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8월24일 닉슨 대통령 특사로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2주 동안 모든 일정을 미루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협상은 원만히 진행됐다. 미군 7사단 1만8000명을 감축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장기 군사원조와 함께 2만명 이상의 주한미군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확약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파탄이 났다. 8월26일 애그뉴 부통령은 “한국군 현대화가 완성되는 향후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처절한 배신감을 느낀 박 대통령은 “미국 측 방침에 일희일비하지 말자. 자주국방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하며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방위산업 진흥, 7·4 남북공동성명, 핵무기 개발 구상에 이르기까지 이후 박정희 정부의 주요 안보정책 결정은 대부분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이뤄졌다.

주한미군 감축·철수 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억 달러 수준의 현 방위비 분담금을 50억 달러로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 말 한·미 실무협상팀은 ‘첫해 13~14%, 2024년까지 매년 7~8% 인상’ 방안에 공감대를 이뤘고, 양국 외교부 장관 승인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면서 협상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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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대부분은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감축 혹은 철수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미국 의회가 제정한 국방수권법(NDAA)에서 주한미군 병력을 2만8000명 이하로 감축하는 경우에는 사전에 의회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공화 의원들이 초당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나 감축에 반대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특히 바이든 후보는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겠다는 언급을 명확히 하고 있다.

하지만 낙관하기는 이르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주의적 대외정책에 찬동하는 미국 유권자 수가 적지 않다. 이들은 한국·독일·일본 같은 부유한 국가들이 안보를 위해 미국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믿는다. 트럼프는 대선 국면에서 이러한 프레임을 한층 강조할 것이고, 독일에서의 감군 조치는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닉슨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 현실주의자들도 주한미군, 특히 지상군 철수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북한이 전술 핵과 다수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상황에서 대규모 미군 병력을 평택기지 한 곳에 주둔시킨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시각이다. 이는 2사단이 철수하는 대신 해·공군과 정보·정찰·감시 분야에서만 한·미 공조를 유지하면 된다는 제안으로 이어진다.

퀸시 연구소 같은 리버럴 성향의 싱크탱크는 아예 180개국에 파견돼 있는 해외 주둔 미군 17만4956명 전부를 철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구촌 곳곳의 미군 병력은 제국의 과도한 야망의 상징일 뿐이며, 전쟁과 불안정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감축되어도 분담금 대폭 인상은 안 된다”

이렇듯 주한미군의 변화를 지지하는 워싱턴 내부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다.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트럼프 행정부의 방위비 분담금 요구에 따르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감축되더라도 미국의 대폭 인상 요구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응답이 68.8%를 차지하는 국민 정서를 고려하면 대안이 되기 어렵다. 적극적 정책 로비를 통해 미국의 입장을 변경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성공한 사례가 드물다.

미국 지상군 철수를 수용하는 대신 확장 억제와 해·공군 및 정보·정찰·감시 분야의 협력을 담보로 받는 대안도 있다. 주한미군 전면 철수가 논의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듯 자주국방을 지향하면서 미군의 변화를 남북관계나 비핵화, 평화체제와 연동하는 방안도 숙의해볼 필요가 있다.

주한미군의 현상 변경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현실이 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맞닥뜨렸던 ‘진실의 순간’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막연한 낙관론 대신 깊은 고뇌와 전략적 계산으로 이 사안에 임하고 있는가.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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