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19년 7월1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이 함께 만나 대화하고 있다.

“조선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된다 해도 통일정권 출현은 쉽지 않을 것.” 한반도에서 정전이 성립한 직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대외비 문서의 결론이다. 일본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필수라고 보았다. 그러나 ‘타협을 통해 내란이 통일로 발전한 예’도 없기 때문에 ‘남북 두 정권의 성립과 그 상태에서 평화 보장’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상이 정전 성립 이후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국제 회담을 앞두고 일본이 내린 결론이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전쟁도 통일도 아닌, 분단의 지속’이 한반도의 장래이며, 이를 전제로 일본 외교를 구상하겠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전쟁이었다. 미·중이 개입하고 일본과 소련이 지원해서 전개된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에 일본은 후방기지로 편입되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전쟁의 후방에서 일본이 미국에 의한 점령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외교권을 회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매달린 과제가 정전의 전망에 대한 정보 수집과 대책 협의였다. 일본 외무성은 세계 각지에서 업무를 재개한 대사관을 총동원해 해당 국가의 실력자들과 만나 정전이 일본의 정치·경제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한편, 정전 이후 한반도 문제 관련 국제회의에 일본이 참여할 가능성을 탐색했다.

정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일본 외무성 장관 오카자키 가쓰오는 주일 미국 대사 존 앨리슨을 만나 “이웃 나라로서 조선의 장래 운명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조선의 운명을 결정할 정치회의에 어떤 형태로든 일본이 참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앨리슨 대사는 “(정치회담) 참가국은 한반도에서 실제로 전투에 종사한 주요국”에 한정될 것이라고 거리를 두면서도 잘 연구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뉴욕 주재 사와다 렌조 유엔 대사가 유엔 주재 각국 대사를 상대로, 그리고 워싱턴 주재 아라키 에이키치 주미 대사가 미국 측 인사를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의 정치회담 참여를 설득하고 있었다.

ⓒEPA아베 일본 총리는 제재를 통한 대북 압박을 미국에 계속 요구하고 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 걸프전의 후방기지

그러는 사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문제 관련 정치회담의 참가는 좌절되었다. 이에 대한 일본 정계의 실망감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도쿄 지국장 헤이워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일본은 (중략) 여전히 극동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회의에 대표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국제사회가 “자국을 완전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시켜주지 않는 데 실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일본은 한국전쟁의 후방기지로서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초대 주일 대사 로버트 머피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인은 놀랄 만한 속도로 그들의 네 개 섬을 하나의 거대한 보급창고로 바꿔주었다. 일본이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군기의 출격 횟수는 공군이 72만 980회, 해병대 공군이 10만7303회, 해군(항모 발진)이 16만7552회였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전개된 공중으로부터 공격은 주로 일본 공군기지 15곳에서 발진한 폭격기와 전투기에 의존한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함대는 요코스카와 사세보의 해군기지로부터 발진한 것이었으며, 이에 탑승한 미군과 한국 군인들은 고텐바 등 후지산 기슭의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요코하마항을 통해 투입되었다. 이들 출격 기지를 포함해 일본 전국의 미군기지 730여 개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편입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와중에 이들 기지를 고스란히 안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독립했다. 같은 날 체결된 미·일 안보조약은 미국이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일본이 미국에 기지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피를 흘리는 대신 일본은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피와 땅의 교환은 불평등한 미·일 관계를 구조화했다. 한국전쟁 수행에 결정적 기여를 했는데도 한국전쟁 이후 국제회의의 장에서 배제되며 일본인들이 갖게 된 르상티망(증오 등 감정이 마음에 쌓인 상태)이 보통국가를 향한 열망의 근원이 되었다.

일본의 기지들은 베트남전쟁에서 유용하게 쓰였고, 걸프전쟁에서도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중동을 향한 출격·중계·보급 기지로 다시 유용성이 확인되었다. 일본은 평화헌법 제9조의 제약 속에서 자위대를 파견하는 대신 다국적군에 13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제공했다. 이를 미국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국제사회의 평가는 매정했다. 일본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에 무임승차한 이기적인 국가’로 낙인찍혔다. 다국적군의 도움으로 독립을 회복한 쿠웨이트가 국제사회에 내보낸 감사 메시지에는 일본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일본 사회에 침잠해 있던 르상티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보통국가로의 시동이 걸린 순간이었다.

