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을 만든 김미례 감독(왼쪽)과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1974년 8월30일, 일본 도쿄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에서 폭탄이 터졌다. 8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 달 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무장전선)’의 이름으로 성명서가 나왔다. ‘미쓰비시는 옛 식민주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으로 기능했으며 장사라는 탈을 쓰고 시체를 뜯어먹는 기업이다. 이번 작전은 미쓰비시를 두목으로 하는 일제 침략기업, 식민자에 대한 공격이다.’

전후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패전 후 일본은 피해자의 자리에 섰다. 가해국이라는 자각이 없던 시기, 처음으로 식민지 책임을 묻는 목소리였다. 부대원들은 근현대사 전공 대학원생, 회사원, 대학 중퇴자 등이었고 전공투 세대였다. 이듬해 5월까지 총 아홉 차례 연속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미쓰이물산, 대성건설 등 식민 지배를 배경으로 성장한 기업이 대상이었다. 행동부대의 이름은 늑대부대, 대지의 엄니 부대, 전갈부대였다.

노동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김미례 감독이 〈노가다〉(2005)를 촬영할 때였다. 한국 건설산업의 중층적인 다단계 구조가 일제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건설 일용노동자의 거리 가마가사키를 찾았다. 일본에서 상영회를 할 때 한 노년 관객이 일본 노가다 운동의 전신이 무장전선이라며 영화화를 당부했다. 당시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감독은 다시 그 일을 떠올렸다. 두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질문이 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2014년부터 자료를 모으고 2016년 촬영을 시작했다.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생각 없는 폭탄 마니아’라고 불리며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겨준 부대원들의 근황을 전한다. 세 명은 지명수배 중이고 두 명이 복역 중이다. 한 명은 체포 당시 청산가리를 먹고 사망했고, 한 명은 2017년 옥중에서 죽었다. 두 사람은 출소했다. 45년이 지났지만 이들의 곁에는 ‘지원자들’이 있다. 감옥에 있는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다. 다섯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로 첫 극장 개봉을 앞둔 김미례 감독과 영화 상영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를 만났다.

극장 개봉 소감과 두 사람의 인연을 들려달라.

김미례:독립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하면 관객이 없다. 관심 있는 사람들 위주로 커뮤니티 상영을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개봉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일본에 가서 시사회를 했더니 영화에 등장한 (대지의 엄니 부대원) 에키타 유키코 씨를 비롯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극장 개봉을 하자고 했다. 전원일치였다. 두려움도 있지만 한국에 이 영화가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개봉이 확정됐고 한국에서도 마침 조건이 되어서 할 수 있었다.

심아정:‘가해자성’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2018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조사팀 간사로 있을 때 김미례 감독을 만났다. 참전군인 인터뷰를 할 때 같이 갔는데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가해 경험을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죄송한 눈빛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눈이 반짝거린다. 시민법정이 열리고 피해자가 울면서 호소했는데 가해자가 울분을 토하며 뛰쳐나갔다. 본인은 학살한 적이 없는데 뭉뚱그려 살인자라고 하니 폭탄이라도 터뜨려 죽고 싶다는 거였다. 감독님이 같이 담배 피우러 나가더니 한참 안 들어왔다. (듣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고 나니 그가 듣기의 달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가 말하면 그래도 귀 기울이려고 하는데, 가해자 말은 들으려는 사람이 없다. 그런 고민에 대해 나누다가 이번 영화의 편집본을 봤다. 공동체 상영을 기획하고 토론한 내용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오사카의 인력시장인 가마가사키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김미례:(늑대부대 대원) 다이도지 마사시 씨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홋카이도 밖에서 처음 정착한 데가 가마가사키다. 1년 동안 그곳에서 살며 1970년대 인력시장의 문제를 눈으로 목격했다. 재일조선인 문제도 글로만 접하다 실감한 거다(조선인 강제노동 문제가 전후 반인권적인 인력시장으로 이어졌다). 이후 운동하기 위해 호세이 대학에 진학했다. 안보투쟁부터 시작해 운동이 상승하던 시기, 가마가사키는 시간은 다르지만 (부대원) 각각이 교차하던 장소다. 일용노동자 투쟁과 관련 있는 전갈부대와도 이어져 있다. (대지의 엄니) 사이토 가즈 씨도 인력시장에서 노동한 경험이 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 폭파한 미쓰비시중공업 본사의 최근 모습. 영화 속 장면이다.

무장전선이 전공투 세대라고 했는데?

