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8월15일 서울 광화문에서 보수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문재인 정권 규탄 집회가 열렸다.

8월27일 현재,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제일교회 집단감염발 코로나19 확진자는 959명이다(8월26일 자료). 2차 유행 진원지 중 최대 규모다. 8월12일에 최초 감염자가 나왔다. 전광훈 목사는 8월15일 광화문의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주도했다. 집회 참석이 확인된 사랑제일교회 신도는 현재까지 639명이다. 이 중 241명의 진단검사가 끝났고, 79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셋 중 한 명꼴이어서 양성률이 이례적으로 높다. 이 광복절 집회에 전국 교회들이 버스를 보내 동참했다. 그 결과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퍼졌다.

규모만 이례적인 게 아니다. 사랑제일교회는 교인 명단과 집회 참석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역학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의심환자인 교인에게 “검사를 받지 마라”라고 권하는 통화 녹취도 공개됐다. 8월25일에는 방역 책임자로 국민 신뢰가 높은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국민 건강을 생각하는 것인지 정치적 고려를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라고 비난했다.

이것은 코로나19 방역전 사상 초유의 사태다. 코로나19 시대가 열린 이후 처음으로, 국가의 방역정책과 질본의 지침에 정면 도전하는 조직된 세력이 등장했다. 1차 유행의 진원지인 신천지는 이만희 총회장이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는 등 납작 엎드리는 모양새라도 했다. 당시 방역 당국과 여론은 신천지 비난을 극도로 자제했다. 감염자를 비난하고 낙인찍으면, 감염자는 숨는다. 그러면 방역은 실패한다. 혐오는 방역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신천지 집단감염 국면에서는, 신천지의 부정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혐오와 낙인찍기를 자제하는 사회적 합의가 작동했다. 신천지도 신도 명단을 두고 정부와 줄다리기를 했지만 방역전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당국과 여론은 낙인찍기를 자제하고, 집단감염 진원지는 방역에 협조한다. 이 기본 합의는 이후 몇 차례 집단감염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힘이었다. 이태원 클럽 집단감염 때는 정부와 의료진들이 나서서 신원 비밀을 보장하는 진단검사를 제공해 낙인찍기 위협을 막아냈다. 클럽 방문자들도 이에 응해 진단검사를 받았다. 수도권 대확산은 없었다. 전광훈 목사와 사랑제일교회는 이 기본 합의를 흔들었다. 방역전을 ‘문재인 정부’와 동일시했고, 바이러스를 적대 세력의 음모로 간주해, 결국 반정부 투쟁과 방역 당국에 대한 저항을 이어 붙였다. 이번 확진자들은 혐오의 낙인이 찍히기 ‘전에’ 방역정책에 반발하여 숨거나, 병원을 탈출하거나, 찜질방에 들렀다. 반작용으로 당국과 여론도 감염자 낙인찍기를 삼가는 자제력이 바닥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전의 기본 합의는 아주 독특한 목사가 이끄는 교회의 공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MBC뉴스데스크 갈무리8월15일 광화문 집회에서 전광훈 목사가 김경재 전 자유총연맹 총재(위 왼쪽)와 손을 맞잡았다.

이 ‘컬트’는 어디서 왔을까? 민중신학자인 김진호 목사는 올해 7월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라는 책을 냈다. 책은 종교사회학적 접근으로 흥미로운 결론을 끌어낸다. 대략 외환위기를 전후로 해서, 한국 교회는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교양 있고 세련되고 고학력인 중상층 신자’가 주도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 무렵부터 개신교 교세 확장이 꺾이면서 신규 교인 유입이 끊겼다. 교회들은 다른 교회를 다니는 기존 교인을 유치해서 몸집을 불릴 수밖에 없었다. 고학력 중상층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예배와 교회 운영을 내세우는 유치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강남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이들의 문화 취향이 개신교계에 스며들었다. 그게 책이 말하는 ‘웰빙보수주의’다.

이 흐름에서 가난한 교인들은 체계적으로 소외되고 무력감에 빠진다. 기성 교회가 이들을 대변하지 못하면서, 변방에서 형성된 두 흐름이 소외된 신자들에게 먹혀들어 간다.