ⓒ남기정 제공한반도 정전 직후 일본 외무성(오카자키 장관)은 대외비 문서에 “조선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된다 해도 통일정권 출현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보통국가로의 진격이 개시된 것은 한반도 ‘유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1990년대 초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이 회자되는 한편, 북한 당국의 ‘불바다’ 발언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다. ‘전쟁도 통일도 아닌, 한반도 분단의 지속’을 전제로 구상된 ‘전후 외교’가 탈냉전기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탈냉전으로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보였던 미·일 동맹의 재조정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던 미국은 일본에 ‘전장 위 군화(boots on the ground)’로 함께 설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받으려면 헌법 제9조가 개정되어야 했다. 2010년 이후 북한 핵미사일 개발을 견제하고, 중국의 군사적 대두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은 미·일 동맹에 매달렸다. 미국의 신뢰를 얻기 위해 군화를 신고 전장에 서겠다고 나섰다. ‘전후로부터 탈각’을 외치며 아베 내각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한국 정부가 너무 급하게 일방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면, 미국과 협력하며 제동을 걸어야 한다.” 2017년 아베 총리의 외교 브레인들이 모여 작성한 정책 제언서 가운데 한국 관련 결론이다. 참가자들은 제언서에 “미·일 동맹을 재구축한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스스로 ‘일본판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라 불렀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가 후원하고 있었고, 제언서 출판에 맞춰 아미티지와 나이가 메시지를 보탰다.

ⓒEPA오키나와 가데나 미군기지. 걸프전에서 중동을 향한 출격·중계·보급 기지로 쓰였다.

“북에 대한 최고의 협상 무기는 군사적 압박”

지난해 7월1일 일본은 한국에 대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관련 주요 소재 세 품목의 수출규제 조치를 일방적으로 발동했다. 6월30일 판문점에서 남북한과 미국의 세 정상이 만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스러져가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동력을 가까스로 되살려놓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아베는 제언서의 결론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제언서 작성에 참가한 노가미 요시지 일본 국제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겠다고 한 뒤 CSIS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북한의 의도에 말려들지 말라며 미국이 신중해져야 한다고 훈수하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이면에서 일본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최근 존 볼턴의 회고록(〈The Room Where It Happened:A White House Memoir〉)에서 확인했다. 그 모습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를 때, 일본이 뉴욕과 워싱턴에서 벌이고 있던 외교와 판박이다.

볼턴에 따르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4월18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에서 아베는 트럼프에게 “북에 대한 최고의 협상 무기는 군사적 압박”이라며 훈수를 두고 있었다. 또 정의용 안보실장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비공개로 백악관을 찾은 5월4일에는,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이 미국의 ‘낙관론’에 우려를 나타내며 서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쁨에 맞서고 싶어 했다고 한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5월28일에도 아베는 트럼프와 전화 회담을 통해 마러라고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다시 확인하며, 일본인 납치 문제에서 구체적인 공약이 필요하다고 강경론을 주문했다. 아베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직전에도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에 하루 앞서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와 양자 정상회담을 하며 북한에 과도하게 양보하지 말라고 특별히 요청하고 있었다. 4월26일에 또다시 워싱턴을 방문한 아베는 하노이 노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트럼프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참가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평가절하한 데 대해, 아베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위반임을 강조하며 제재를 통한 대북 압박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판문점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회동을 강행하자, 일본이 취한 행동이 수출규제 조치의 발동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이번에는 고노 다로 방위성 장관이, 일본이 적 기지 공격 능력을 갖는데 한국이 무슨 상관이냐고 뻗대고 있다.

일본이 아직 분단과 전쟁을 끝내고 담대한 평화로 나아가는 한반도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이것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꼬이게 한다. 일본을 한반도 평화에 어떻게 관여시킬 것인가, 혹은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이것이 또 하나의 핵심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기자명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