심아정:전공투는 한국에서 오해로 점철된 운동이다.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은 대체로 남성 엘리트, 대학 중심의 수입산 지식인데 여기에 전공투의 자리가 없다. 1968년 베이비붐 세대가 대학생이 되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수가 많고 등록금은 비싸고 한 강의당 500~2000명이 듣던 시기였다. 학생 조직은 있었지만 이와 관련 없는 학생들이 다 같이 운동을 일으켰다. 도쿄 대학의 경우 대학원 중심이었다. 의과대 인턴들이 노동수탈을 겪고 있었다. 엘리트로서 ‘자기부정’이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 자신이 누리는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걸 부정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학 안에서 먹고살았다. 커리큘럼을 스스로 만들었는데 책 읽고 끝장 토론을 하는 과정이 많았다. 이때 처음으로 재일조선인 문제가 나왔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일어난 변화가 중요한데 진압당해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우리는 전공투 하면 야스다 강당이 불타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대학이나 국가가 강요하는 지식에 대해 ‘우리가 만드는 지식’, 대안적인 앎이 있다고 저항했던 운동의 성격이 크다.

훗날 어떻게 무장전선과 연결되나?

심아정:전공투 이후 적군파가 있고 많은 지류 중 하나가 무장전선이다. 대부분 복학했지만 안전한 자리를 거부하고 대학 밖에서 인력시장운동,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을 이어갔다. 무장전선은 무력투쟁을 선택했다. 지금은 굉장히 과격해 보이지만 당시 운동권이 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제3세계와 연대하는 마음이었다(제3세계 해방투쟁은 대부분 무장투쟁의 형태였다). 대표가 없고 중심이 없고 리더가 없는 전공투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좌파도 이들을 외면했다. 당사자들은 감옥에서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감옥 밖의 사람들(지원자들)과 이어져 왜 실패했는지, 왜 의도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왔는지 들여다본 것이다. 이들의 옥중 서간을 보면 일본 국민이 다 다른 얼굴, 각기 다른 삶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로 뭉뚱그린 관념성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벗이 될 수 있었던 동지들을 죽이고 말았다고도 한다. 사건 당시에는 국민들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있었다. 하나의 표현이었지만 일본 국민들과 소통할 회로를 갖지 못했던 거다.

일본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데 전후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세대다.

김미례:(늑대부대 대원) 다이도지 마사시 씨의 고향 홋카이도라는 장소에 주목했다. 소학교에서 만난 아이누 (홋카이도의 소수민족) 친구들이 있었다. 이들이 사는 동네는 너무 비참하고 교사도 차별을 한다. 기차에서 떨어진 석탄을 주워다 팔아 먹고사는데 그 과정에서 사고도 당한다. 학교 근처 이탄기 해변가에 가면 떠밀려온 해골을 볼 수 있었다. 징용된 중국인·조선인의 해골이다. 바닷가에서 침략의 역사를 교사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이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죽었을까? 전쟁을 겪은 부모들의 직접적인 영향도 있었을 테고, 이런 경험이 도쿄로 나왔을 때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해변은 일본 드라마 〈마더〉 촬영지로 유명한데 실제 가보면 공장지대다.

영화의 기획자가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다. 사건 당사자들이 일본 취재진의 접근은 꺼린다고 들었는데.

김미례:일본 사회에서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말지 내가 결정할 수 없었다. 후지이 다케시 씨에게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작업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물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묻어버렸다. 그는 끄집어내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자료가 없어서 책과 자료를 모아주었다. 처음엔 일본에서 하면 되지 왜 나일까 했는데 나중에야 일본 사회가 이것을 만들기 어렵겠다는 걸 알겠더라. 〈노가다〉 만들었을 때 상영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잊히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왔다. 분단과 일제 식민지 문제에 관심들이 많았다. 〈외박〉도 그렇고 한국보다 일본인이 많이 봤다. 출연진이 미디어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데 두 작품이 알려져서 응해주셨다.

당사자 면회가 불가능했다. 나중에 출소한 에키타 유키코 씨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김미례:(한국에선) 현장에서 점거하다 끌려가도 경찰서 가면 면회할 수 있으니까 그런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안 되더라. 에키타 유키코 씨 면회는 법적으로 막을 이유가 없다. 당일 형무소 관계자가 공손한 말로 안 된다고 하더라. 감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아정:에키타 씨는 시골에서 평범하게 산 사람이다. 1972년 처음 한국에 왔는데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거론하며 일본의 책임에 대해 물었다. 자신은 평범한 여대생이고 자기 시대의 일도 아니지만 가해자의 자리를 자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보통의 여대생이기 위해 다른 여자들이 위안부가 되었다는 걸 처음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거다. 2018년 일본 기업이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우리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과거엔 (전범국가에) 전쟁 책임은 물어도 식민지 책임은 묻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이 비로소 식민지 책임을 묻는 거였고) 본인들이 선구적인 물음을 던졌다는 사실에 힘을 얻은 것 같았다.

