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 테러는 국제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지금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역시 국가안보의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예고한다. 무엇보다 안보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에너지, 식량, 환경 등의 생태안보도 거론돼왔지만 팬데믹과 같은 생물학적 위협에 대한 안보 논의는 부차적 요소로 취급받았던 게 사실이다. 사스와 메르스 사태를 둘러싼 논의가 공공보건의 영역에 국한되고 말았던 배경이다.

팬데믹 확산은 국가안보와 지구촌 안보의 경계 또한 무너뜨리고 있다. 개별 국가가 아무리 철저히 봉쇄조치를 단행하고 방역작업을 계속한다 해도 상호 의존의 국제관계 속에서 이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기란 매우 어렵다. 지구촌 안보 차원에서 팬데믹을 다루지 않으면 개별 국가의 안보가 보장될 수 없다는 새로운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청와대 제공

마윈 알리바바 회장의 최근 행보

이러한 역설은 ‘모든 인류가 운명공동체’라는 당위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폐쇄적 국수주의나 일국 우선주의, 일방주의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가 코로나19에 맥을 쓰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남긴 ‘한·중은 운명공동체’라는 발언을 두고 한 보수 논객은 ‘한·중 전염병 공동체’라고 조롱한 바 있다. ‘자유민주주의만이 한국의 운명’이기 때문에 공산 독재국가 중국과는 운명을 같이할 수 없다는 단정이었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만 넓혀보면 인접한 나라들 사이의 상호 영향을 사상과 이념의 차이만을 기준으로 끊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 게 얼마나 무지 어린 단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거액을 들여 독일의 저명한 바이러스 백신 회사를 흡수 합병하려 시도한 바 있다. 이에 독일 사회민주당 배르벨 바스 의원이 남긴 준엄한 비판은 큰 울림을 준다. “(코로나19) 백신이 있다면 모두가 맞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사태는 배타적 국가안보가 아니라 지구촌 인간안보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당위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의 최근 행보도 흥미롭다. 한국과 일본이 마스크 확보를 위해 전쟁을 치르자 그는 일본 홋카이도에 한국산 마스크, 한국에 일본산 마스크를 전달했다. 지구촌과 동북아를 구성하는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이벤트였다.

코로나19는 공동의 적이다. 국제사회의 중지를 모으고 집단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서 한국은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이번 사태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국가가 한국이라는 평가가 그 근거다. 국내 언론의 인색한 평가에도 국제적인 찬사가 이어지는 이유는 주요 전파지인 대구·경북을 봉쇄하지 않고도 민주적이고 투명한 방법으로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언론은 중앙집권화된 민주체제, 의료보험의 보편화와 준비된 공공보건 시스템, 사회적 응집력과 수준 높은 시민의식, 의료계 인사들의 전문성과 헌신성, 정치 지도자의 의지와 수월성을 주요 요인으로 평가한다. 문화와 제도의 차이를 감안하면 이러한 한국형 모델이 단시간 내에 보편화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검역, 방역, 검사, 역학조사와 격리, 치유 등 공공보건의 기술적 측면에서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국제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공공재를 제안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구촌 공동의 위협에 대처하는 국제 공헌 국가가 되는 일 역시 그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일상일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역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되살아난다. …이제 그들은 안다. 그들이 가장 갈망하고 얻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인간애(human love)라는 것을.” 대규모 감염병 위기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이를 이겨낼 첫 번째 원칙은 인류 전체가 쉽사리 끊어내거나 배척할 수 없는 하나의 몸으로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인류애’라는 말에 대한 고뇌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KIST 초빙 석학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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