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6일 청와대 앞에서 열린 북파공작원 추모행사에 참여한 유족이 희생자 명단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스파이 세계에서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고 해. “성공한 공작은 공개되지 않는다.” 남북도 마찬가지다. 남이나 북이나 엄청난 수의 공작원을 상호 침투시켜 파괴 공작을 벌이거나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누군가를 포섭하려 들었지만 그만큼 많은 실패를 했지. 이 실패가 드러날 때 양쪽 당국은 당연히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들은 관계없다고 우기게 된다.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가장 탐내는 공작 중 하나는 이중간첩 공작이야. 즉 적의 스파이를 포섭해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고 투자도 많이 해야 하지만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상대방의 정보를 내 손금처럼 들여다볼 수 있으니 그보다 더 매력적인 공작은 없지 않겠니. 세계를 주름잡는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러시아 정보기관이 벌인 이중간첩 공작에 호되게 당한 적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4년 체포된 올드리치 에임스 사건을 들 수 있어. 글쎄 에임스는 CIA 내부에서 러시아와 동유럽을 담당하는 고위직이었단다. 그런 그가 이중간첩이 됐으니 러시아 내 CIA 활동망이 거덜날 수밖에 없었지.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일을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다대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해안으로 숨어드는 북한 침투조를 급습한 건 일반 해안경비 부대가 아니라 대북 특수부대였어. 남한 쪽의 이중간첩이 된 북한 스파이가 흘린 정보를 통해 그 침투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가 덮친 케이스였지. 세상에 알려진 몇 안 되는 ‘성공한 공작’ 중 하나인 셈이야.

전쟁 이후 남북한이 서로 보낸 공작원 수만 명은 분단의 비극을 가장 크게 체감한 사람들일 거야(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북파공작원 수가 7726명이니 북한도 그보다 적지는 않을 것 같다).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나들다가 체포돼 처형되거나, 동지들을 팔아 목숨을 부지했거나, 그 외에 말로 다 하기 힘든 사연들의 주인공이겠지. 그 가운데 오늘은 심문규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그는 1925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고, 일본군에 입대해 관동군으로 근무하다가 별안간 참전한 소련군의 포로가 됐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에게 사로잡혀 팔로군 노릇을 하게 되지. 무슨 빠삐용도 아닌데 그는 또 탈출을 감행해 고향 철원으로 돌아왔어. 오늘날 철원에 가면 북한 노동당사가 남아 있다. 즉 전쟁 전 철원은 북한 땅이었어. 그는 철원의 인민보안대원으로 근무하다가 밀주(密酒) 관련 사건에 연루돼 철창신세를 진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철원이 수복되면서 심문규는 이번엔 남한 편에 서서 치안대원 노릇을 해. 6사단에 입대해 수색대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지.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그는 HID, 즉 대북 특수부대 요원이 됐어. 〈한겨레〉 인터뷰에서 그의 아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갔다 오면 장교 대접을 해준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대북 특수요원이 된다는 사실은 아내에게 막막한 벼랑으로 내몰리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 임신 중이던 심문규의 아내는 낙태하려고 키니네를 먹었다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이런 아픔을 뒤로하고 1955년 9월20일 심문규는 아이들 셋을 처남에게 맡기고 북한 침투에 나서게 된다(〈오마이뉴스〉 2011년 7월6일).

북한에 침투해 소정의 임무를 완수한 심문규는 인민군 몇 명까지 납치해 귀환할 배를 기다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배는 오지 않았고 육로로 돌파해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명령에 따라 육로로 귀환하던 중 심문규는 인민군에 체포되고 말았지. 북한은 당연히 남한의 간첩에게 이중간첩 공작을 하려 든다. 북한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이 위험한 임무를 계속 거절했다고 해. 그런데 그처럼 북한에 침투했다가 자수한 HID 요원들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일곱 살 난 당신 아들에게 HID가 북파 교육을 시키고 있어요.” 이건 사실이었다. 심문규의 아들 심한운은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산을 타고 바다를 헤엄치는 훈련을 받고 있었으니까.

반세기 동안 죽음의 이유 찾아 헤맨 유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살인 기계로 교육시킨다는 설정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실사판이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심문규는 이 소식을 듣고 남파를 자원한다. 북한에서 새로 얻은 아내도 임신 중이었지만 그는 일곱 살 아들이 자신과 같은 궤적을 밟는다는 것을 참기 어려웠나 봐. 북에서 남으로 휴전선을 넘은 그는 1957년 10월6일 서울 처남 집에 도착한다. 처남댁, 즉 아이의 외숙모가 겨우 HID에서 빼내 온 아들과 꿈에 그리던 상봉을 했지. 그리고 곧바로 그가 속해 있었던 대북 첩보부대에 자수한다. 남파돼서 공작을 벌인 일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 별 탈 없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건 세상을, 그리고 분단을 너무 무르게 본 것이었지.

대북 첩보부대는 심문규를 1년 넘게 데리고 있으며 정보를 캐고 남파 간첩과 접선하게 해 그를 체포하는 등 이른바 단물을 다 빼먹은 다음에야 군 특무대에 넘긴다. 범죄 혐의가 있다면 즉시 특무대에 넘겨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거야. 특무대는 대충 이런 의견을 낸다. “북한군에 체포돼 군사기밀을 제공하고 북파 공작원을 적발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됐으나, 임무를 포기하고 자수한 자로 공훈이 있기에 정상을 참작하여 의법 처리하는 쪽이 좋겠다.” 즉 범죄 사실은 있으나 공도 있으니 이를 참작해 처벌하자는 것이었지.

그런데 처음에는 ‘자수한 간첩’으로 되어 있었던 공소사실이 이후 첩보부대의 의견이 반영된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는 “서울시에 잠입한 후 합법을 가장할 의사로 첩보부대에 자수하였다”로 180도 바뀐다. 간첩 활동을 포기하고 자수한 게 아니라 간첩 활동을 하려고 자수했다는 주장이었지. 이를 근거로 심문규는 1961년 5월25일 사형대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어. 그의 죽음은 가족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단다.

일곱 살 나이에 아버지를 찾겠다며 북파 훈련을 받았던 아들은 거의 반세기 동안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2012년 대한민국 법정은 심문규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것으로 심문규의 영혼에, 그리고 그 가족들의 아픔에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심문규처럼 죽어간 북파 요원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거야. 동해 첩보부대인 36지구대 부대장이었던 이의 증언이다. “(북파 공작원들이 북한에 체포된 뒤 이중간첩 임무를 띠고) 남한에 내려오면 다시 (남한에) 귀순을 하였으며, 첩보부대에서는 귀순자들에게 북한에서 습득한 정보를 빼낸 후 처리하였다(죽였다). 그들을 사회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고, 다시 교육을 시켜 북파하더라도 북한에 다시 귀순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 건조한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핏물과 비명이 배어 있는지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북파 요원들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 “체포되면 죽어라. 살면 북한의 이중간첩이 되고 남파되면 남한에서 죽는다.” 그렇게 남과 북 양쪽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대관절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알게 되면 더 비통해지고 기가 막히겠지만 알아야 할 사연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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