수감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부대원을 지원하는 활동도 4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이나 인물이 있다면?

김미례:홋카이도에 처음 갔는데 광활하고 훼손할 수 없는 자연의 느낌이 있었다. 일본 본토가 정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정복되지 않은 땅의 느낌이었다. 다이도지 마사시 씨에게는 26세 이후 돌아올 수 없게 된 곳이지만 풍경을 많이 담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출발의 지점이 거기였고 복원시키려 했던 장소도 그곳이었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그 정서를 표현했다.

심아정:다이도지 마사시 씨의 법적 여동생 지하루 씨가 인상적이었다. 제일 똑 부러지게 말하더라. 부대원들과는 세대 차이가 난다. 전공투 당시 지하루는 초등학생이었고 전범기업 연쇄 폭파 때는 고2였다. 20대 중반 친구 집에 갔다가 다이도지 마사시의 옥중 서간집 소개를 보았다. 악마인 줄 알았는데 일반인처럼 평범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데 놀랐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형이 확정되면 가족과 변호인 외 연락이 단절되는데 법적 여동생이 되어 소식지를 발간했다.

그는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전공투의 한 지류인데, 바리케이드 안에서도 밥 짓는 건 여자였고 이들의 다리를 만지는 남자가 있었다. 같이 싸우지만 싸울 수 없는 이들이 1970년대 ‘우먼리브’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이후 미시적인 생활투쟁으로 전공투를 계승했고 그다음 세대가 지하루다.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대등한 관계에서 지원활동을 해나갔다.

실패한 운동이 시민사회에 미친 영향은?

김미례:1970년대 운동은 이미 망해가고 있었다. 살인사건(연합적군 숙청 사건)까지 있어서 상처들이 있었다. 동아시아 무장전선 때문에 운동이 더 공격을 받았다고 책임을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스로 평가해봐야 하는 문제다. 연구자가 아니라서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그들은 최소한 뭔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잘못도 저질렀다. 조직운동과 다른 결로,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전쟁 책임의 문제를 받아 안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폭탄이라는 수단에 동의할 수 없지만 전쟁 책임 문제에 공감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일본 사회에서 이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두텁게 있다는 걸 알아달라고 당사자들이 말하더라.

사건 이후 40년 동안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심아정:구성원들이 다양해서 놀랐다. 전갈부대는 일용직 노동자와 연대를 많이 했다. 왜 이런 문제에 갑자기 일용직 노동자가 나오나 생각할 수 있지만 무장전선이 결국 얘기하고 싶은 건 강제노동과 착취의 문제인 것 같다. 일상에서 수탈하는 시스템이 만연해 있다. 현재 동북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다. 원전이 문제인데 안전하다고 말한다. 우리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도 그런 마음이 있다. 컨베이어에 끼어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컨베이어 벨트를 칼로 끊어내고 싶은데 못한다. (지원활동이) 당사자들이 아닌 사람들의 운동이라는 점과 당사자를 변화시킨 사람들이 이들이라는 것도 의미가 크다.

김미례:왜 이렇게 오래 지원하느냐고 물으면 ‘감옥에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일상적인 거다. 공통적으로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사회운동과도 연결되어 있다. 노숙자를 지원하며 출판사에 다니는 분도 있고, 원전 반대운동을 하는 분도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무장전선은 1970년대로 끝났지만,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원자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만들면서 고심했던 부분은?

김미례:여러 사람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들을 영웅화하려고 하지 마라, 영웅이 아니다’ 이런 메일을 받기도 했다. 내가 영웅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질문을 다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폭력과 비폭력은 붙어 있는 말이다. 가해와 피해도 마찬가지다. 한 사건이 왜 일어났고 어떤 상황과 조건에 놓여 있었는가, 그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질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 시기에 개봉한다.

김미례:반일 이슈는 늘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달리 개인과 개인이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영화 속 등장인물도 말하지만, 만나면 그냥 같은 사람이다. 국가가 갈라놓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작업이 (나를) 철들게 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타협 없이 밀어붙이는 면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없고, 섬세하게 봐야 하는 간극이 있다. 이 영화로 인해 그 간극을 볼 수 있게 됐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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