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유산정보센터 제공일본 도쿄 신주쿠 소재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설치된 ‘메이지 산업유산 정보센터’의 모습. 강제노동 피해자가 겪은 고통에 관련한 기록을 전시하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5년 7월5일,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제철, 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 산업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본 정부에 ‘완전한 역사’를 기록할 것을 권고했다. 일본 정부는 권고 이행을 약속했으나, 지난 3월31일 일본 정부가 개설한 ‘메이지 산업유산 정보센터’에 강제노동 피해자의 고통의 역사가 소거되어 전시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일 역사 마찰의 새로운 진원지가 되고 있다.

문제의 기원은 약식 회의록에 포함된 일본 측 성명(document WHC-15/39. COM/ INF.19)이다. 성명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인들이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노역을 했다(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정보센터와 같은 시설의 설치 등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to remember the victims)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 여기에서 ‘forced to work(강제로 노역하다)’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일본이 ‘본인 의사에 반하여’라는 표현과 ‘강제된 노동’이라는 표현을 모두 수용한 것은 외교적으로 우리에게 큰 성과”라고 설명했으며 한국 미디어는 조선인 ‘강제노역’ 또는 ‘강제징용’을 일본이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2015년 6월에서 7월5일까지 벌어진 일

이에 대해 일본 기시다 후미오 당시 외무장관은 “‘forced to work’라는 발언이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발언했으며, 외무성은 강제노동(forced labor)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부인했다. 열흘 뒤 발표된 일본 외무성의 공식 번역본에서 위 문구는 “그 의사에 반해 끌려와, 어려운 환경하에서 일하게 되었다(働かされた)”라고 번역되어, 강제성이 약화된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해 2015년 6월21일에서 7월5일까지의 경위가 중요하다. 6월21일, 한·일 외교장관은 강제노동 사실을 반영하는 방안에 큰 틀에서 합의하고, 한국 측은 징용공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시설 설명에 포함시킨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보였다. 6월28일 독일 본에서 세계유산위원회가 개막하자, 한국은 의견진술을 통해 ‘강제노동(forced labo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기시다 외무장관이 ‘forced labor’라는 용어에 반발하여 윤병세 장관과의 비공식 전화 회담을 통해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다고 전했고, 윤 장관은 결국 이를 수용했던 것이다.

