 못할)’ 간첩 행위였다. 어느 나라든 그 정도 혐의에 관대할 수는 없지. 하지만 통혁당과 북한의 관계를 모르고 그저 반독재운동 정도에 공감하던 사람들까지 중앙정보부가 한 그물에 엮어 올린 건 우리 역사의 오점이었다. 올해 7월20일 서울고등법원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생 고 박경호씨에게 53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박경호씨가 영장 없이 연행됐고 불법체포·감금된 사실이 인정되며, 그가 소지·배포했다는 공산주의 서적 또한 학문적 연구 목적이라고 판단했어. 당시 중앙정보부가 어떻게 사람들을 굴비 엮듯 엮고 때려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지.

“간첩 신고전화 111을 누를 거야. 하지만”

통혁당 사건 관련자인 신영복 교수는 생전에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 구조 속에 있는 것이다(〈이론〉 1992년 겨울호).” 통혁당은 분명히 북한과 연계됐지만 북한이 만든 괴뢰 조직은 아니었어. 전향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카 김질락에 따르면 김종태는 1965년 통혁당 서울시당 창당 결성 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해. “조직 가운데 북한의 선이 절대로 침투해 들어와서는 안 되며 그들과의 접촉은 단절되거나 사전에 봉쇄되어야 한다.” 김종태는 월북해서도 박헌영과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숙청된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북한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아 애를 먹이기도 했다고 하니까.

나는 남한 사회를 바꾸는 동력의 모델과 지향을 북한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절대 반대한다. 얼마 전 청주에서 덜미가 잡힌 얼치기 운동가들에게는 경멸을 금치 못한다. 혹여나 누군가 “북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접근한다면 로또 맞았다고 쾌재 부르며 간첩 신고전화 111을 누를 거야. 하지만 1960년대의 한국은, 그리고 남북의 관계는 여러모로 달랐다. 정치·경제·외교적 역량을 볼 때 북한에 뒤져 있었고 사회적 모순 또한 지금에 비해 극심했으니까. 김종태는 그런 맥락 속에서 반자생적으로 돋아난 ‘혁명가’였어. 그를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대가를 치렀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김종태 같은 자칭 혁명가들의 발판을 무너뜨린 것은 ‘삼천만이 살피고 의심나면 신고’하는 경각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지닌 모순의 해결이나 최소한의 진전을 통해서라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중국 팔로군과 북한 인민군 장교를 거쳐 남한에 귀순해 우리 육군 사단장까지 지냈던 정봉욱 장군의 무뚝뚝한 말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베풀어 그렇지 못한 이들과 나눠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 공산주의를 이길 수가 없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