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자 2세 무덤을 지켜주세요
  • 정희상 기자
  • 호수 633
  • 승인 2019.11.0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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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한국 원폭 피해자에게 김형률은 노동계의 전태일 열사 같은 존재다.” 10월23일 서울시의회가 주최한 ‘원폭 피해자 지원방안 모색 정책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강제숙씨(55)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합천평화의집 운영위원장과 원폭 피해 2세 환우들을 지원하는 김형률추모사업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강원도 태백산 자락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원에서 차별 문제를 다루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1995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할머니 그림전’을 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린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끝나지 않은 겨울>라는 책에 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일제 강제징용자, 원폭 피해자 같은 다양한 전쟁 피해자 문제에도 눈을 돌렸다. 강씨가 김형률씨로 상징되는 피폭 2세의 건강실태 조사와 지원활동에 전념한 것은 2005년부터다.

원폭 피해자 2세인 김형률은 2002년 자신이 앓고 있던 방사선 유전성 면역질환을 공개하며 핵 피폭 유전 문제의 심각성을 처음 알렸다. ‘한국 원폭 2세 환우회’를 꾸려 원폭 피해자와 원폭 2세 환우에 대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에 힘을 쏟았다. 김형률은 아픈 몸을 이끌고 피폭 1, 2세대 모두 치료·건강·생존·인권을 보장받으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2005년 5월29일 김형률은 35세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강씨는 김형률의 유지를 이어받아 피폭자 특별법 제정 운동에 매진했다. 그 결과 2016년에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원폭피해자지원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2세의 건강권은 빠진 채 피폭 1세대들을 지원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졌다. 원인 모를 희귀 질환에 시달리는 피폭 2세를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원폭피해자지원 특별법 개정이 절실했다.

그는 올해 초부터는 생존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와 증언 채록 작업에 들어갔다. “원자폭탄 피해의 책임은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에도 있다는 점을 알리고, 젊은 세대가 아픈 역사와 소통하는 장으로 삼고자 했다.” 강씨는 김형률이 남긴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오는 11월 중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일정에 맞춰 국내 원폭 피해자 대표단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강씨에게 최근 근심거리가 생겼다. 경남 합천에 있는 김형률의 묘지 터가 경매에 넘어가는 바람에 바뀐 지주가 묘지 이장을 요구했다. “한국 원폭 피해자 2세 문제의 상징인 김형률의 묘지마저 합천에서 쫓겨나는 일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 평화 인권을 사랑하는 이들과 지자체의 관심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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