하나는 신천지로 대표되는 이질적 종단의 부흥이었다. 이들은 경쟁 사회에서 소외된 신도들에게 ‘중요한 일을 한다는 자긍심’을 부여하고 ‘칭찬’을 제공해 사회에서 받지 못하던 포상을 준다. 또 하나는 ‘적을 향한 분노’를 쏟아내게 해주는 개신교 내 극우주의였다. 동성애자나 빨갱이 등이 적에 해당하는데, 이 흐름이 현실 정치와 만나면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아스팔트 극우 개신교가 된다(18~22쪽 기사 참조). 김진호 목사는 코로나19 유행의 두 원천인 신천지와 아스팔트 개신교가, 주류 개신교가 소외시킨 신자들이 몸을 의탁한 두 궤적이라고 본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드러내는 엑스레이처럼 작동한다.

이 ‘컬트’는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되풀이해 만나게 될 더 중요한 문제도 제기한다. 한 극단주의 목사가 주도한 ‘컬트’가 온 나라를 뒤집어놓는 이 풍경은, 방역이 얼마나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자원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합뉴스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전광훈 목사가 8월17일 보건소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무임승차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는 소망

방역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 방역의 효과를 특정인에게 미치지 않도록 배제하기도 어렵고(비배제성), 누군가 방역 효과를 누린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튕겨 나가지도 않는다(비경합성). 경제학이 말하는 공공재의 조건을 얼추 충족한다. 공공재는 무임승차에 취약하다. 내가 국방비를 내지 않더라도, 군대가 나라를 지키면서 나만 빼고 지킬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러므로 나는 국방비는 안 내면서 국방 서비스를 누리는 게 합리적이다. 무임승차다.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국방비를 내지 않으면 군대는 유지할 수 없다.

공공재는 이런 무임승차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이를테면 국방비는 강제로 걷는 세금으로 충당하지, 개인의 지불 의사에 맡기지는 않는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책 〈바른 마음〉에서, ‘무임승차자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는 강력한 소망’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주장했다. 무임승차를 방치하면 공동체를 위해 협력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사회가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피해를 볼 때뿐만 아니라 별 상관이 없는 경우에도, 무임승차를 보면 분노를 느끼도록 진화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분노’가 우리 마음에 내장돼 있다는 얘기다.

방역도 공공재인 이상 무임승차에 취약하다. 모두가 마스크를 철저히 쓰고 다닌다면, 나 한 명이 마스크를 쓰지 않더라도 감염으로부터 보호받을 가능성은 크게 올라간다. 하지만 우리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마스크를 쓰라고 직접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에는 ‘내가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와 더불어 ‘무임승차자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가 뒤섞여 있다. 방역 공공재 공급에 온 사회가 매달리는 지금 같은 시기는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도 전 사회적인 현상이 된다. 방역 공공재는 이런 식으로 무임승차로부터 보호받는다.

그러나 이 보호막은 완벽하지 않다. 방역 무임승차는 여전히 작동한다. 교회발 집단감염이 2차 유행을 이끌고 있던 8월26일,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와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가 공동 기자회견을 연다. 두 협회는 “예배의 폐쇄는 곧 교회의 해체다. 정부는 교회가 드리는 현장 예배를 어떤 경우에도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27일 개신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방역 협조를 강하게 당부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은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다”라며 대면예배 금지 요청에 반발했다. 방역 공공재를 생산하는 공동의 노력에, 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들어 예외로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국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논거로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방역망에 구멍을 냈던 전례가 있다. 그 한국판이 ‘종교의 자유’로 등장했다.

전광훈 목사는 방역 무임승차라는 개념으로도 전부 포착하기 어려운 ‘급진파’다.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감염이 발생했는데도 8·15 반정부 집회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사랑제일교회 신자들이 대규모로 확진 판정을 받았고, 전 목사 본인도 확진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 게임이론 연구자인 최정규 교수(경북대)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무임승차도 아니고 ‘우물에 독 타기’를 한 다음에 그 물을 자기도 마신 수준이다. 경제학은 합리적 행위자를 가정하는 학문이라 이 정도의 행동을 연구할 개념이 사실 없다.” 무임승차도 ‘합리적 행위자’를 전제로 설명하는 개념이다. 전광훈 목사의 사례는 드러난 양태로 보면 ‘자해 전략’에 가깝다.

의외로, 방역 공공재를 위협하는 사례는 이런 자해 전략인 경우가 적지 않다. 비합리적 믿음과 무지가 자해적 선택을 뒷받침한다. 콩고와 자이르 등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시기에는, 감염된 원주민들이 병원을 탈출해 부족의 주술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가는 바람에 사망자를 늘린 사례가 종종 보고됐다. 문명의 지식에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사례라고만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런 일로 역학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패권국가에서 나왔다.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홍역 집단감염이다.

