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3월2일 세상을 떠난 이수산 선생님이 자택에서 시민모임 식구들과 식사를 하는 모습.

8월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적어도 열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돌아가셨습니다. 헤아려보면, 네덜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 얀 루프 오헤른을 비롯해 중국에서 두 분, 필리핀에서 한 분, 인도네시아에서 두 분, 동티모르에서 두 분, 한국에서 세 분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전쟁과 전후를 살아낸 당신들이 스스로의 존엄 회복을 요구하며 싸워온 역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열한 분 중에 이수산 선생님이 계십니다. 1928년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나 2020년 3월2일 돌아가신 이수산.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와 함께 활동한 대구의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활동가들이 기억합니다.

코로나19로 대구 전체가 자가격리 중이던 때라 이수산의 장례식장은 쓸쓸했습니다. 이수산을 기억하는 시민모임 식구들은 서로 손을 잡아주지도 꼭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서현정씨는 수산 할머니를 2008년 7월 시민모임이 해수욕장으로 나들이를 갔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수산 할머니는 직접 만든 수영복에 꽃을 단 수영 모자를 쓰셨습니다. 손재주가 좋은 분이라고 부러웠는데, 평생 옷 만드는 일을 하셨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산 할머니는 2004년 여름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러시아에 면해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자무쓰(佳木斯)에 살면서 그곳의 노동교양소(교도소에 해당)에서 죄수들의 옷과 이불을 만드셨습니다. 잠수 실력도 뛰어났던 수산 할머니는 회원들에게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현정씨는 2017년 시민모임의 브랜드 희움(Heeum) 사업국 상근활동가가 되어 수산 할머니를 다시 만납니다. 달마다 할머니들 댁을 방문하다가 언젠가 심달연·김순악 두 분의 압화 작품으로 만든 희움의 신상품 양말을 가져다 드렸더니 수산 할머니가 ‘실 값을 줘야 한다’며 돈을 꺼내시더랍니다. “셈이 바르셨어요. 그런 분 많지 않아요.”

김예민씨는 2018년 7월부터 올 3월 초까지 시민모임에서 상근활동가로 근무하며 수산 할머니의 마지막 2년을 함께했습니다. 옛날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수산 할머니는 예민씨가 볼 때마다 처음 본다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2년이었습니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는 전쟁〉(2008) 속 수산 할머니는 일본군의 폭력을 고발하며 울부짖지만, 예민씨에게 수산 할머니는 주변인들에게 하대 한번 하지 않고 따뜻한 품을 내어주던 어른이셨습니다. 언제나 유쾌하게 웃으며 손을 꼭 잡고 묵직한 목소리로 “고맙소” 하던 분이,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밥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기억도 의식과 함께 흐려지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보고 가자고 한다’며 무서워했습니다.

이수산은 1944년 8월께 취업 사기를 당해 북만주의 목단강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가난한 집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돈벌이가 꿈이었던 열다섯 살의 이수산을 속인 그 남자들일까요. 이수산은 위안소 생활 넉 달여 만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위안소를 탈출하지만 곧 잡혀와서 모진 고문을 당합니다. 이수산을 불 인두로 지지던 그 일본군들일까요. “할머니와 저는 피해자와 지원자의 관계가 아니에요. 그냥 우리예요”라고 김예민씨는 말했습니다.

출산휴가를 끝내고 시민모임으로 복귀한 이연규씨의 첫 업무는 수산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연규씨는 2017년 서울에서 대구로 이사를 와 상근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서울말을 쓰는 연규씨를 할머니들은 어색해했습니다. 수산 할머니도 연규씨보다는 오래 만난 시민모임 식구들을 더 반기셨습니다. 연규씨는 그렇게 환영받는 동료들이 부러웠습니다. 연규씨는 수산 할머니가 댁에 계실 때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계실 때는 거의 매일 만나러 갔습니다. 하루는 임신을 해서 눈에 띄게 나온 연규씨의 배를 수산 할머니가 한참을 쳐다보셨습니다. 이수산은 위안소에서 임신이 되어 낙태수술을 받던 중 자궁을 적출당합니다. 연규씨는 혹시 수산 할머니가 나쁜 기억을 떠올릴까 싶어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수산 할머니는 ‘혹시 임신이 아닐까 봐’ 연규씨의 배를 쳐다만 보셨답니다. 주사를 많이 맞아 여기저기 붓고 멍이 든 손으로 수산 할머니가 열심히 포도 껍질을 깝니다. ‘거봉이라 껍질째 드셔도 될 텐데 소화가 잘 안 되시나 보다’ 하는데 “임신부 먹어라” 하시며 그 알맹이를 연규씨에게 건넵니다. 연규씨는 그날 처음으로 다른 동료들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입원 중인 수산 할머니는 매일 연규씨의 몸 상태를 물어보셨습니다. 출산 후 백일 된 아기와 남편을 데리고 수산 할머니를 만나러 병원에 갔을 때, 수산 할머니는 아이가 예쁘냐고 묻는 연규씨에게 간신히 “예”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날이 연규씨가 살아계신 수산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었습니다. 복직 첫날 빈소에 가면서 동료가 그날 이후 할머니가 자기 이야기를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슬픈데도 그 말이 좋았습니다. 빈소에 들어선 연규씨를 본 수산 할머니의 아들이 갓난애도 있는데 지금 여길 오면 어떡하냐며 어서 가라고 걱정하자, 연규씨는 펑펑 웁니다. “위안소에서 만난 조선 소녀들의 이름조차도 잊지 않고 계셨어요.”