ⓒ연합뉴스2015년 6월 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장관이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당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21개 회원국은 표결에 의한 결정을 거부하고 한·일 양측의 합의를 강하게 요구했다. 한국이 반대하면 무산될 위기에 있었고, 이듬해로 미뤄질 경우, 한국은 회원국으로 남아 있으나, 일본의 회원국 임기가 끝나는 상황에서 일본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또한 미국의 압력도 한국에 유리한 것이었다. 미국 하원의원이 7월1일, “전쟁포로를 노예노동에 이용했다는 사실”을 포함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이 등재를 시도하는 8개 지역 중 5개 지역에 모두 26개의 전쟁포로 수용소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양보’했던 것은 일본 측이 쓴 ‘against their will’과 함께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을 두고 일본이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며, 이를 소기의 성과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메이지 산업유산 등록을 둘러싼 한·일 협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협의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 관련성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한·일 간에는 국장급 협의와는 별도로, 2015년 2월 제1차 고위급 협의를 시작으로 12월28일까지 8차례 협의가 개최되었다. 4월11일에는 제4차 고위급 협의가 열렸고 대부분의 쟁점이 타결되어 잠정 합의에 이르러 있었다. 일본 정부의 책임 문제와 사죄, 금전적 조치와 같은 세 가지 핵심 사항과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소녀상 문제,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 자제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추가로 관련 단체 설득, 제3국 기림비, ‘성노예’ 용어에 관한 비공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잠정 합의 내용에 관하여 양국 정상의 추인을 받는 과정에서 일본 쪽이 비공개 부분인 제3국 기림비와 관련해, 기림비 설치 움직임을 한국 정부가 지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추가해달라고 요구해왔다. 한국 쪽은 이미 타결된 내용에 대한 본질적 수정이므로 수용 불가 입장을 통보하는 한편, 외교부는 내부 검토회의에서 네 가지 수정 삭제 필요 사항을 정리하고 있었다. 비공개 부분의 제3국 기림비, 성노예 표현, 공개 및 비공개 부분의 소녀상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외교부가 비공개 합의 내용이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후 메이지 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 문제로 한·일이 갈등하면서 협의가 교착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6월21일부터 7월5일까지 한·일 협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고위급 협의가 만들어놓은 불리한 지형에서 한국 외교부는 일본에 일정한 ‘양보’를 요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고위급 협의에서의 패착이 메이지 산업유산 등재 문제에서 한·일 역전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겠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양보’했는데도 불구하고 ‘위안부’ 협의에서도 일본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어, 이 시기 한국의 대일 외교는 이후 한·일 간 역사문제 해법에 임하는 한국 정부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간의 경위가 일본 측의 무성의를 변호하는 재료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이 성의를 갖고 이행해야 할 의무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against their will) 강제로 노동해야 했던(forced to work) 피해자들(victims)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성실히 수행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수용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를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으로 천명한 이상, 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2015년 7월5일의 결정, 즉 메이지 산업유산 등재의 대전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메이지 산업유산 정보센터의 전시 내용은 일본이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일본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아가 일본의 이러한 행동이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아니라, 사실을 호도하려는 목표에서 나오는 의도된 행위라는 점이 확인된다면, 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2015년 7월5일의 결정을 취소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한국 정부는 이날, 일본 정부의 성명을 수용하는 발언을 통해, “일본 정부가 천명한 조치들을 성실히(in good faith) 이행할 것을 신뢰하기에” 등재 결정에 참여했음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보여준 행동은 신의성실의 원칙(Principle of Good Faith)에 위배되는 것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일본 정부 행동은 신의성실의 원칙 위배

일본 외교에서 유네스코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후 평화주의’와 이에 기초한 ‘평화 외교’가 유네스코의 정신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후 평화주의’를 정식화하는 과정에서 유네스코는 지대한 의미가 있다. 유럽에서 냉전이 가시화하는 가운데 발표된 ‘유네스코 8인의 사회과학자 성명’은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토의하기 위해 전국의 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평화문제토의회’ 성명은 전후 평화주의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앞의 유네스코 성명은 12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네 번째 항에서 8인의 사회과학자들은 “근대 전쟁이 세대에서 세대로 계승되는 국가적 자부의 신화, 전통, 상징 등에 의해 그 씨앗이 만들어진다”라는 인식에서 이러한 상징조작을 비판하고 부정했다. 이에 화답하여 일본 지식인들의 평화문제토의회 성명은 “국가적 자부의 상징, 신화, 전통이 전쟁의 발발을 촉진해왔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례에서 볼 때 분명하다”라고 하여, 유네스코 성명의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했다. 비록 식민지 문제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국가적 자부의 상징이 전쟁 발발의 원인으로 작용해왔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연합뉴스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1998년 10월8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던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반성과 사죄는 전후 일본이 견지해온 평화주의가 이룬 성과라고 평가했다. 현재 한·일 관계가 1998년의 한·일 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에 정초해 있는 것이라면, 메이지 산업유산의 유네스코 등재 문제에서 일본 외교가 취해야 할 방향이 명확하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은 유엔과 유네스코 정신에서 볼 때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처리한 데 불과하다. 메이지 산업유산의 유네스코 등재 문제 앞에서, 일본 외교는 문제의 본질을 감추는 언어의 기술에 머무를지, 인류의 보편정신 위에 설지 갈림길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 운동’ 이후 국제사회는 인종차별과 식민지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식민통치와 노예무역을 지지했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그들은 동상 철거 운동을 통해, 문화재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메이지 산업유산의 시대착오를 일본 외교가 깨닫기 바란다.

기자명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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