홍역은 95%가 예방접종을 하면 집단면역이 형성된다. 전국 단위 예방접종만 시행하면 퇴치할 수 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주는 개인 소신으로 예방접종을 거부할 수 있는 주였다. 그런 가운데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의학 논문이 부모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켜 접종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 논문은 훗날 데이터 조작으로 밝혀져 저자가 의사 면허를 박탈당했다. 과학자들은 예방접종이 안전하다고 설득했지만 한번 자리 잡은 대중의 믿음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고학력자들이 백신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캘리포니아주는 예방접종 비율이 떨어져 집단면역이 붕괴되어, 말 그대로 홍역을 앓았다.

ⓒ연합뉴스8월19일 서울 중랑구 금란교회에 설치된 선별진료소에서 한 교인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있다.

역학자인 황승식 교수(서울대 보건대학원)는 “이런 문제를 온전히 개인의 판단에 맡겼다가는 집단면역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가 캘리포니아 홍역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백신 접종을 거부하면 사회복지 서비스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공공재인 집단면역에 기여하지 않은 시민에게는 공공 서비스 접근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부과하는 접근법이다.

무지와 맹신, 그리고 ‘합리적 선택’인 무임승차. 둘 다 방역 공공재를 취약하게 만드는 위협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 위협이 주로 개신교계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은 꽤 역설이다. 고대 지중해의 초기 기독교는 역으로 ‘방역 공급자’가 된 덕분에 성공을 구가한 종교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 윌리엄 맥닐은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 교도들이 당대의 이교도들보다 우위에 있던 점은,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도 병자들을 돌보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교도들이 병자들을 팽개치고 도망갔던 반면 그리스도 교도들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전염병이 발생한 결과로 대부분의 제도들이 신용을 잃던 와중에 그리스도교는 교세를 확장했다.” 고대 기독교는 방역을 스스로 공급하는 데 성공한 덕분에 번성했다(이때의 초보적인 방역은 원리상 이교도를 배제할 수 있으므로 공공재는 아니다).

방역이라는 자원에 누가 어떻게 지불하는가. 이것은 인류사를 내내 따라다닌 거대한 질문이자 인류사 자체를 모양 지은 숨은 힘이었다. 이게 맥닐이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이다. 예를 들면 맥닐은 인도가 역사 내내 외부 침략에 취약했던 이유와 사회가 층층의 카스트로 구성된 이유를, 전염병이 돌기 최적인 인도 아대륙의 풍토로 소급해 설명한다. 전광훈 목사가 보여준 ‘컬트’는 이 ‘인류사적 질문’을 꽤 극단적이고 뒤틀린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던져놓는다. 이 질문을 일단 받아들이면, 지난 6개월간 한국 사회를 달궜던 여러 논쟁을 재구성할 수 있다.

8월27일 현재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를 3단계로 상향하는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3단계는 학교 등교와 스포츠 경기가 중단되고, 10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며, 공공부문은 필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재택근무가 시행된다. 민간도 같은 방식이 권고된다. 전면 통행금지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이동 통제 정책이다. 2단계 유지와 3단계 격상을 놓고 방역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정당들도 제각각 의견을 내고 있다. 방역은 근본적으로 불확실성을 다루는 일이어서 지금은 누구도 정답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가 지불하는가”를 기준으로 질문을 재구성해볼 수는 있다.