자원활동가를 하다가 2015년 8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서 일한 백선행씨는 어린애처럼 볼이 통통한 수산 할머니를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산 할머니의 뼈대가 굵고 투박한 손도 좋았습니다. 선행씨는 수산 할머니의 굵고 투박한 손이 그립습니다. 낯선 땅에서 씩씩하게 꾸리신 삶과 가족들에 대한 당신의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존경합니다. “할머니 너무 귀여워요 하고 솔직하게 말해볼걸. 이제 와서는 이런 것도 후회가 돼요. 참 멋있는 분이셨어요.”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2008년 8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한·일 청년인권캠프에서 이수산 선생님이 증언을 하고 있다.

“전보다 작게 조금만 부끄러워하겠소”

이수산은 2007년 이동원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2008년 여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한·일 청년인권캠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날 송신도할머니와 지원자들을 담은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보고 마이크를 꽉 움켜쥔 이수산은 “이번에 일본 와서 좋은 경험 많이 하오. 송신도 할머니 영화를 보고 나니 내 마음이 달라지는 거 같소. 저그이 내 얘기요. 그전에는 나는 형제도 많고 해서 정신대 갔다 왔다는 것이 참 부끄러워 아무한테도 말도 안 하고 누가 알까 불안하기만 했소. 자꾸만 부끄러웠는데 내 잘못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드오. 그치만 하나도 안 부끄러운 건 아니오. 한국 사람들 중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전보다 작게 조금만 부끄러워하겠소(시민모임 소식지 75호에서)”라고 소감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달라집니다. 적극적으로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그해 11월23~25일 도쿄에서 열린 ‘제9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독일(2010년)에서, 오키나와(2013년)에서 증언을 합니다.

굳게 마음을 다잡아도 사람들 앞에 ‘위안부’ 피해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힘이 듭니다. 2013년에 오키나와 증언을 앞두고 몸이 안 좋아진 이수산은 결국 병원에 실려 갑니다. 이수산의 증언을 채록하고 오키나와 여정에 동행한 안이정선 시민모임 이사에게 이수산은 조국 현대사의 오욕을 맨몸으로 살아낸 여성입니다.

이수산은 피해 당사자로서 활동의 현장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를 비난하는 한국인들의 시선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자기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창피했고, 중국의 가족과 한국의 친인척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숨기도 했고, 언론에 노출되는 자신의 활동을 후회했습니다. 그런 이수산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시민모임은 피해자들의 소식을 전할 때 늘 이수산의 이름을 가렸고, 사진을 찍을 때면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게 미안했던지 이수산은 자기를 ‘대신’해서 활동하는 생존자들의 안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2005년 국적을 회복하고 피해자 등록을 한 이수산이 한국에서 산 15년은 피해 생존자로서 ‘드러냄’과 피해 생존자이기에 ‘숨김’의 반복이었습니다. 우리는 드러내지도 숨지도 못했던 이수산에게 어떻게 해도 갚지 못할 큰 빚을 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수산에게 든든한 가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생 이수산을 귀하게 여긴 남편이 있었고, 한국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모시고자 일찍 명예퇴직을 한 아들 부부가 있습니다. 이수산의 아들은 2008년 ‘제9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증언하는 어머니 곁에 있었습니다. 이런 행사에 한국 피해 생존자의 가족, 그것도 아들이 동행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아들은 ‘대구 거주 피해자’라는 익명이 아니라, ‘이수산’의 삶이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시민모임은 이수산을 ‘안타까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큰 어른으로 기억합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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