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사진가 숀 오코넬은 셔터를 누르는 대신 대상을 지켜본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사진의 고귀한 가치를 알려주는 흔치 않은 영화다. 그 고귀함 역시 영화 제작 자본의 욕망으로 어느 정도 분칠이 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속 주인공 월터 미티와 사진가 숀 오코넬의 대화를 곰곰이 들어보면, 사진은 고귀한 동시에 하찮은 것이다. 눈표범을 발견한 순간 셔터를 누를까 말까 머뭇거리는 숀에게 월터가 “언제 찍을 거예요?”라고 묻는다. 숀은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난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네. 그냥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네”라고 답변한다. 혹자는 사진가인 숀이 괜히 겉멋을 부린다고 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직업 사진가들 사이에선 그런 순간이 실제로 닥칠 때가 있다. ‘내가 찍는 사진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못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드는 경우다. 이럴 때 ‘사진은 대체 뭘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회한을 느낀다.

결국 눈표범을 촬영하지 않은 숀

사진 촬영은 뭔가를 타인에게 보여주고픈 욕망의 행위다. 사진은 타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거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진가는 사진을 관객에게 팔아 돈을 벌거나 무형의 명예를 얻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끔 셔터를 함부로 누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기술적 한계 등으로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감흥마저 전달할 수 없다고 느낄 때다.

영화의 등장인물 숀은 눈표범의 아름다움을 미처 담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촬영을 망설였다. 물론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나쁘거나 가치 없는 사진은 아니다. 사실 ‘아름다운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는 말은 ‘착한 여자가 좋은 여자다’라는 말만큼이나 ‘헛소리’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은 제각각이며, 심지어 일반적으로는 ‘추하다’고 받아들여지는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사진은 ‘아름다운 것이 좋은 사진이다’라는 헛소리를 기필코 내뱉도록 ‘난센스’를 만드는 예술의 언어이기도 하다. 숀이 결국 눈표범을 촬영하지 않은 것이 난센스를 피하기 위함인지,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가 남들과 달라서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최고 걸작은 눈표범 같은 아름다운 피사체를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네거티브 밀착 인화지를 보고 있는 자신의 필름 관리자 월터의 모습을 촬영한 작품이 숀의 최고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볼 때, 숀은 가급적 헛소리를 피하고 싶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짐작된다.

우리는 사진을 예술로만 취급하고 싶은 수많은 편견을 목격하지만 사실 99.99%의 사진은 실제 세계를 묘사한, 평범하면서도 논리적인 언어를 담고 있다. 그런 평범하고 논리적인 사진이 다른 시공간에서 비범하면서 일상적이지 않은 ‘예술 작품’으로 재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 사진과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했던 사진 속 논리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파악되지 못하거나 망각되기 때문이다. 1940년대 신문에 실렸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이 현재는 미술관의 예술품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카메라를 들고 찍는 시간보다 그냥 들고 다니는 시간이 더 길다. 되도록 헛소리를 줄이고 예술에 대한 욕망을 자제한다. 그저, 왼손은 거들 뿐이다.

기자명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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