‘누가 지불하는가’에 대한 몇 가지 대답

사회적 거리두기는 방역전의 핵심 무기다. 이익은 감염을 줄이는 형태로 모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비용은 모두가 평등하게 치르지 않는다. 영업정지를 감당해야 하거나, 영업은 하더라도 유동인구가 줄어 매출이 크게 떨어지는 자영업자들이 큰 비용을 부담한다. 올해 2월 신천지 집단감염이 발발한 후 6주 동안, 서울의 의류업, 숙박업, 학원 등은 40% 안팎의 매출 하락을 직격으로 맞았다(〈시사IN〉 제657호 ‘코로나19 덮친 서울 7주 만에 1.6조원 증발’ 기사). 일용직 등 취약 노동계층도 일감이 줄어드는 형태로 비용을 부담한다. 반면 공공부문이나 대기업 노동자는 지불하는 희생이 크지 않다. 따라서 질문이 바뀐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할 때, 그 비용을 불평등하게 지불하는 문제, 사회적 약자들이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질문에 정치가 답을 갖고 있는지가 2단계냐 3단계냐를 판단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여기에는 “누가 지불하는가”의 문제가 하나 더 숨어 있다. 이동 제한을 완화하고 경제를 정상에 가깝게 작동시킬수록 사회적 약자들은 생계 위협을 덜 받게 된다. 하지만 의료진은 그만큼의 확진자를 더 감당해야 한다. 과부하 상태로 반년을 버텨온 방역 인력들이 경제를 돌려서 사회적 약자를 뒷받침하는 비용을 추가로 치르는 셈이다. 의료 붕괴라는 리스크도 추가로 계산에 넣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도 질문이 바뀐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낮은 단계로 유지하려 한다면, 그를 감당할 방역 인력의 충원과 회복에 자원을 투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자원은 어디서 가져오고, 또 누가 지불하는가? 이렇게 바꿔보면, 2단계냐 3단계냐 하는 질문은 더 이상 기술적인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원배분을 조율하는 문제, 가장 고전적인 정치의 문제가 된다.

ⓒ연합뉴스8월19일 서울 송파구의 한 PC방에서 송파구청 관계자들이 집합금지 명령문을 붙이는 모습.

학교 등교 문제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논란이었다. 등교를 전폐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전면 전환하면 각 가정이 감당해야 할 돌봄의 수준이 급격하게 올라간다. 노동과 돌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가정들은 이 추가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 반면 감염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등교를 재개하면 그 하중은 고스란히 학교 교사들에게로 간다. 교사들은 교육과 방역이라는 거의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올해 5월 등교 재개를 둘러싸고 나왔던 논란도 한 층을 내려가 보면 “누가 지불하는가”라는 질문이 숨어 있었다.   

코로나19 2차 유행이 터지자 정치권은 2차 재난지원금 논의에 돌입했다. 8월21일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공무원 임금을 4개월간 20% 삭감하여 2차 재난지원금 예산으로 쓰자”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환영보다는 비판이 많았고, 몇몇 경제학자들도 투박하다고 평가했다. 논란이 일자 조정훈 의원은 제안의 취지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설명했다. 8월27일에는 이렇게 썼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위험에 대한 격차’입니다. 예상되는 날짜에 예상되는 금액을 안정적으로 받는 삶과, 특정할 수 없는 수입을 벌며 생존하는 삶이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벌어지는 격차입니다.” 방법이야 어쨌든 이것은 “누가 지불하는가”라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8월23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특별재난연대세를 도입하자”라는 글을 올렸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소득이나, 코로나19 국면에서 소득이 증가한 사람의 증가분에서 5%를 부과해 10조원을 마련하자고 했다. 역시 방법이야 어쨌든, “누가 지불하는가” 질문을 좀 더 정면으로 마주보는 제안이다.

포털사이트 다음과 차량공유회사 쏘카의 창업자인 이재웅씨는 ‘특별재난연대세’ 개념에 지지를 보냈다. 그는 이런 명목의 세금이 신설되면 내야 할 세금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 자산가다.

결론은 일관된다. 방역은 의심환자를 추적하고 확진자를 찾아내고 병동을 확보하고 백신을 개발하는 일, 그 이상이다. 방역은 사회의 자원배분을 총체적으로 조정하는 일이다. 자영업자 지원, 의료인력 보강, 학교 등교의 문제, 조세와 재정의 부담 문제까지, 사회의 사실상 모든 자원이 재조정 대상에 들어간다. 이것이 흔히 방역전을 ‘준전시 상태’라고 부를 때의 진짜 의미다. 방역전은 전시 총동원 체제에 준하는 준비를 사회 전체에 요구한다.

누가 방역 무임승차자인가. 대놓고 무임승차를 외치는 이들은 차라리 식별이 쉽다. 하지만 방역이 사회 전체의 자원배분을 총체적으로 흔드는 일인 이상, 선하고 성실한 사람도 나도 모르게 무임승차자가 될 수 있다. 누군가 크게 손해를 보고 있을 때 내가 안전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미필적 무임승차’가 발생한다. 희생이 한곳에 몰려서는 안 되고 골고루 퍼지게 해줘야 한다. 희생의 배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얼버무려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시대 가장 독특한 ‘컬트’는, “누가 방역에 지불하는가”라는 핵심 질문으로 우리를 얼떨결에 인도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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