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망실공비 중 마지막으로 체포된 정순덕. ⓒ연합뉴스

일부 ‘진보’ 진영은 오래도록 분단의 책임이 주로 남한과 미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휴전 이후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의 전쟁 위협에 시달려왔다며 북한의 책임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어. 1980년대 이후 일부 진보 진영을 장악해온 민족자주, 통일지향적 세계관의 영향이지.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에 끝났을 테고 우리가 실제 겪은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강정구 전 동국대학교 교수)”이라는 발언이나 “미국 국방장관은 전 세계의 전쟁을 일으키고 미군이 있는 모든 나라 국민들에게 갖은 고생을 떠맡기는 전쟁광(이종린 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이라는 주장은 그 일각일 거야.

이들은 북한이 ‘평화통일’을 열망해왔으며 그들이 자행한 도발은 남한과 미국의 압박에 저항한 것일 뿐이라는 속내를 지니고 있어. 그래서 북한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지극히 관대한 태도를 지니게 되지. 아웅산 묘소 폭발 테러가 조작이 분명하다고 우기거나, 제 발로 온 탈북자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보내야 한다고 언성을 높이면서도 납북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 이유다. 이들의 북한 편향은 북한의 김정일이 인정한 일본인 납치 사건마저 “일제강점기 일본은 수많은 조선인을 유괴, 납치, 강제 연행했다. (···) 납치 문제를 되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과거 죄행부터 사죄해야 한다(〈민플러스〉 2018년 7월18일)”라며 물타기하기에 이른다.

기억하기 바란다. 어떤 역사적 결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해. 흔히 역사의 진실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진실은 대개 저마다의 신념과 맥락 앞에 오염되기 쉽고, 그 진실에 어긋나는 사실들을 뭉개버리기 일쑤지. 진정한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서라도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의 뒤안길에 있었던 ‘팩트’와 사연들을 살필 필요가 있어. 오늘 네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그중 하나야. 바로 ‘공비(共匪)’다.

이 말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는데 ‘공산 비적’의 준말이야. ‘공비’는 1948년 4·3 사건과 여순 사건 이후 무장봉기해 한국 정부와 맞선 이들을 칭하는 말로 굳어졌어. 반대편에서는 그들을 민족과 인민을 위해 일어난 ‘빨치산’이라고 불렀다. 이들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어. ‘사람을 서슴없이 죽인 악질 빨갱이’라고 부르는 이들과 ‘외세에 맞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떨쳐나선 전사’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는 게 대한민국이야.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겠지.

태백산맥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첩첩산중에서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갔던 빨치산들은 분단의 희생양이라고 해야 할 거야. 동시에 그들은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기도 하지. 휴전회담 과정에서 북한은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빨치산을 거둬가라는 남한과 유엔 측의 제안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제2전선’ 형성을 통해 한국 측 전력이 약화되기를 기대한 것이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그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때 기세 좋던 빨치산은 휴전 후 고립된 산속의 외로운 늑대가 돼버렸고 급격히 소멸해갔지. 잔존 빨치산 태반이 죽거나 항복하는 과정에서도 극소수 산속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실공비(亡失共匪), 즉 잃어버린 공비들로 분류됐지. 그중 맨 마지막으로 체포된 망실공비는 정순덕이라는 여자였어. 그녀는 무려 1963년 11월12일 체포됐다.

반대편이 저지른 범죄에도 민감해야

2004년 4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묘비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 ⓒ연합뉴스

1933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정순덕은 나이 열여섯에 인근 마을 성씨네로 시집을 간다. 남편과 알콩달콩 정을 쌓아가던 무렵 전쟁이 터졌고 원래 좌익세가 강하던 산청 지역은 일찌감치 인공(인민공화국) 치하에 들어갔다. 남편은 인공 치하에서 팔자에 없는 감투를 썼고, 전세가 뒤집히자 그 감투는 목을 자르는 작두가 됐지. 남편은 산으로 들어갔다. 걸핏하면 찾아와 ‘빨갱이’ 남편을 내놓으라며 치고 밟는 경찰과 청년단의 횡포에 못 이긴 정순덕도 1951년 겨울에 산으로 들어갔어. 하지만 남편은 곧 목숨을 잃었고, 그녀는 빨치산의 일원이 됐지.

전쟁은 끝났지만 정순덕은 내려오지 않았어. 자신이 투철한 이념의 소유자가 된 것인지, 아니면 돌아갈 곳 없는 절망감과 남편의 원수들에 대한 증오, 해주는 것 없이 괴롭히기만 한 나라에 대한 환멸, 그 모든 것이 뭉쳐져 산에 머물게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남편과 달리 그는 끈덕지게 살아남았어. 원래는 3인 부대였지만 1961년 한 명이 사살돼 두 명만 남았고, 그 후로도 3년을 버티다 체포되었지(남은 동료 한 명은 사살됐다).

정순덕은 지리산에서 숨어 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투쟁을 감행했다. 여기서 그 투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투쟁 와중에 정순덕은 분명히 범죄를 저질렀어. 교전 중 군인이나 경찰에게 총을 쏜 건 전투 행위로 볼 수 있겠지만 그녀는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1957년 외딴 화전민의 집을 방문해 ‘보급 투쟁(생필품 확보)’을 한 뒤 자신들과 함께하자고 꼬드기다 여의치 않자 집 주인 부부와, 아홉 살 먹은 딸까지 전화선으로 목 졸라 죽였다. 그 일행이 최후를 맞기 1년 전인 1962년에는 협조자의 집을 방문했다가 배신당하자 일가족 5명을 학살한다. 그 직후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악을 쓰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지. 이런 전과(?)가 알려지자 북한에서는 ‘지리산 여장군’이라는 황망한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두려움에 떨며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한 남한의 민간인들에게 그는 지독한 ‘빨갱이’이자, 악랄한 무장 공비였지.

여기서 아빠는 인민을 위해 일어났다는 이들 역시 인민의 안전을 자주 유린했고, 이는 되레 더 강고한 반공체제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만은 꼭 지적해두고 싶구나. 북한은 정순덕이 잡히고 몇 년 뒤 또 다른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의 무장 공비를 남한 지역에 침투시켰다. 그들 역시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빨치산’보다는 ‘무장 공비’로서 잔인함에 더 충실했고, 이승복 일가족 살해사건을 비롯해 숱한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지.

1968년 1·21 사태 때는 서울 시내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무장 공비의 총에 쓰러졌고, 1978년 충남 광천으로 침투한 무장 공비들은 경기도 김포까지 북상하며 한강을 헤엄쳐 건너기까지 10명 가까운 민간인을 살해했다. 적어도 1980년대 초반까지 ‘무장 공비’는 현실적인 공포의 대명사였고, 한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범죄자들의 이름이었지.

아빠는 한국 현대사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른 국가 범죄의 진상을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반대편이 저질러온 범죄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한다고 봐. 정순덕을 비롯해 빨치산이 산속으로 들어간 배경도 응당 살펴야겠으나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 전사”로 정순덕을 기리는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저지른 범죄 역시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다.

어떤 이념과 사상보다도 우선시해야 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이야. 개개인의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그 어떤 대의에도 우리는 반대하고 이를 범죄라 규정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해. 그것이 전쟁과 분단을 거치며 우리가 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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